27화
휘이잉-
땅이 오롯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곳.
카리나는 제 뺨을 스치는 날 선 바람을 느끼며 날개를 퍼덕거렸다.
“오랜만이네.”
카리나는 입술을 할짝이며 생긋 웃어 주었다.
그녀의 웃음에, 마주 서 있던 루나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지금 루나의 앞에서 웃음이 나와, 언니?”
“그 이상한 말투는 여전하구나. 고치라고 수백 번을 말했던 것 같은데.”
카리나의 빈정거림에 루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제가 앉아 있는 그리핀의 등을 꽉 움켜쥐며 눈을 부라렸다.
“루나의 말투는 루나가 알아서 해.”
“카리나의 충고도 카리나가 알아서 할게.”
“언니랑 말싸움하려는 거 아니야!”
떽떽거리는 건 여전하네.
카리나는 조소하며 고개를 까딱였다.
“아니겠지. 아니니까 이렇게 많은 그리핀을 몰고 온 거겠지.”
[네가 갖고 있는 그리핀을 다 모아 온 것이 아니더냐? 쯧, 불쌍한 것.]
“뱀은 좀 닥쳐!”
피융!
루나가 쏜 화살이 아슬아슬하게 히론을 스쳤다.
카리나는 히론의 머리를 손으로 감싸며 차갑게 루나를 돌아보았다.
“내 히론한테 함부로 힘을 쓰면 어떡하니, 루나. 못되게 변해 버렸구나.”
휘잉!
날아갔던 화살이 되돌아왔다.
루나가 날린 것보다 더 빠르게 날아온 화살은 그녀가 타고 있는 그리핀의 꼬리를 스쳤다.
“이익……!”
루나는 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하아, 귀찮아.
며칠의 시간이 더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카리나는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언니가 그렇게 잘난 척할 수 있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거야.”
다시금 침착함을 되찾은 루나는 카리나를 뚫어져라 직시하며 말했다.
“루나는 2차 성장을 끝냈거든. 그리고 루나는 다른 힘들도 생겼어.”
그녀는 양팔을 벌렸다. 팔 안쪽에 새겨진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저건 분명.
“언니처럼 형제들을 죽였거든.”
아포칼리타 형제들의 마나핵.
카리나의 눈이 차게 식었다. 그녀는 딱딱한 시선으로 루나를 바라보았다.
“왜? 언니가 한 짓을 루나가 해서 놀랐어? 언니는 하고, 루나는 하면 안 되는 건가?”
카리나는 가빠지는 숨을 천천히 골랐다.
흥분하면 안 돼. 이깟 것으로 흥분하기에는 상대가 저급하잖니.
그녀는 침음을 삼키며 애써 미소를 머금었다.
“난 형제를 죽인 적이 없어, 루나.”
“대신 그 능력을 받았잖아! 그래서 강해진 거면서! 원래부터 강한 척하는 게 재수 없어!”
루나는 제 본심을 숨기려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부지깽이로 건드리면 파르르 올라오는 불씨처럼, 루나는 항상 불같은 아이였다.
그래서 원작에선 일찍 죽어 버렸지. 페넬로피의 심기를 거슬러서.
그런데 지금은…….
‘달라지려나?’
카리나는 손바닥 안에 제 기운을 뭉치며 생각했다.
“루나.”
카리나는 다시 루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치 진심으로 언니와 같은 얼굴을 하며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억울하면 아버지께 말하지 그랬어. 왜 이제 와서 이러니.”
그러나 그녀의 입술을 통해 나온 말은, 루나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아버지 얘기는 하지 마!”
쾅!
루나의 주변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저건 분명 불의 형제들에게서 발현되는 능력인데.
샐러딘의 형제들을 죽인 거구나. 그럼 내가 죽이지 않아도 샐러딘에게 죽게 되겠네.
카리나는 미간을 좁혔다.
“네가 어떻게 루나 앞에서 아버지 이야기를 할 수 있어? 네가 죽였잖아! 네가 루나의 아빠를 뺏어 갔잖아!”
쾅! 쾅!
불기둥이 연이어 솟구쳤다.
날름거리며 먹잇감을 찾는 불꽃들은 모두 다 카리나에게로 조준되어 있었다.
카리나는 그런 불꽃들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그래서, 이건 그거에 대한 복수니?”
루나는 두 손을 맞잡았다.
두 손에는 새빨간 불이 맺혀 있었다. 그녀는 맞잡은 손을 천천히 벌렸다. 화살의 모양새를 하고 있는 불이 보였다.
“아버지의 능력을 가져갔지?”
“그렇다면?”
“그건 루나 거야.”
쿠웅!
루나는 거대한 불화살을 카리나에게로 쏘았다.
지옥 끝까지 쫓아간다는 이 불의 화살은 그것이 누구라 한들 막지 못하리라.
챙!
화살이 맞닿아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꿰에엑!
그리핀들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뿌연 연기가 흩날렸다. 시야가 막막해졌다.
루나는 비스듬하게 입술을 비틀었다.
죽지는 않았더라도, 충분한 부상을 입었으리라.
그래. 카리나 아포칼리타도 별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때에 그리핀 떼로 카리나를 씹어 버리면……!
“이렇게 보니 루나는 참 욕심이 많은 아이구나.”
뿌옇게 퍼졌던 연기가 삽시간에 소멸했다.
환해진 시야 너머, 카리나가 보였다.
카리나는 루나가 던진 화살을 그대로 잡고 있었다.
“벌을 줘야겠네.”
화살이 검게 물들었다.
어둠의 기운이, 까마득한 땅을 가르고 솟구쳤다.
* * *
“대체 어떻게 한 거야!”
루나의 경악에 찬 고함이 드넓은 하늘을 빼곡하게 메웠다.
루나는 믿기지 않는 현상에 몸을 파르르 떨며 분기를 내보였다.
카리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비죽 웃을 뿐이다.
“방법을 궁금해할 때가 아닐 텐데, 루나.”
카리나의 손에 잡혀 있는 화살은 시꺼멓게 물들어 있는 터였다.
그녀는 화살의 끝을 루나에게로 조준했다.
그리고, 밀려드는 바람을 발돋움 삼아 루나에게로 날려 보냈다.
“이런 미친……!”
루나는 타고 있던 그리핀에서 빠르게 뛰어내렸다.
쾅!
화살에 맞은 그리핀은 속절없이 땅으로 추락했다.
다른 그리핀의 등에 올라탄 루나는 이를 바득 갈며 카리나를 노려보았다.
“루나가 만든 걸 이용하다니! 너는 끝까지 비겁해!”
“다른 형제들을 일부러 죽이고 능력을 빼앗아 온 너는 안 비겁하다고 생각하니?”
카리나는 땅에서부터 솟구쳐 나온 어둠의 기운을 손으로 더듬으며 말했다.
그 새까만 힘을 집약시키며, 그녀는 루나를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너랑 길게 싸우고 싶지 않아, 루나.”
진심이었다. 카리나는 이 전투를 길게 끌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이는 그녀가…….
약해져 있기 때문이다.
방금 루나의 화살을 붙잡은 것만으로도 충분한 힘을 빼앗긴 터였다.
숨긴 손에는 경련이 가득했다. 발끝부터 찾아온 떨림이 몸을 잠식하고 있었다.
빠르게 끝나야 해.
카리나는 날개를 사선으로 펼치며 루나를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그러니, 얌전히 죽으렴.”
카리나의 눈이 소름 끼치게 번뜩였다.
파스슷!
새까만 동공이 세로로 찢어졌다. 마치 찢긴 풀잎처럼 거친 눈동자가 루나를 직시했다. 그녀의 힘이 순식간에 방출되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루나는 잠시 돌로 변했다가 살아났다.
“그 더러운 능력을 루나가 모를 것 같아?”
카리나의 눈매가 사붓 떨렸다.
“루나도 가고일의 피를 받았어.”
가고일. 탄생부터 딱딱한 돌인 마물.
가고일의 힘을 받은 건 자일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카리나는 제게 달려드는 그리핀을 한 번에 베어 내며 미간을 좁혔다.
“누가 줬을 것 같아? 응? 누가 루나에게 그 힘을 나눠 줬을까?”
루나는 그리핀의 목을 그러당겨 한껏 높이 날아올랐다.
“자일 오라버니가 줬어.”
그녀는 사방에 퍼진 불기둥을 하나로 모았다. 그리핀의 몸집보다 더 커다래진 불이 화마를 날름거렸다.
“널 죽여 오래.”
쾅!
불은 순식간에 카리나에게로 쏟아졌다.
카리나는 빠르게 날았지만, 불길을 완전히 피할 수 없었다.
날개의 끝부분이 불에 타들었다. 그리고 가루가 돼 부스스 흩어졌다.
지옥의 불.
저것에 닿으면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사라져 버리리라.
“어때? 믿었던 자일 오라버니께 배신당한 느낌은?”
루나는 한껏 비웃음을 내보였다.
승패를 가늠하기 힘든 전투였지만, 루나는 자신이 승리에 더 가까운 쪽이라 확신했다.
카리나의 얼굴에 번져 있는 당혹스러움을, 흔들림을 관찰했기 때문이다.
곧이어 다가올 승리의 순간이 그녀를 한껏 기쁘게 만들었다.
루나는 카리나가 싫었다.
언제부터, 라고 묻는다면 태어날 때부터, 라고 말할 수 있었다.
실험체가 생명체가 되어 이 세상에 처음 눈을 뜨게 되었을 때, 루나는 본능적으로 아버지의 그림자를 좇았다.
이는 아포칼리타의 실험체들이라면 응당 번지는 감정이었지만, 루나는 그 정도가 특히 더 심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다. 더 나아가 그에게 사랑받고 싶어 했다.
리치인 그가 줄 수 없는, 따뜻한 온기 한 줌을 느끼고 싶어 했다.
그래서, 카리나가 싫었다.
아버지의 명령이라면 자다가도 달려 나가 수행하고 오는 자신과는 달리 카리나는 매사를 귀찮아했으며 도망치기 일쑤였고, 가끔씩 명령을 따른다 해도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돌아오기가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카리나를 아꼈다. 그의 명령에 복종하는 나보다도 더.
자신은 개처럼 아버지에게 배를 까고 드러누워야 겨우 관심 한 톨을 받는데, 카리나는 고고한 고양이처럼 창가에 앉아 털을 할짝이기만 해도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이것은, 불공평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루나는 카리나를 혐오했다.
불공평한 잣대를 만드는 것은 아버지였지만, 질투는 시혜를 받는 이에게로 날아갔다.
너만 없었다면, 너만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 사랑은 나의 것이 되었을 테니까.
탑에서의 카리나는 아버지의 사랑과 자신의 질투를 먹고 무럭무럭 자라났다.
어느 순간 그녀는 2차 성징을 마쳤고, 자신이 감히 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해져 버렸다.
이 모든 것은 아비의 은혜 덕분이라고. 루나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카리나는 그런 아버지를 죽였다.
그리고 모두의 터전이었던 탑을 무너뜨렸다.
용서할 수 없었다.
아비를 배신할 것이었다면 아비의 사랑을 내게 넘겨주었어야지. 갖고 싶지 않았다면 나에게 주었어야지!
목마른 자신은 물 한 방울마저도 기꺼이 받아들였는데, 카리나는 한 바가지의 물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엎어 버렸다.
어찌 용서할 수 있겠는가.
어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죽일 거야. 정말 죽여 버릴 거야.’
자일은 그녀를 살려 두라 말했지만, 루나는 결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돌로 만들었던 몸을 원상태로 돌리며 카리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언니는 루나를 죽이지 못해. 포기하는 건 어때? 그럼 아프지 않게 죽여 줄게.”
카리나는 그런 루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무 표정도 없는 얼굴이었다. 그렇기에, 왜인지 모를 꺼림칙함이 느껴졌다.
“하아.”
카리나는 낮은 한숨을 내뱉었다.
“루나는 참 거짓말을 잘해. 어디서 그런 못된 걸 배웠을까.”
카리나는 목을 감고 있는 히론의 날 선 비늘을 느끼며 말했다.
이윽고 그녀는 펼친 날개를 빠르게 퍼덕였다.
태양이 떠 있는 가장 높은 곳으로 솟구친다. 그리고 빠르게 낙하했다.
루나가 앉아 있는 그리핀의 목덜미에 안착한다.
“이익……!”
“자일이 감히 나를 죽이려 할 리가 있겠어?”
카리나는 손목을 한 번 비틀었다. 손바닥에 맺힌 검은 기운이 크기를 키우며 넘실거렸다.
“지금도 내가 보고 싶어 엉엉 울고 있을 텐데.”
카리나는 루나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쾅!
폭발한 기운이 루나의 안면을 강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