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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28화 (28/135)

28화

카리나는 루나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쾅!

폭발한 기운이 루나의 안면을 강타했다.

루나가 비틀거리는 틈을 타 히론이 순식간에 밀려갔다. 루나의 목을 단단히 조른다.

“이, 이거 놔……!”

[네까짓 것이 할퀴어 봤자 이 고귀한 히론 님의 비늘은 상하지 않는다. 포기하거라, 잡종아.]

히론의 빈정거리는 말에, 루나는 더 크게 버둥댔다. 날카로운 손톱으로 히론의 몸을 박박 긁는다.

그러나 고작 2차 성징이 끝난 힘으론 히론을 뿌리칠 순 없을 터였다. 카리나는 그런 루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루나는 왜 이렇게 멍청할까.”

카리나의 붉은 입술이 비스듬하게 비틀렸다.

“내가 곱게 살려 주었을 때, 알아서 꼬리를 말았어야지.”

카리나가 약해져 있다 한들, 그것은 상대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루나 따위야 한 손가락으로 눌러 버릴 수 있을 만큼 강했다.

절대, 패배할 리 없었다.

“왜 부득불 기어와 이 언니의 심기를 건드리려 해.”

“으윽……! 이, 이거……! 놔……!”

루나는 손을 바둥거리며 불꽃을 피워 냈다.

그러나 카리나는 가볍게 그들을 소멸시켰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검은 불꽃만을 움켜쥔다.

“샐러딘의 혈족들을 죽였지?”

지옥의 불. 카리나는 익숙한 불을 더듬으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널 살려 준다 해도 샐러딘에게 죽어 버리겠구나. 안타까운 것.”

카리나는 그 불꽃을 움켜쥐었다. 소멸한 불의 그을음을 매만지며, 그녀는 루나의 팔을 붙잡았다. 형제들의 마나핵이 새겨져 있는 팔을.

“그러니 언니가 순순하게 죽여 줄게. 아프지 않게.”

히론은 루나의 목뼈를 부러뜨린다는 듯 더더욱 몸을 조였다.

카리나 역시 손끝에 힘을 모았다.

루나의 마나핵은 머리에 있을 테니, 그곳만 꿰뚫으면 되리라. 생각해 손을 뻗었지만.

꿰에엑!

그리핀의 존재를 잠시 잊고 있던 그녀였다.

순식간에 날아온 그리핀은 카리나와 루나가 앉아 있는 그리핀에게로 몸통을 부딪쳤다.

덜컹!

카리나는 순간 균형을 잃었다. 그리고 루나는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

“저리 꺼져 버려!”

루나는 온 힘을 모아 방출했다.

히론은 빠르게 카리나에게로 다가갔고, 카리나 역시 그리핀의 목덜미를 붙잡으며 균형을 유지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흐윽!”

카리나는 목을 움켜잡았다. 루나의 손톱이 그녀의 상처를 스친 것이다.

상처를 감싸고 있던 천이 풀어졌다.

왈칵, 피가 쏟아졌다.

막아야 하는데, 생각할 겨를도 없이 루나의 불꽃이 그대로 날아왔다.

쾅!

카리나는 팔 한쪽을 그대로 내어 준 채 추락했다.

* * *

“콜록…….”

카리나는 어깨를 웅크리며 마른기침을 내뱉었다.

피가 섞인 기침이 연이어 찾아왔다. 카리나는 목을 움켜쥐며 고통에 찬 신음을 내질렀다.

[괘, 괜찮으냐? 저, 정신 좀 차려 보거라!]

히론은 꼬리를 파르르 떨며 카리나의 주변을 맴돌았다. 으득, 카리나는 이를 꽉 깨물며 손을 바르쥐었다.

“정말…….”

카리나는 번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얌전히 죽여 주고 싶어 최대한 발광하지 않았건만.

“다들 왜 이리 짜증 나게 구는 건지.”

카리나는 두 다리에 힘을 주며 몸을 일으켰다.

저 멀리, 자신에게로 날아오고 있는 루나의 모습이 보였다.

카리나는 남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챙!

손톱이 하염없이 길어졌다. 뾰족하고, 단단한. 그리고 독이 있는.

카리나는 뱀의 독니처럼 날카로운 손톱을 뻗으며 도약을 준비했다.

이때였다.

“……뭐니, 저건.”

카리나는 갑자기 밀려오는 푸른 바람을 느끼며 눈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녀는 발견할 수 있었다.

푸른빛을 내고 있는 성검을 쥔 채 제게로 다가오는, 르네거를.

* * *

카리나가 떠난 후.

황망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르네거를 깨운 건 성검의 전음이었다.

『힘을 갖고 싶으냐?』

성검은 검신을 부르르 떨었다. 당장 검집에서 빼달라는 듯, 그는 새파란 빛을 발광하며 힘을 키웠다.

“……아니요.”

르네거는 느리게 대답했다. 성검의 손잡이를 꽉 붙잡으며, 르네거는 침음을 흘렸다.

“당신의 힘을 쓰면 제가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대관절 무슨 상관이더냐?』

성검은 더욱 빛을 방출했다. 검집의 틈으로 새어 나온 빛은 르네거의 손을 더듬거리며 올라왔다.

『너는 라템의 기사이자 신의 아들이다. 주신의 말을 따라야 하는 피조물일진대, 네 목숨을 아까워하고 있단 말이냐?』

머리가 깨질 듯 아파 왔다.

머리통을 관통하는 두통에 르네거는 이마를 부여잡으며 주저앉았다.

바닥을 움켜쥐는 손등에는 퍼런 핏줄이 솟구쳐 있었다. 파르르 손이 떨렸다.

『주신께서 가라사대 너의 살과 피는 모두 나의 것이라 하니.』

성검은 그의 혼란스러운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런즉 내 안에 신이 거하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를 입고 사는 것은 신의 은혜와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니.』

“그……만하십시오.”

『말씀을 받들라. 거룩함으로 지어진 새 사람을 입으라.』

“……그만!”

르네거는 고개를 처박으며 가파른 숨을 내뱉었다.

하아, 하, 몇 번의 숨을 몰아쉬어도 심장의 떨림은 멎지 않았다. 숨이 턱턱 막혔다.

『교리를 잊지 마라.』

르네거는 입술을 짓씹었다.

성검의 말이 맞았다.

그는 신관이었으며, 성검의 주인이었으며, 종래에는 신의 아들이었다.

교리를 의심할 순 있으나 어길 수는 없었다. 교리를, 배반할 수 없었다.

『죽는 것이 두려우냐?』

죽음의 목전까지 다녀온 이상, 인간으로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인과였다.

살고 싶은 것이겠지.

성검의 주인 주제에, 감히 살아남고 싶은 것이겠지.

그러나.

르네거의 죽음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의 탄생이 당연한 것이듯, 죽음 역시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죽어야만 했다.

자신을 위해서.

『죄의 삯은 사망이요, 신의 은사는 라템의 안에 있는 영생이리라.』

성검은 더욱더 커다란 빛을 방출했다.

신의 것처럼 투명하고, 신의 것처럼 청명한. 신의 냄새가 나는 빛을.

『네가 탄생부터 지니고 있는 죄는 죽음으로써 사해질 수 있다.』

성검은 르네거의 정신을 지배했다.

『나를 쥐어라, 르네거.』

르네거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성검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느리게, 아주 느리게 성검을 뽑는다.

『신의 아들은 반드시 죄악의 피를 묻혀야 하느니.』

촤악!

뽑힌 성검은 온 하늘을 물들일 것처럼 찬란하게 발광했다.

* * *

“……르네거?”

[맞는 것 같군.]

카리나는 침음을 흘렸다. 얌전히 비켜 있으라고 했을 텐데, 기어코 성검을 뽑아 버렸구나.

저런다 한들 루나에게 상대가 되지 않을 텐데.

“말려야겠어.”

[뭐?]

카리나는 피가 나는 목을 붙잡은 채 몸을 일으켰다.

왼팔이 날아가 버리고 오른팔밖에 남아 있지 않은 탓에 몸의 균형이 잘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 팔을 재생산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했으니까.

“르네거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잖아.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지.”

[정말 그 이유뿐이냐?]

“그럼 뭐가 있겠어?”

히론의 의뭉스러운 시선이 닿았으나, 카리나는 애써 무시했다.

그와 말다툼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르네거를 루나의 공격에 휘말리게 둘 수 없었다.

어찌 되었든 그는 자신과 맹약으로 이어져 있는 인간,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었으므로.

카리나는 제게 다가오는 르네거를 향해 다소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내가 가만히 있으라고 하지 않았어? 왜 튀어나와서……!”

촤악!

카리나는 제게 향해진 그의 공격을 빠르게 피했다.

뒤로 공중제비를 돌며, 자세를 잡는다.

이게 대체 무슨.

그녀의 눈이 날카롭게 변모했다.

“르네거.”

하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빛을 뿜어내는 성검을 더 세게 바르쥘 뿐.

챙!

그는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카리나에게 다가왔다.

기기긱, 카리나는 손톱으로 검을 막으며 아득 이를 깨물었다.

그녀는 르네거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알아챌 수 있었다.

그가 성검에 홀려 있다는 사실을.

푸른 눈은 빛을 잃어버렸다. 반짝이던 미소도 찾을 수 없었다. 새하얗던 얼굴은 핏기가 없어져 죽음의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빌어먹을 성검 새끼.”

그녀는 성검을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뒤로 물러섰다.

방금 전 검을 막은 오른손이 힘에 부친 듯 파르르 떨렸다.

이게 진정한 라템의 힘인가. 카리나는 오른 어깨를 돌리며 생각했다.

왼팔도 사라져, 목에 상처도 벌어져, 이래저래 좋지 않은 상황이건만 르네거까지 이 지경이라니.

일단, 르네거의 정신을 돌려놓는 게 우선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카리나는 빠르게 발을 굴렸다.

“히론, 넌 르네거의 다리를 막아.”

[알겠다.]

히론은 바닥을 기어 르네거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르네거의 두 다리를 한꺼번에 묶어 그를 넘어뜨렸다.

그가 비틀거리는 순간을, 카리나는 놓치지 않았다.

“윽!”

르네거는 신음을 내질렀다.

카리나의 손톱이 제 어깨를 관통한 까닭이다. 그녀는 빠르게 손을 거두었다.

“정신 차려.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니까.”

퍽!

카리나는 르네거의 머리를 발로 걷어차며 말했다. 그리고 여전히 기분 나쁜 빛을 내고 있는 성검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성검아, 이러다간 네 주인이 정말 죽을지도 몰라.”

그러나 성검 역시도 대답이 없었다.

“하긴. 넌 네 주인이 죽길 바라겠지.”

카리나는 짜게 웃었다.

성검의 빛은 검신뿐 아니라 르네거의 손과 팔, 그리고 목까지 덮고 있었다.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빛은 르네거의 얼굴까지 닿았다.

정말로, 홀려 버린 것이다.

“미치겠네.”

쾅!

카리나는 다시금 덤벼드는 르네거의 일격을 피하며 미간을 좁혔다.

이대로 가다간 끝이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죽일 수도 없고.

입술을 자근자근 씹는다. 타개할 방법을 고안해 보지만 영 답이 보이지 않았다.

“뭘 하고 있는 거야?”

루나의 목소리였다.

젠장. 카리나는 르네거와 거리를 벌리며 루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루나는 여전히 그리핀의 몸에 타고 있었다.

지상과는 멀지 않다.

그저 가만히 떠 있으며, 카리나와 르네거를 내려다볼 뿐.

루나 역시 몸이 만신창이인 상태였다.

히론의 비늘에 갈려 목의 살이 훤히 갈라져 있었으며, 발끝이 타 버려 무릎까지 없어져 버린 상태였다.

하지만, 그러해도 그녀는 눈에 서린 분노를 지우지 않았다. 루나는 이를 으득 갈았다.

“그 인간은 라템의 개잖아?”

루나는 르네거를 바라보며 서서히 눈을 깜빡였다.

“왜 그 인간을 안 죽이고 있어? 루나가 모르는 비밀이라도 있는 거야?”

“넌 몰라도 되니까 닥쳐.”

휘익!

카리나는 대지에서 뽑아 낸 어둠을 그녀에게로 날렸다.

꿰엑!

그리핀은 소리를 내지르며 그대로 추락했다.

하지만 루나는 가뿐하게 지상으로 착지했다.

“으음, 으음, 언니가 화도 내는구나.”

루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고개를 까딱였다. 피에 절은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카리나를 바라본다.

“저 인간을 아끼나 봐.”

그녀는 양 입술을 찢으며 활짝 웃었다.

“그럼 죽여야지!”

루나는 날아온 그리핀의 다리를 잡고 그대로 도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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