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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29화 (29/135)

29화

“그럼 죽여야지!”

루나는 날아온 그리핀의 다리를 붙잡고 그대로 도약했다. 하늘 저 높이 올라간다.

젠장.

카리나는 그런 루나를 막으려 했지만 날아오는 성검의 빛에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카리나는 제게 다시 공격을 하려 하는 르네거의 복부를 걷어찼다.

윽!

소리를 내며 스러지는 그의 뒷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빠르게 결계를 펼쳤다.

“이건 못 막을 거야, 언니!”

루나는 양팔을 크게 펼쳤다.

그 즉시, 새빨간 화살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수십 개, 수백 개. 아니, 수천 개.

하늘을 빼곡히 메운 화살은 한 지점을 조준했다.

“곱게 죽이는 건 좀 그렇지만, 어쩔 수 없지. 안녕!”

쿠구궁!

화살이 쏟아졌다. 카리나는 르네거를 제 품에 안은 채 결계를 펼쳤다.

* * *

쾅!

루나의 화살은 생각보다 위력이 강했다. 카리나가 만든 결계가 조금 희미해졌다 다시 원상태를 찾았다.

“하아, 하…….”

카리나는 숨을 몰아쉬며 이마를 짚었다.

몸에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이는 루나의 화살을 막은 결계 때문이 아니었다.

그쯤은 가볍게 막을 수 있었다.

제아무리 약해져 있다 한들, 루나 따위를 이기지 못할 리가 없었다.

다만 변수가 있었다.

“쿨럭…….”

카리나는 피를 토하며 배를 움켜잡았다. 성검이 꿰뚫어 버린, 배를.

결계 속에 르네거를 가둘 때, 그는 카리나의 복부에 검을 내리꽂았다.

막을 새도 없이 꽂혀 버린 탓에 카리나는 속절없이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쿨럭, 피가 쏟아졌다.

[정신 차려라! 카리나!]

히론은 그녀의 주변을 뱅뱅 돌며 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카리나는 안간힘을 다해 몸을 일으켰다.

“이런 걸론 안 죽어.”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카리나는 숨겨 놓은 그 ‘수’를 써야 할 때가 도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카리나는 이를 바득 깨물며 제 몸을 깔고 있는 르네거를 올려다보았다.

르네거는 성검을 쥐고 있었으나, 그것을 휘두르진 않았다. 그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분명 성검에 홀려 제정신이 아닐 텐데, 이상하리만큼 황망한 시선이었다. 마치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처럼.

카리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피 냄새가 폐부에 들이찼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그 수를 쓰면, 르네거는 죽는다.

그래. 죽어 버리겠지.

제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이 상황에서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만, 카리나는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르네거가 죽는다. 죽어 버린다. 인간이니 다시 살아날 수 없다. 혼조차 찾지 못하리라.

그의 실낱같은 목숨을 이렇게 재단해 놓으니, 이상하리만큼 묘한 감정이 찾아왔다.

구역질이 나올 것처럼 속이 답답했고,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처럼 속이 들끓었다.

이런 건, 기꺼운 감정이 아니었다.

그래. 이 감정은 분명 내 손으로 르네거를 죽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르네거는 자일에게 죽어야만 했다. 여기서 죽을 이가 아니었다.

콰과광!

루나가 뿌리는 화살이 결계를 꿰뚫 듯이 쏟아졌다.

쿨럭, 카리나는 다시 한번 피를 토했다. 르네거의 얼굴에 핏방울이 튀겼다.

더 버티기엔 힘들 것이리라. 빠르게 결정을 해야 했다.

“후우.”

카리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르네거의 멱살을 붙잡았다.

“르네거.”

저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르네거는 성검을 들어 올리지 않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그 나름의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네가 이러고도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난 정말 너를 죽일 거야.”

그녀는 르네거를 그대로 잡아당겼다.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갠다. 입 안 가득 맺혀 있는 피를 흘려 넘기며, 그의 숨을 받아 삼킨다. 그의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성력이 담긴 피가 꿀렁꿀렁 넘어왔다.

소름 끼치는 맛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카리나는 그것을 받아먹었다. 뒤틀렸던 내장이 조금씩 회복하는 것이 느껴졌다.

카리나는 더욱더 깊게 그의 안으로 들어갔다.

제 피를 그러모아 그의 목구멍 끝까지 집어넣는다. 그의 얼굴을 덮었던 빛이 서서히 점멸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때였다.

챙!

소리가 나며 르네거의 손이 가벼워졌다. 카리나는 서서히 고개를 떼어 냈다. 그리고 르네거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성검을 내팽개친 채, 카리나의 뺨을 붙잡고 있었다.

그러며 그녀를 허망하게 응시한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찌른 카리나의 복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리나 님.”

르네거는 떨리는 손으로 카리나의 뺨을 더듬었다.

“왜 절 죽이지 않았습니까?”

그는 마치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울 사람이 누군데.

카리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 * *

『죽여라! 죽여!』

성검의 의지는 르네거를 지배했다.

이미 성검에 잠식되어 버린 르네거는 그 어떤 반항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성검의 명령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보았다. 카리나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더불어 보았다. 카리나를 공격하고 있는 자신의 두 팔을.

또한 보았다. 카리나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저를 끌어안은 것을.

마지막으로 보았다.

자신이, 그런 카리나에게 검을 꽂은 것을.

『푸하하! 보았느냐? 이것이 바로 라템의 힘이다! 아포칼리타 따위가 감히 이길 수 없단 말이다!』

성검은 비열하게 외치며 르네거의 오른손을 움직였다.

까득, 검이 뒤틀렸다. 그녀가 고통에 찬 신음을 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에게 원망의 눈빛을 보내지 않고 있었다. 그저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양, 받아들이고 있다는 양.

『아포칼리타는 마나핵을 없애야 해!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 사지를 난도질해야 한다! 뭣 하느냐! 당장 팔다리를 잘라 버리지 않고!』

성검은 더욱 거세게 르네거의 정신을 옥죄었다. 그러나, 르네거는 움직일 수 없었다.

이것을 바랐는가?

정녕, 이것을 바랐는가?

카리나 아포칼리타를 죽이는 것을, 진심으로 바랐는가?

『르네거!』

카리나는 홀로 도망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결계 안으로 넣어 주었다. 그러지만 않았어도 다칠 일은 없을진대, 그녀는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나를 보호했다.

왜, 왜?

나를 살리기 위해서?

『내 말을 듣지 않는 것이냐!』

나는 이 전투가 끝나면 죽게 되리라.

성검의 빛은 곧 나의 힘, 성검의 힘은 곧 나의 생명이었으므로.

이렇듯, 성검은 나의 목숨을 지켜 주지 않는다. 신은 나의 생명을 저버렸다.

한데 왜.

카리나 아포칼리타는 대체 왜.

『르네거! 신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냐!』

믿었다.

죽음 후에 구원이 나를 기다리고 있노라고.

그 믿음 하나로 평생을 버텨 왔다.

내가 죽어 신의 곁으로 가야만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네가 정녕 신의 형벌을 받고 싶은 것이냐!』

나는 이미 카리나에게 구원을 받았다.

그녀의 손에 의해 몇 번이고 되살아났다.

나를 나락에서 꺼내 준 이는, 신이 아니었다.

카리나. 그녀였을 뿐.

그렇기에 선택하겠다.

『르네거!』

구원이 곧 죽음이라면,

“……카리나.”

나는 기꺼이 그 죽음을 거역하리라.

* * *

“이제 정신을 차렸네.”

카리나는 헛웃음을 뱉으며 르네거의 어깨를 밀었다. 그의 몸을 떨쳐 내기 위해서였다.

“무거워. 비켜.”

르네거는 그런 카리나를 일으켜 주며 가파른 숨을 내쉬었다. 죄책감으로 점철된 숨이 닿았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저 성검부터 녹여서 없애 버려. 재수 없는 것 같으니라고.”

“카리나.”

르네거는 입술을 짓씹으며 숨을 삼켰다.

흔들리는 시선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카리나는 왜인지 그를 살려 두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죽었다면 저런 얼굴도 보지 못했겠지. 카리나는 서늘하게 웃었다.

“상처는…… 상처는 어떠십니까.”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히론은 그런 르네거를 흘겨보며 카리나의 깊게 베인 상처를 핥았다.

르네거는 두 주먹을 바르쥐었다. 숨을 쏟아 낸다.

“그 팔은 어떻게 되신 겁니까. 혹시 제가…….”

“너에게 두 번 당할 일은 없어. 이건 루나와 싸우다가 튕겨지는 바람에 이렇게 된 거야.”

카리나는 오른팔로 왼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자 잘려 나간 단면을 중심으로 검은 거품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사람의 머리통만큼 커지다가, 다시 작아지기를 반복한다.

꿀렁꿀렁거리는 검은 기운은 카리나의 팔을 창조해 내기 시작했다.

“징그럽지?”

카리나는 자조적이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 역시도 오랜 시간 적응하지 못했던 신체였다. 그렇기에 르네거 역시도 같은 생각을 할 줄로 알았는데.

“누가 그런 말을 합니까.”

르네거는 카리나의 만들어지고 있는 손을 기꺼이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름답습니다.”

대체 무슨.

반문하려던 찰나, 또다시 화살 비가 쏟아졌다.

쿵, 쿠웅.

결계가 뒤틀리며 흔들렸다. 카리나는 배를 누르며 이를 꽉 깨물었다.

이런 만신창이인 몸 상태로 결계를 여기까지 유지한 건 대단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더 결계 속에서 버틸 수가 없었다.

“결계가 풀리면 넌 도망가 있어. 루나는 내가 처리할 테니까.”

“그 몸으로 어딜 간다 하십니까.”

“넌 루나를 이기지 못해.”

“아니요.”

르네거는 카리나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제가 합니다.”

그는 널브러져 있던 성검을 들어 올렸다.

그 즉시, 검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빛이 천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라지지는 않는다.

한곳으로 뭉쳐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뭉쳐진 빛은 르네거의 손으로 넘어왔고, 팔을 통해 가슴까지 밀려왔다. 그리고 사방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살이 물든다. 그의 머리칼이 물든다. 그의 모든 것이 빛에 물든다.

마치 신의 현신처럼 빛나는 모습에, 카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건. 저 힘은 분명.

챙!

이 순간, 결계가 깨졌다.

산산조각 난 유리처럼 사방으로 퍼진 결계는, 루나의 눈에도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녀는 더욱 크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죽어 버려!”

거대한 불의 화살 수천 개가 쏟아졌다. 르네거는 검을 움켜쥔 채 그 가운데에 우뚝 섰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제 몸에 남아 있는 성검의 기운을, 성검에 남아 있는 자신의 생명력을, 모든 힘을 뽑아 올렸다.

새하얀 빛. 신의 힘이자 내가 갖고 있는 본연의 것.

‘……이제는.’

르네거는 검의 궤적을 크게 휘둘렀다.

꿰에엑!

그리핀 수백 마리가 떨어졌다. 화살 수천 개가 그대로 베어졌다.

화르륵 타오르는 대지, 황량해진 광야. 그 가운데에, 르네거가 서 있었다.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으리라.’

검게 물들어 버린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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