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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30화 (30/135)

30화

루나가 퍼부은 회심의 일격은 모조리 힘을 잃고 곤두박질쳤다.

쿵, 쿠웅.

거대한 폭음이 대지를 가득 메웠다. .

그러나 르네거와 카리나에게는 아무 피해를 주지 못했다.

모두 다 멀찍이 떨어져 폭발한 덕이다.

그러나 폭발에서부터 밀려온 바람은 막지 못했다.

휘이이잉.

불길과 모래를 품은 바람이 물밀 듯 밀려왔다.

몸이 밀릴 정도로 거센 바람에, 카리나는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히론 역시 카리나의 허리를 감싸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오롯이 눈을 뜬 순간.

카리나는 발견할 수 있었다. 폐허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르네거를.

신의 은총을 받은 것을 자랑하듯 찬란했던 백금발은 검게 물들어 있었다.

성검 역시 마찬가지였다. 푸른빛을 뿜어내고 있던 성검은 그 빛을 잃었다. 새까맣게 물들어 버린 검신.

흡사, 마검처럼.

여명을 저버린 밤처럼 심연과 가장 가까운 색이 성검을 잠식하고 있었다.

“……저건.”

카리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왜 저 힘이 르네거에게?

그녀는 완전하게 어긋나 버린 미래를 더듬으며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저게 무슨 일이냐?]

히론은 황당하다는 듯 눈을 크게 올려 뜨며 말했다.

카리나는 그런 히론을 오른팔에 감으며 몸을 일으켰다.

“성검의 진정한 주인이 된 거야.”

진정한 주인이 왜 르네거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카리나는 이마를 짚었다.

원작에서, 중반부에 비로소 등장하는 인물이 있었다.

케셰트 라템. 남주인공.

그는 르네거가 죽고 난 후 빈 성검의 주인 자리를 꿰차는 인간이자, 페넬로피 데이펜의 진정한 사랑이 되는 이였다.

케셰트는 성검에 깃든 수많은 원혼의 힘을 알아챘다. 그래서, 그는 그 힘을 갈취했다. 성검을 조종할 수 있는 진정한 ‘주인’이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성검과 그의 머리 색은 어둠을 품은 것처럼 새까맣게 변해 버린다.

원작에선 성검에 갇혀 있던 혼의 색이 그대로 전달되었기에 생긴 변화라고 서술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온전한 힘을 얻게 된 케셰트는 페넬로피와 손을 잡고 아포칼리타를 무너뜨린다. 그게 바로 소설의 결말이었다.

한데…….

‘왜?’

카리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왜, 르네거가 성검의 진정한 주인이 되어 버린 것인가.

르네거는 원작이 시작할 때에 죽었어야 될 인물이었다.

그가 죽어야만 페넬로피가 각성해 성장을 마치고, 그로 인해 부수적인 남조연들이 따라붙어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말이다.

“……르네거가 죽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일까. 카리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렇게 된 이상, 앞으로의 내용을 차마 예측할 수가 없게 되었다.

[카리나? 괜찮은 것이냐?]

히론이 걱정스럽다는 듯 그녀의 손등을 핥으며 물었다.

카리나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응. 괜찮아.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고.”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히론은 카리나를 할짝이던 혀를 거두며 시선을 돌렸다. 르네거를 바라본다.

[저놈, 저대로 두어도 괜찮은 것이냐?]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도와주지 않아도 되냐는 말이다.]

히론의 말에, 카리나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어느새 멀쩡해진 복부에 손을 얹으며 대답한다.

“히론.”

히론은 세모꼴의 머리를 카리나에게로 돌렸다. 새하얀 눈알이 멀뚱거리며 그녀를 향했다.

“세계를 구원하는 힘을 뭐라고 생각해?”

[뭔 뜬금없는 말이냐?]

히론은 기가 차다는 듯 반문했다. 카리나는 그런 히론의 턱 아래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는 건 말야.”

솟아 있는 비늘을 더듬으며, 느리게 시선을 내린다.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는 뜻이야.”

성검에 갇혀 있던 힘. 즉 수천 명의 혼이 담고 있는 힘은 그야말로 거대했다.

그는 신의 힘이라 해도 무방했으며, 신의 현존이라 해도 무리가 없었다.

그러니,

“루나는 르네거를 이기지 못해.”

지금 르네거를 당해 낼 수 있는 이는 존재치 않으리라.

“성검은 세계를 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니까.”

쾅!

굉음이 울려 퍼졌다.

거대한 모래바람을 맞으며, 카리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정말 일이 귀찮아진 터였다.

* * *

르네거는 제 몸에 도는 힘을 느끼며 검을 바르쥐었다.

검게 변해 버린 성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어쩌면 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제게 힘을 빼앗겼기 때문일까. 아니,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 변화가 탈피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애벌레가 변태하여 나비가 되듯.

땅을 떠나지 못했던 때를 딛고 일어나 비로소 날개를 얻어 날아오를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몸 안에 도는 힘이 그러했고, 달라진 정신이 그러했다.

“넌 뭐야?”

아포칼리타의 목소리였다.

르네거는 어느새 지상에 발을 디딘 루나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무릎 아래가 날아가 있었는데, 지금은 두 다리가 돋아난 상태였다.

결코 자연스럽지 않은 회복력이었다.

하기야, 아포칼리타는 본디 법칙에 위반되는 존재가 아닌가.

저들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 애초에 없을 터였다.

“넌 뭔데 카리나가 보호를 해? 응?”

루나는 르네거에게로 한 걸음씩 다가갔다.

“카리나와는 무슨 사인데? 왜 카리나와 함께 있었던 거야? 응? 루나는 정말 궁금해.”

그녀의 뒤편에는 수백 개의 화살이 떠 있었다.

모두 다 불이 붙어 있는 화살로써, 공기를 불태울 것처럼 열기가 거대했다. 르네거는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대답하면 죽이기만 할게. 소멸당하면 너희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신에게도 가지 못하잖아. 응? 루나가 자비를 베풀어 주겠다니까?”

루나는 비죽 웃었다. 사냥감을 목전에 둔 맹수가 지을 법한 비소였다.

“그러니까 말해 봐, 카리나와는 무슨 사이야? 응?”

르네거는 그런 루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느린 깜빡임, 그 너머 존재하는 푸른 눈동자가 더욱 청명하게 빛났다.

“제가 알고 있는 아포칼리타들은 원래 이런 모습인데 말입니다.”

르네거는 설핏하게 웃었다.

그래. 이제껏 경험한 아포칼리타들은 항상 이러했다.

오만하고, 교만하다.

마치 자신이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우위에 서서 인간들을 내려다보기 일쑤였다.

그러며 무자비하게 학살을 해 왔지. 죽음을 인도하는 신처럼.

숱하게 봐 온 모습들이다. 그렇기에 르네거는 지금 루나의 행동이 낯설지 않았다.

더불어 그렇기에, 카리나가 더욱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오만할지언정 간악하진 않았으므로.

“같은 종족이라 해도, 참 많이 다르군요.”

르네거는 검을 바르쥐었다.

“그러니 죄책감 없이 죽일 수 있겠습니다.”

그의 눈이 번뜩였다. 섬광처럼 지나가는 살기에 루나는 자신도 모르게 멈칫거렸다.

그러다 자신이 기에 눌렸다는 사실이 못내 믿기지 않은 듯, 과장되게 웃으며 목청을 틔웠다.

“네가 루나를? 네가?”

그녀는 부러 크게 웃었다.

“하룻강아지 주제에 감히 루나를 죽인대! 푸하하!”

꿰에엑!

커다란 그리핀이 날아와 루나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루나는 능숙하게 그리핀에게 올라타 하늘 높이 도약했다.

“뭐, 어차피 카리나를 캐내면 알 수 있을 테니까.”

루나는 배죽 웃었다. 수백 개의 화살이 르네거를 향해 조준되었다.

“널 죽이면 카리나가 싫어하려나?”

루나는 멀찍이 떨어져 있는 카리나를 바라보았다.

카리나는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허망하게 주저앉아 있었다.

그래. 저 꼴을 보고 싶었다.

제게 패배해 엉엉 울고 있는 꼴을 보고 싶었다. 오만한 콧대가 짓눌린 꼴을 보고 싶었다. 루나는 입술을 양껏 찢었다.

이 인간부터 죽이고, 그다음은 카리나를 죽이자.

루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시선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고 했다.

카리나는 분명 허물어져 주저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왜?’

왜 웃고 있는 것인가?

루나는 카리나의 비틀려 있는 입매를 보며 시선을 떨었다. 자세히 살피니 주저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재미있어 하는 것처럼.’

이때였다.

쾅!

거대한 힘이 밀려왔다. 막을 새도 없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날아온 오러는 루나의 귀를 스쳐 지나갔다.

“윽!”

귀가 반쯤 잘린 게 느껴졌다. 루나는 손으로 귀를 가리며 르네거를 향했다.

“이 건방진 개새끼가……!”

쿠구궁!

수백 개의 화살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땅이 깊게 파여 구덩이가 생길 정도로 엄청난 폭발이었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르네거는 털끝 하나 상처 입지 않았다.

“전 사실 제가 성견에 가까운 인간이라 생각합니다.”

르네거는 검날에 오러를 두르며 느슨하게 시선을 들어 올렸다.

“다 큰 개에게 물리는 건 좀 아플 겁니다.”

르네거의 검이 루나를 조준해 날아갔다.

콰광!

검디검은 오러가 황량한 대지를 가득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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