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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31화 (31/135)

31화

“젠장.”

르네거는 욕설을 짓씹으며 미간을 좁혔다.

새까만 오러가 맺혀 있는 성검을 횡으로 긋는다. 후두둑 떨어지는 핏방울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루나의 심장을 꿰뚫은 그였다. 그녀의 살을 가르고 뼈를 박살 낸 그는 루나가 죽으리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포칼리타였다.

웬만한 공격으로는 절대 죽지 않는 아포칼리타.

르네거가 검을 뽑는 사이에 그녀는 그리핀을 타고 도망쳐 버렸다.

쫓으려 했으나 하늘을 나는 재주가 없는 르네거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놓쳐 버리고야 말았다.

‘……면이 서지 않는데.’

르네거는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카리나에게로 다가갔다.

어느새 나무 그늘로 몸을 옮긴 카리나는 나무에 등을 댄 채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의 잘렸던 팔은 회복이 되었고, 저가 상처를 입혔던 복부 역시 회복이 되어 있었다.

그러한 회복력을 보며, 르네거는 카리나가 ‘다른 존재’라는 것을 다시 상기했다.

그렇지만 역하지 않았다. 아까 전 루나를 보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마음이었다.

되레 경이로움을 느꼈다. 자신과 같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특별한 존재.

르네거는 스스로의 모순을 알아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카리나는 그들과 달랐으니까. 아포칼리타라 부를 수 없는, 존재였으니까.

르네거는 카리나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죄송합니다.”

그 말에, 카리나는 감고 있던 눈을 느리게 들어 올렸다.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는다.

그저 시선으로 말할 뿐이다.

네 속내가 무엇인지 스스로 털어놓으렴.

회유하는 뱀처럼 그녀의 눈빛은 유혹적이기만 했다.

“방심한 탓에 놓쳤습니다. 하지만 부상이 심하니 멀리 가진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쫓으려고?”

“시키신다면.”

카리나는 작게 웃었다. 엇갈리게 벌어진 입술 너머, 새빨간 혀가 보였다.

“널 라템의 개라 부르던데.”

그녀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 르네거의 새하얀 뺨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지금 모습을 보면 나의 개가 된 것도 같고.”

그녀는 르네거의 턱을 손가락으로 들어 올렸다.

“어느 쪽이 좋으니?”

르네거는 머뭇거렸다. 대답을 해야 하는데,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일전이라면 신을 위해 살고 있노라 대답했을 테지만 지금은.

……지금은.

르네거는 입술을 짓씹었다. 입안에서 맴도는 말은 형체를 잃고 흩어졌다. 마음이 명확하지 않은 탓이다.

“르네거.”

카리나는 그런 그를 나직하게 불렀다.

“너도 느꼈을 테지만, 성검의 힘이 모두 다 네게 돌아갔어. 이제야 네가 진정한 성검의 주인이 된 거야.”

“……그래서 성검이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로군요.”

“그래.”

그녀는 르네거에게 닿았던 손을 떼어 냈다. 체온이 사라진 자리, 스산한 냉기가 머물렀다.

“그러니, 너는 돌아가야 해.”

나를 놓아줘.

그리 말을 하는 듯했다. 르네거는 순간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저 혼자서 돌아가라는 말씀이라면, 싫습니다.”

그는 낮게 으르렁거리며 대답했다.

“당신은 저와 라템까지 가기로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널 보호하기 위해서였잖아. 하지만 지금 너는 내 보호를 받지 않아도 될 만큼 강하니까.”

“아니요.”

르네거는 단호히 말했다.

“저는 강하지 않습니다.”

눈앞의 아포칼리타를 죽이지도 못하는 주제에, 어찌 강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죽여야 한다고 생각지도 못하는 주제에, 감히.

그는 강하지 않았다. 적어도, 카리나에게만큼은 강할 수 없었다.

카리나는 그런 르네거를 빤히 쳐다보았다.

‘점점 내게 매달리는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그래야만 했다.

‘답답하네.’

카리나는 숨을 길게 뱉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아까 전 이어졌던 전투로 눈알이 욱신거렸기 때문이다.

점점이 시간이 흘렀다.

몇 차례의 바람이 불어와 카리나와 르네거를 훑었다.

그러나 카리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고, 르네거는 그런 카리나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카리나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보였다. 아주 미약하기 때문에 자세히 보아야 했다.

이러한 가만가만한 숨은 그녀를 이질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격하지 않은 것. 처절하지 않은 것. 아등바등 살지 않는 것.

이러한 삶의 태도는 르네거에게 있어 낯선 것이었다.

그녀는 이렇기에, 나의 존재를 아무것도 아니게 여기는 걸까. 쉽게 끊어질 인연이라, 그리 생각하는 걸까.

언제나 ‘어떤 것’을 위해 투쟁했던 그로서, 카리나의 무념무상한 태도를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르네거는 바싹 마른 입술을 자근 씹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굉장히 답답하고 짜증 나는 감정이 목구멍까지 치달았다.

이 감정을 어떻게 명명할 수가 없었다.

다만 확신할 수 있는 건 이제껏 저를 지배하던 교리와는 거리가 먼 감정이라는 것뿐.

르네거는 이를 깨물었다. 그리고,

“……항상 그러십니까?”

못내 품고 있던 생각을 툭 내뱉었다.

카리나는 그제야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올려 떴다.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을 하면 내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그녀의 연둣빛 눈동자를 바라본다.

찢어진 동공을 바라보고, 그 주변을 맴도는 색을 바라본다. 빛이 없는, 색을.

“항상 그렇게 초탈한 태도를 유지하느냐는 말입니다.”

카리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피식 실소를 터뜨린다. 제 팔에 감겨 잠에 들어 있는 히론을 쓰다듬으며, 정면을 바라본다.

“초탈한 게 아니야.”

“…….”

“포기한 거지.”

한계를 벗어난 것이 아니라, 한계를 인정하고 놓아 버린 것.

이 두 가지 명사의 차이는 컸다. 르네거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무엇을 포기하셨습니까?”

“모든 걸.”

카리나는 무심히 대꾸했다. 르네거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바르쥐었다.

“목숨마저.”

그는 눈을 들어 카리나를 직시했다.

“포기하신 겁니까?”

카리나는 르네거와 눈을 마주쳤다. 조금의 미동도 없는 시선이 닿았다. 그녀는 고요함을 머금고 있는 눈을 천천히 내리떴다.

“열렬하게 살고 싶은 욕망도, 죽고 싶은 욕망도 없어.”

이 책 속에 던져진 후로부터, 그녀는 살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그저 혼란스러울 뿐.

보편적인 도덕 법칙이 당연한 사회에서 살던 그녀였다.

그러나 눈을 뜨니 세계의 악이 되어 있었다.

이 간악한 간극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혼란스러웠으며, 그렇기에 살고 싶지 않았다.

죽고 나면 이 끔찍한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살아야 할 이유는 있지.”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살아야만 했다.

저를 아끼던 형제들을 떠올린다. 저를 보호하던 형제들을, 그리고 끝끝내 죽어 버린 형제들을.

사실, 검은 용암에 밀어 넣어져야 할 이는 카리나였다. 죽었어야 할 존재는 카리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녀의 죽음을 막았다.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며, 그녀에게 삶을 주었다.

“내게 바쳐진 죽음을 위해서라도, 꾸역꾸역 살아남아야 하거든.”

그래서 카리나는 살아야 했다.

죽고 싶어도, 살아남아야 했다.

그들이 죽으면서 전해 주고 간 삶, 놓아 버릴 수 없었다. 그녀 안에 남은 마지막 양심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삶을 살아가는 건 건강하지 않습니다.”

“정말 성기사다운 말을 하네.”

카리나는 웃었다.

죽는 것보다야 고통스러운 게 삶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죽음이 두려운 것도 삶이었다.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하는 그녀는 삶과 죽음의 한가운데서 이리저리 흔들려야만 했다.

평생을 열렬하게 살아온 르네거는 평생 모를 테지. 카리나는 씁쓸하게 조소했다.

“그래서 아버지도 죽인 거야. 아포칼리타의 탑도 그래서 무너뜨린 거고. 어쨌든, 살기 위해서라면 그래야 했으니까.”

그건 일종의 복수였지만, 그렇다고 말을 해 주고 싶진 않았다.

나를 위해 죽은 형제들의 이야기는 나만이 간직하고 싶었으니까. 그녀는 재차 말을 이었다.

“하지만 더 나아가고 싶진 않아. 내게는 아무 의미가 없거든. 죽는 거나 사는 거나 똑같은 일이니까 말이야. 그저 살아야 한다면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고 싶은 것뿐.”

그리고 아포칼리타의 멸망을 지켜보는 거야.

그녀는 생각하며 르네거를 직시했다. 그의 새까만 머리칼과, 푸르른 눈을 바라본다.

“라템의 영역까지는 같이 가 줄게.”

새로운 인물.

원작에서 전혀 비중이 없던 인물. 이제야 자신의 세계를 창조해 나가고 있는 인물.

이미 나의 세계가 무너져 버린 나는, 이런 이와,

“그 뒤에 나를 찾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다면 말이야.”

함께할 수 없었다.

카리나는 르네거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눈을 감았다.

약속이라 하나, 그에게는 선택권이 없다는 뜻으로 비쳐졌다.

“…….”

르네거는 바닥을 움켜쥐었다.

어째서.

르네거의 닫힌 입안은 밀려온 격한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일전에는 이 감정을 추측할 수 없었으나, 이제는 알게 되었다. 알 수밖에 없었다.

이건 소유욕이었다.

갖지 못한 것을 갖고 싶은, 지극히도 사적인 욕망.

너를 가지고 싶다.

배덕한 마음은 그의 얼굴을 뒤덮었다.

그의 머리칼에 묻은 핏방울이 때아니게 번뜩였다.

5장 도망치는 삶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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