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쿨럭!”
루나는 꿰뚫린 가슴을 부여잡으며 비틀거렸다.
그녀가 타고 있는 그리핀 역시 허청거리다 앞으로 고꾸라졌다. 윽, 루나는 그대로 추락했다.
하지만 울창한 정글 덕분에 큰 부상 없이 대지에 몸을 숨길 수 있었다.
넝쿨 속에 몸을 숨긴 그녀는 가파른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
피가 섞인 숨이 연이어 튀어나왔다. 곧이어 뼈를 깎는 듯한 통증이 찾아왔다.
아악!
그녀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죽여 버릴 거야, 정말 죽여 버릴 거야!”
패배할 것이라 생각도 하지 않았던 그녀였다.
불의 혈족들의 마나핵을 뺏었고, 자일에게도 이능을 나누어 받았으니 당연히 승리하리라 생각했다.
한데 왜!
한쪽 다리를 잃었고, 한쪽 팔을 잃었다. 가슴이 뚫려 피가 멎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이것은 완전한 패배였다.
“아악!”
루나는 다시 한번 발광했다.
“이게 다 그 빌어먹을 라템 새끼 때문에……!”
카리나 혼자만 있었다면, 분명 자신이 이기는 싸움이었다.
막판에 밀린 그녀는 더 이상의 힘을 내지 못하는 것 같았으니까.
한데 그 인간 놈이, 라템의 개 주제에 감히 싸움에 끼어들어 훼방을 놓았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방심했다. 하찮은 인간이라 생각하고 방심한 탓에 당해 버린 것이리라. 다음번에는 절대. 절대!
“죽여 버릴 거야!”
그녀는 헐떡거리며 소리쳤다.
가슴이 뚫린 탓에 난도질이 된 팔과 다리는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 역시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다. 어차피 마나핵은 머리 안에 남아 있으니까.
몸이 회복되고 나면, 그 라템의 개부터 찾아가 죽여 주리라.
“하아, 하…….”
루나는 숨을 몰아쉬며 몸에 힘을 풀었다.
시간이 지나기를 바라며, 그녀는 가물가물한 눈을 감아 내렸다.
그러나 온전히 잠에 빠지지 못했다.
낯선 인적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꿰에엑!
함께 쓰러져 있던 그리핀은 발견한 기척을 향해 몸을 틀었다. 순식간에 날아올라 커다란 날개를 휘둘렀다.
쾅!
굉음이 울려 퍼졌다. 자욱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뭐가 됐든 죽었을 테지. 루나는 생각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아니, 그러려 했다.
“이건 또 뭐야?”
가라앉은 연기 너머, 나타난 것은 한 명의 인간 여자였다.
그녀는 그리핀의 목덜미를 움켜잡고 있었다.
까득, 그녀의 손이 그리핀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분명 아무 마법 용품도 끼지 않은 맨손일 텐데, 그녀의 힘은 무자비하기 짝이 없었다.
꿰엑!
그리핀은 고통에 찬 소리를 내질렀다. 루나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당장 안 놔? 감히 인간 주제에 내 아이에게……!”
“네 아이?”
그녀는 루나의 말허리를 자르며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아아, 너구나. 데이펜의 정령을 다 죽이고 도망친 아포칼리타가.”
씨익.
인간 여자의 입술이 비틀렸다.
그 얼굴이 괴기하기 짝이 없어, 루나는 자신도 모르게 반만 남은 어깨를 움츠렸다.
뭔가 이상해.
루나는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저가 인간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수치스러워하지도 못했다.
그녀가 맞닥뜨리고 있는 것은 그저 공포, 두려움, 불안.
아니, 아니. 이건 내가 몸이 좋지 않기 때문에 이러는 것이다. 괜한 감정들이야.
루나는 후들거리는 두 다리를 곧추 세우며 정신을 다잡았다.
“잘 만났네. 마침 죽이려고 찾던 와중이었는데.”
“네, 네가 나를 죽인다고? 감히 인간 따위가 나를?”
루나는 과장된 몸짓을 하며 말했다. 두려움을 종식시키기 위해 나온 행동임이 분명했다.
인간 여자는, 페넬로피는 그런 루나를 보며 조소했다.
“너희들은 항상 그렇게 말을 하더라. 인간 주제에, 인간 따위…….”
페넬로피는 루나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어느새 루나를 내려다보게 되었을 때에.
“윽!”
페넬로피는 루나의 목을 잡아 올렸다. 새하얀 빛이 가득한 오른손을 그녀의 머리로 조준한다.
“이, 이거 안 놔……!”
“그런 인간의 손에 죽는 영광을 줄게.”
페넬로피는 루나의 벌려진 입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녀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빛이 루나의 입을, 코를, 눈알을 잠식했다.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쾅!
커다란 폭발이 정글을 흔들리게 만들었다.
푸드득!
날아오르는 새 중에서는 그리핀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 * *
……왜 오한이.
카리나는 소름이 돋은 팔을 쓸어내리며 다시금 침대 헤더에 몸을 기댔다.
르네거가 쿠션을 기울여 주고 간 덕분에 그녀는 무리 없이 몸을 편안히 할 수 있었다.
허리를 조금 더 뒤로 기울이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루나와의 전투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까닭으로 카리나가 살던 집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덕분에 갈 길을 잃은 그들이었지만, 다행히도 르네거는 인간 사회에 적응해 있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르네거는 카리나를 쿠히란의 여관으로 안내했고, 그녀는 편안히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편하지는 않지만.’
카리나는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또 왜 그러느냐?]
히론의 말이었다. 그는 바닥을 배로 기어 천천히 다가왔다.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기에 한숨을 내쉬고 있느냐는 말이다.]
“생각은 무슨, 아무 생각도 안 해.”
[거짓말하지 마라.]
히론은 눈 깜짝할 새에 얼굴 앞으로 다가왔다.
[왜 그러는 것이냐?]
깜빡, 깜빡.
카리나는 눈을 깜빡이며 히론을 가만히 응시했다.
무어라 대답해 주어야 할까.
원작의 남주인공이 가져야 했을 능력을 르네거가 가져가 버려 고민이란 말을 해야 할까, 이제 앞으로 전개가 어떻게 될지 알기가 힘들어 걱정이 된다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던 그녀는 가볍게 웃어 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별거 아니야. 그냥 목이 좀 욱신거려서.”
[뭐?]
히론과 대화할 때 주제를 돌리는 데에는 이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히론은 몸통을 타고 올라와 카리나의 목덜미를 살폈다.
[상처가 벌어진 것 같군. 썩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 것 같아. 살점이 너덜너덜하거든.”
[카리나.]
히론은 커다란 눈망울을 한 곳으로 고정하며 말했다.
[레피오스를 찾아가 보는 것이…….]
“안 가.”
[하지만.]
“안 간다고.”
카리나는 단호히 대꾸했다. 제 가슴까지 올라온 히론을 잡아 바닥으로 내려놓는다.
“나는 이렇게 숨어 사는데도 루나가 날 찾아냈어. 이게 무슨 뜻인 줄 알아?”
그녀는 미간을 깊게 좁혔다.
“내가 레피오스 님을 만나게 되면, 내 행적을 형제들에게 들키게 될 거라는 말이야.”
[그렇지만 빠르게 움직이면……!]
“그러다 잡히면? 내가 도망치지 못하면?”
카리나는 소름이 끼친다는 듯 어깨를 잘게 떨며 말을 이었다.
“난 또 그 빌어먹을 탑으로 끌려가게 돼. 이번에는 탈출하기도 힘들게 되겠지.”
그렇게 되면 그 꼴 보기 싫은 자일과 매일 같이 얼굴을 맞대야 할 터였다. 더욱이 전쟁에 휘말리게 될 것이고. 그것만큼은 피해야 했다.
카리나는 미간을 깊게 좁히며 손을 내저었다.
“참을 수 있어.”
그런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기에, 히론은 정처 없이 시선을 흔들다 이내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다시금 침대로 올라온다.
카리나의 손등을 몇 번 핥아 주며, 그녀의 살에 제 비늘을 맞댄다.
[그렇다면…….]
히론은 띄엄띄엄하게 말을 이었다.
[르네거 놈에게 도움을 받는 건 어떠하냐.]
“르네거에게?”
히론은 다시 한숨을 내뱉었다. 그 역시도 이러한 말을 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놈은 치유력을 쓰지 않느냐.]
알고 있다. 전투에서도 그와 입을 맞추니 내상이 회복되지 않았던가.
[그에게 도움을 청한다면 적어도 임시방편은 할 수 있겠지.]
이건 나쁘지 않은 방법일 듯했다. 어쩌면 더 괜찮은 방법일 수도 있었고.
……하지만.
‘꺼림칙하단 말이지.’
카리나는 르네거를 떠올렸다. 열망에 가까운 눈빛을 보내던 그를 상기했다.
그가 지닌 탐욕과 비슷한 시선의 이유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찝찝했다. 무어가 됐든, 마냥 기꺼운 일은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왜 그러느냐?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것이냐?]
“아니, 그건 아니고.”
카리나는 턱을 괴고 있던 손을 풀어 다리를 감쌌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어차피 곧 있으면 헤어질 그들이었다.
기껏해야 이틀. 길어야 사흘. 그 뒤로는 만나지 않을 사이였다.
그는 신의 종인 라템이었고, 나는 신의 적인 아포칼리타였으니까.
지금 같은 협업은 아주 일시적인 것뿐이었다. 그러니…….
‘맹약을 풀기 전까지는 이용해도 괜찮겠지.’
카리나는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열리는 문을 지그시 응시했다.
“깨어나 계셨습니까?”
르네거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그러다 작은 웃음을 짓는다. 접히는 두 눈은 청아하게 보일 정도로 청명했다.
“요기를 할 만한 것들을 사 왔습니다. 기력 회복에 좋을 것 같아서요.”
“난 음식을 안 먹어도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어?”
“그래도 걱정이 돼서요.”
성기사다운 태도였고, 성기사다운 시선이었다.
그렇기에, 카리나는 못된 마음이 솟구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난 지금 음식보다 더 필요한 게 있는데.”
카리나는 르네거에게로 양팔을 뻗었다.
“입을 맞춰 줘, 르네거.”
그녀의 나른한 눈빛이 르네거에게로 닿았다. 요염하지만 수려하다 느낄 만큼 야살스러운 시선이었다.
“기다렸으니까.”
르네거는 그러한 그녀를 뿌리칠 재주가 없었다. 홀린 듯 다가간 그는 카리나의 양손을 붙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