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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33화 (33/135)

33화

“뭐야, 이건?”

샐러딘은 눈앞에 드리워진 넝쿨을 슬쩍 밀며 앞으로 나아갔다.

바닥에는 누군가의 팔로 보이는 것과, 누군가의 다리로 보이는 것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렇지만 모두 다 하나뿐이다.

“익숙한데.”

샐러딘은 코를 킁킁거렸다. 낯익은 냄새가 그의 코를 자극했다.

케르베로스의 혼종인 그는 그 어떤 아포칼리타보다 후각이 발달되어 있었다.

사방을 훑어보던 샐러딘은 이내 팔 한쪽들을 들었다. 그리고 코를 킁킁거렸다.

“루나였네.”

그의 입매가 보란 듯이 치켜 올라갔다.

정글을 돌아다니던 중, 갑작스런 폭발음에 놀라 이곳까지 뛰어온 그였다.

분명 전투가 있으리라 생각해 잔뜩 긴장을 하고 왔건만.

전투는커녕 이렇게 다 죽어 버린 루나만이 토막 난 시체로 남아 있을 뿐이다.

“머리는 어디 있으려나.”

중얼거리던 그는, 이내 아차 하며 재차 읊조렸다.

“폭파시켰겠네. 마나핵을 없앴어야 하니까.”

샐러딘은 다시 한번 더 냄새를 맡았다. 미약하게나마 자연의 냄새가 남아 있었다.

“데이펜이었네?”

데이펜 일족 중에 이렇게까지 잔혹한 인간이 있었나. 샐러딘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이제는 별 상관이 없는 것.

그는 손톱을 길게 뽑아 팔의 정중앙을 그었다. 안쪽에서 빛나는 무언가가 보였다.

루나가 제 형제들을 죽인 후 갈취해 간 마나핵이었다.

이 때문에 루나를 추적해 왔건만, 이렇게 어이없이 죽어 버리다니.

“쯧.”

샐러딘은 혀를 찼다.

루나를 죽인 게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이 조금 열이 받긴 했지만, 넓은 아량으로 포용해 줄 수 있는 범위였다. 어차피, 루나는 소멸됐으니까.

“루나의 마나핵이 폭파된 건 아쉽네.”

꽤 쓸모가 있었을 텐데. 샐러딘은 루나의 팔에서 뽑아 낸 마나핵을 주머니에 넣으며 팔을 내던졌다. 아니, 내던지려 했다.

“……뭐야?”

샐러딘은 다시 한번 코를 킁킁거렸다.

루나의 팔에 코를 붙이고 몇 번이고 냄새를 맡는다.

이건 분명. 절대 잊히지 않는 이 냄새는 분명.

“카리나?”

샐러딘은 빠르게 고개를 들었다.

루나가 카리나를 만났다고? 그럼 카리나가 루나를 죽인 건가?

아니, 아니. 이곳에는 카리나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체.

“멈춰라.”

아, 빌어먹을. 샐러딘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몸을 돌렸다.

“너는 나를 쫓아다니냐? 왜 내가 가는 곳마다 있어?”

샐러딘은 날개를 편 채 제게 다가오는 자일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나 자일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묵묵한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볼 뿐.

“탑으로 오라는 전언을 받았을 텐데.”

“내가 왜 네 말을 따라야 하는데?”

“샐러딘.”

“내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 기분이 아주 뭣 같아지…….”

챙!

샐러딘은 재빨리 뒤로 굴렀다. 그가 서 있던 곳에 새빨간 화살이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샐러딘은 눈을 찡그리며 자일을 바라보았다.

“날 죽이려고 작정했어? 미쳤어?”

“수장의 말을 듣지 않는 형제는 죽어야 함이 마땅하다.”

“수장? 누가 수장인데?”

샐러딘은 보란 듯이 비웃으며 조소했다.

“엿이나 처먹어. 내가 인정하지 않았으니까.”

자일은 반응하지 않았다. 전과 다름없이 무심한 시선으로 샐러딘의 면면을 바라볼 뿐.

자일은 샐러딘의 손에 들린 루나의 팔을 인식했다. 자일은 슬쩍 입꼬리를 틀었다.

“카리나가 어디 있는지 알고 싶지 않은가?”

“뭐?”

“네가 얌전히 탑에 가 있는다면, 내가 카리나를 데리고 갈 텐데 말이다.”

샐러딘은 두 주먹을 바르쥐었다. 그의 새까만 눈이 섬뜩하게 번뜩였다.

“카리나가 너와 같이 탑으로 온다고? 미친 소리 하지 마. 카리나는 널 죽이려 들걸?”

샐러딘의 두 손에 새하얀 불꽃이 피어올랐다. 일전처럼 기습을 당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카리나한테 뒈지기 전에 내게 죽는 건 어때? 그럼 내가 네 마나핵을 잘 써 줄 텐데.”

자일은 놀랍게도 표정을 내보였다. 사붓 찌푸려져 있는 미간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새빨간 눈이 차갑게 식는 것이 느껴졌다.

“고작해야 개처럼 냄새나 맡고 다니는 주제에.”

그는 순식간에 샐러딘에게 날아왔다. 그는 샐러딘의 목을 움켜쥔 채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이, 이거 놔……!”

“정말 주제를 모르는군.”

“윽!”

자일은 샐러딘을 잡고 있던 손을 그대로 놓았다.

쾅!

샐러딘은 지면으로 추락했다. 꽤 높은 하늘에서 추락한 탓에, 그는 온몸에 도는 통증을 감내하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빌어먹을……! 아프잖아, 미친 자식아!”

“샐러딘.”

날개를 접고 내려온 자일은 그런 샐러딘의 뒷머리를 움켜잡았다.

한껏 뒤로 젖혀진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자일은 묵묵하게 말을 이었다.

“소멸당하고 싶지 않다면, 탑으로 돌아가 있어라.”

그는 다시 한번 날개를 펼쳤다.

“카리나는 내가 직접 데리고 가겠다.”

피보다도 붉은색의 날개가 새파란 하늘 위를 비상했다.

* * *

“흐윽…….”

카리나는 신음을 흘리며 몸에 힘을 풀었다.

침대 헤더를 따라 스르륵 흘러내리는 그녀를 보며, 르네거는 더욱더 그녀에게 파고들었다.

그는 마치 카리나를 절대 놓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억센 손으로 그녀를 붙들었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몸을 밀착한다. 그녀의 입술을 삼킬 듯 탐닉한다.

카리나는 그런 그의 어리광을 기꺼이 받아 주었다.

사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기분은 꽤 좋아진 축에 속했다.

처음 르네거를 보았을 때 어떠했던가. 저에게 날 선 경계를 내비치지 않았던가.

한데 그런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이렇게도 애걸하듯 매달려 있다니.

“으음…….”

카리나는 그의 뒷목을 끌어당겼다. 르네거는 그녀의 귓가를 쓸며 뒷머리를 붙들었다.

뜨거운 숨이 끊임없이 밀려왔다. 오직 본능만 남은 듯 그녀의 입술을 탐하는 르네거는 신의 아들로는 결코 보이지 않았다.

카리나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올려 떴다. 눈앞에 보이는 르네거의 얼굴은 아름답기 짝이 없었으나, 일전과는 느낌이 달랐다.

그의 어여뻤던 금발이 칙칙한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검은 것은 그야말로 무의 것.

아무것도 없기에 검고, 검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는 것.

그러므로 신에게 가장 적합한 색은 검은색일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없지만 반드시 존재하기 때문에.

그러나 반의적으로, 그렇기에 신의 색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참으로 모순적이게도 검은색은 죄를 상징하니 말이다.

결과적으로 르네거의 검은 머리칼은, 현신한 신이 죄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신실한 신관인 네가, 이렇게까지 타락한 인간으로 보인다는 걸 너는 알고 있을까.

아마 모르겠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아찔해질 정도로 기분이 좋아지는 승리감에, 카리나는 더욱 즐거움을 느꼈다.

그녀는 르네거의 뒷머리를 잡아당겼다.

그의 입술과 흘러나온 피를 핥는다.

[뭘 그렇게 즐거워하고 있는 것이냐?]

히론의 전음이었다.

[분명 치료만 하라 했을 텐데. 그렇게 즐기는 게 아니라.]

그는 머릿속으로 말을 하며 혀를 찼다. 카리나는 무시하며 르네거의 뒷목에 손을 둘렀다.

[카리나.]

‘왜 안 나가고 있는 거야. 적당히 분위기 보고 나가지?’

히론은 말이 없었다.

잠시 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그는, 이내 배로 바닥을 기어 천천히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르네거 놈만 변한 것이 아니었군.]

뜻 모를 말을 남기고 떠나 버렸다. 그의 심중이 궁금했으나 지금 그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카리나는 목으로 넘어오는 르네거의 성력을 받아먹으며 할짝였다.

“하아…….”

카리나의 터져 나오는 소리를 들으며, 르네거는 천천히 고개를 떼어 냈다.

그러나 멀어지진 않는다.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를 바라본다.

“목에 상처가 벌어졌습니다.”

“나도 알아.”

“이대로 둔다면 살이 썩을 텐데요.”

“이미 그 정도가 아닌가?”

카리나는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나 르네거는 웃지 못했다.

“치료해 드리고 싶습니다.”

“별로 좋은 모양새가 아닐 텐데.”

말대로, 리치의 힘이 스친 탓에 카리나의 상처는 흉하게 문드러져 있었다.

본래의 새하얀 살결과는 달리 새까맣게 변색되어 있었고, 피가 멎지 않고 흘러나오고 있는 탓에 비릿한 피 냄새가 배어 있었다. 하지만.

“아니요.”

르네거는 카리나의 목을 감싸고 있는 천을 풀었다.

“당신의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르네거는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카리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그녀의 상처에 입을 맞춘다.

그의 힘이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

지극히 검고 부드러운 힘.

카리나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그의 힘을 양껏 맞이했다.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흘러나오던 피가 멎는 것 또한 느껴졌다. 온몸에 편안한 기운이 퍼졌다.

카리나는 아직도 얼굴을 묻고 있는 르네거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와 다시 눈을 마주친다.

“덕분에 죽지는 않겠네.”

그의 푸른 눈이 일순간 흔들렸다. 그는 카리나의 등을 끌어안으며 몸을 밀착했다.

“당신은 죽지 않을 겁니다.”

“그러길 바라야 하나?”

“그래야만 합니다.”

신의 힘을 받아 변해 버린 그였지만, 푸른 눈동자는 전과 다름이 없었다.

그는 조금의 불순물도 없이 깨끗한 눈으로 카리나를 응시했다.

무언가 거부감이 들어, 카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의 턱 끝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잇는다.

“라템에 가기 전까지만 도와줘. 그럼 지금보다는 나아질 것 같으니까.”

그는 일순간 숨을 멈췄다. 하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그는 다시금 차분한 호흡을 되찾았다.

그리고 카리나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모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숨을 천천히 내쉬며 그녀를 내려다본다.

“카리나.”

그는 카리나를 세게 붙들었다. 마치, 손을 놓으면 그녀가 사라진다고 느끼는 것처럼.

“저는 변했습니다.”

“알고 있어.”

“그러니, 저는 당신과 함께 라템의 대신전에 갈 겁니다.”

그는 비스듬하게 얼굴을 내려 카리나의 윗입술을 할짝였다.

카리나의 벌려진 입술을 손가락으로 더듬는다. 안쪽까지 들어온 손은 그녀의 아랫입술이 무방비해지게 만들었다.

“나를 이렇게 만든 데에는 당신의 책임이 다분하니까요.”

그는 또다시 카리나의 입술을 삼켰다.

일전보다 더, 더, 더, 깊게.

타오르는 갈증을 해소하지 못한다는 듯.

“당신은 날 책임져야 합니다.”

그는 카리나를 붙들었다.

그는 카리나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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