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당신은 날 책임져야 합니다.”
그 말과 걸맞게도 질척거리는 숨이 밀려왔다. 매달려 애걸하는 것처럼 진득한 숨이었다.
르네거는 한 손으로 카리나의 양 손목을 붙잡았다.
그녀의 팔을 위로 올리며, 허리를 감싸 살을 자분거렸다. 그의 단단한 허벅지가 다리 사이에서 느껴졌다. 뜨거운 체온이 여과 없이 전달되었다.
하아.
카리나는 막혔던 숨을 토하며 차분했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르네거를 바라본다.
르네거는 미간을 깊게 찌푸리고 있었다.
항상 사근사근하게 웃는 그가 이렇게 인상을 쓰는 경우는 저와 입맞춤할 때뿐이었으므로, 카리나는 묘한 우월감을 느낄 수 있었다.
성스러운 얼굴이 쾌락에 물들어 가는 과정은 언제 보아도 즐거운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비켜.”
감정은 감정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카리나는 르네거의 손을 뿌리쳤다.
“무슨 말을 하는 거니? 내가 왜 너와 대신전으로 가?”
그녀는 르네거의 가슴을 밀치며 허리를 일으켰다. 침대 바닥으로 발을 디딘다.
“본래 너와의 약속은 라템까지 데려다주는 것뿐이었어. 그 이상은 안 돼.”
“하지만.”
르네거는 그런 카리나의 손목을 낚아챘다.
“아포칼리타에게 쫓기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는 아직도 열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의 손이 닿은 부위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카리나는 힘을 주어 손을 빼냈다.
“저와 함께 대신전으로 가면 안전하실 겁니다.”
르네거의 말은 마냥 틀린 건 아니었다.
아포칼리타가 카리나에게 쏟는 관심이 사그라질 때까지 라템에서 몸을 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 중 하나였다.
하지만, 카리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녀의 선택지에 ‘라템에 가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혼자 있어야 했다. 혼자서, 도망쳐야 했다. 혼자서, 살아남아야 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다. 결코.
“난 아포칼리타야.”
“하지만 절 구해 준 은인이지요.”
“그런다 한들 태생은 변하지 않지. 아포칼리타와 라템의 인간이 한데 어울려 지내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라 생각해?”
카리나는 단호히 말했다. 그러나 르네거는 물러서지 않았다.
“저를 처음 보았을 때에는 아포칼 리타가 아니라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런데 왜 이제와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것인지요.”
르네거는 빈틈없는 시선으로 카리나를 직시했다.
“당신은 입맛대로 태생을 바꾸나 보군요.”
카리나는 미간을 좁혔다. 눈을 치켜뜨며 그를 노려본다.
“지금 날 비꼬고 있는 거야?”
“그렇게 들린다면, 그게 맞을 테지요.”
“건방져졌네.”
카리나는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여전히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르네거의 앞으로 다가갔다.
꿋꿋하게 앉아 있는 그와 마주 서, 그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살을 더듬으며 가슴과 목덜미, 그리고 뒷머리를 자분거렸다.
윽, 르네거는 짤막한 신음을 흘렸다. 카리나가 그의 뒷머리를 낚아챈 탓이었다.
“나를 보며 꼬리를 말던 개새끼는 어디에 갔을까.”
카리나는 그의 젖혀진 얼굴의 턱을 나른하게 쓰다듬었다.
튀어나와 있는 목젖까지 내려온 손은, 그의 쇄골을 더듬으며 느리게 움직였다.
“난 너를 사냥개로 키우지 않았는데 말이야.”
탁, 카리나는 머리채를 움켜쥐었던 손을 놓았다.
르네거는 고개를 두어 번 흔든 후 다시금 꼿꼿함을 유지했다. 카리나를 직시한다.
“당신의 안위를 염려하는 충견이 된 것이라 생각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카리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놈은 자존심도 없는지, 제 말에 불쾌하기는커녕 덧붙여 인정하고 앉아 있다. 이상한 짜증이 찾아왔다.
“카리나.”
르네거는 카리나의 손을 다시금 잡았다. 그녀의 손가락 마디마디에 제 손을 끼워 넣으며 힘을 주었다.
“라템이라면 당신은 무사할 겁니다.”
“그 라템에 있는 인간들이 내게 달려들지 않을 거란 보장은?”
“감히 누가 당신에게 손을 댈 수 있겠습니까.”
르네거는 단호히 대꾸했다.
“당신은 제가 지킬 겁니다.”
수천, 수만 가지의 생각이 담겨 있을 말일 테지만, 카리나는 곧장 헛웃음을 내뱉었다.
“네가 나를 지킨다고?”
그녀는 엉킨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아랫입술을 할짝이며 입술을 꽉 깨문다.
“네 품에 안겨서 마냥 보호받는 인형을 원하는 거니?”
카리나는 있는 힘을 다해 그의 손을 뿌리쳤다.
“난 그런 어여쁜 인형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하고 싶네.”
카리나는 뒤를 돌아 문고리를 붙잡았다. 후우, 숨을 몰아쉬며 르네거를 향해 반쯤 고개를 돌렸다.
“라템에는 가지 않아. 두 번은 말하지 않겠어.”
탁.
그녀는 그대로 방을 빠져나갔다. 르네거가 어떠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미처 보지 못한 채.
* * *
[다 끝났느냐?]
방을 나오자마자 히론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걸었다. 그는 카리나의 다리를 타고 올라와 어깨에 매달렸다.
[큰소리가 오가던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별건 아니야.”
카리나는 대답하며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함께 라템의 영역으로 가자던데.’
식당을 겸하는 여관에는 인간들이 꽤 즐비해 있었기에, 카리나는 전음으로 히론과의 대화를 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내가 그곳에 가긴 왜 가.’
카리나는 조소하며 말했지만, 히론은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히론의 턱 아래를 툭 건드렸다.
‘왜 말이 없어?’
[괜찮은 생각처럼 느껴져서 말이다.]
‘너까지 이럴 거야?’
카리나는 왈칵 성을 내며 반문했다. 그러나 히론은 흥분하지 않았다. 차분한 어투로 전음을 잇는다.
[자일 놈이 찾아올 것 같다 하지 않았느냐?]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너는 그 미친놈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차라리 라템에 가는 것이.]
‘싫어.’
[카리나야.]
카리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난 싫다고 했어. 라템에는 안 가. 죽어도.’
그들에게 도움을 받고 싶은 마음도 없거니와, 더 나아가 그들의 틈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르네거가 저렇게 변해 버린 이상, 앞으로의 원작이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는데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조용히 살래. 숨어서.’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는 것인지.]
쯧.
히론은 혀를 찼다. 하지만 더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카리나의 생각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카리나는 그런 히론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준 후, 식당의 비어 있는 자리에 몸을 앉혔다.
식탁에 올려진 과일 바구니를 한쪽으로 치우고, 메뉴판을 보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지금은 저녁 시간대가 아니던가.
얼핏 보았을 때에도 인간이 많았는데, 왜 이렇게 조용한 것일까.
의문점을 느낀 카리나는 느리게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수십 개의 눈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마치 넋을 놓은 것처럼 멍한 시선으로 카리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포크를 쥔 채 굳어 버린 인간도, 가게에 들어오다 멈춘 인간도 있었다.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하여간, 인간들이란.
정말 멍청하게도 보이는 것에만 매료된다.
껍질을 까 보면 썩어 있는 속살이 있는 것도 알지 못한 채.
참 재미있는 종족이야.
이런 나도 마찬가지일 테지만. 카리나는 조소하며 생각했다.
이때였다. 그녀의 앞으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르네거였다.
“……왜 그렇게 웃고 계신 겁니까?”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카리나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씩 쳐다본다. 그의 미간이 더더욱 깊게 좁혀졌다.
“건방진 인간들이 많군요.”
그는 불쾌하다는 양 날 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카리나의 앞에 마주 앉았다.
그 움직임에 있어 탁자 위에 있던 과일 바구니가 움직였다.
새빨간 사과가 바구니에서 튀어나와 식탁 한가운데로 굴러왔다.
카리나는 사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너 역시도 그렇다고 말한다면 뭐라 할 거야?”
“당신의 말은 무엇이든 좋습니다.”
“네가 빌어먹게 건방진 인간이라는 건 인정하는 거네.”
“당신이 그렇다면, 얼마든지요.”
르네거는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카리나는 피 입술을 내밀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게 뭐야. 재미없어.”
르네거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카리나를 향해 조금 더 몸을 기울인다.
“제가 반항하는 것이 즐거웠습니까?”
“그렇다면?”
“그렇게 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르네거의 이러한 태도는, 신에게 바쳤던 맹목적인 신앙을 카리나에게로 옮긴 것처럼 느껴졌다.
무비판적 성애.
이보다도 더 악한 게 어디 있을까. 카리나는 짧게 혀를 찼다.
“됐어. 포도주나 시켜 줘. 목이 마르니까.”
“알겠습니다.”
르네거는 몸을 돌려 주문을 했다.
얼마 가지 않아, 병에 담긴 포도주와 잔이 나왔다. 르네거는 병의 마개를 딴 후 카리나의 잔에 따라 주었다.
“술을 좋아하십니까?”
“나쁘지 않게 먹는 편이야.”
“더 좋은 술로 구해 다 드리겠습니다.”
“마음대로 해.”
카리나는 대강 대답하며 술을 홀짝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흡족하게 웃던 르네거는, 돌연 입매를 굳히며 뒷목을 쓰다듬었다.
“한데…….”
그는 비스듬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뒤쪽에는 어떻게든 카리나를 보고 싶어 목을 쭉 빼며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르네거는 그런 그들을 바라보았다.
“정말 짜증 나는 인간들이군요.”
불쾌함이 역력한 음성이었다. 카리나는 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익숙해서, 저런 건.”
그녀의 답에 르네거는 눈을 가늘게 올려 떴다. 더 기분이 좋지 않아진 모양이다.
“저들의 행동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구경거리가 아닌걸요.”
그는 탁자 위에 굴러다니던 사과를 집었다. 손끝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이 느껴졌다.
“저들의 눈알을 파 버린다면.”
그는 사과를 아삭 씹어 먹었다.
새빨간 껍질 아래, 새하얀 속살이 그의 입안에서 무참히 뭉개졌다.
“당신께 도움이 될까요?”
새하얀 웃음을 머금은 얼굴은 고결하리만큼 무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