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늦은 밤. 카리나는 여관 밖으로 빠져나왔다.
여관의 뒤에는 낮은 야산이 있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는 그곳에도 사람이 없을 터. 카리나는 팔에 감은 히론을 쓰다듬으며 좁은 숲길을 걷고 있었다.
사그락, 사그락.
풀잎에 스치는 소리가 어두운 고요함을 깨뜨렸다. 카리나는 꽃을 밟지 않도록 유의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얼마 가지 않아 정상에 도달했다.
새까만 밤하늘이 그녀를 반겼다. 깊은 어둠이었으나, 그렇다고 해 적막하진 않았다. 하늘 가득 별빛이 흩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 늦은 시간에 왜 여기까지 온 것이냐?]
히론은 하품을 크게 하며 말했다. 카리나는 그런 그의 턱 아래를 쓰다듬어 주며 대답했다.
“확인할 게 있어서.”
그녀는 숨을 정돈하며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밤보다도 더 깊은 어둠이 그녀의 손바닥에 맺혔다. 새까만 기운이 소용돌이를 치며 솟구쳤다. 쿵, 작지 않은 굉음과 함께 지면이 흔들렸다.
쿠구궁.
땅이 갈라졌다.
인간의 머리 하나 정도가 오갈 수 있을 정도로 갈라진 대지는, 카리나의 손에 담겨 있던 어둠을 그대로 흡수했다.
그리고 새하얀 뼈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다섯.
카리나는 모습을 드러낸 언데드를 보며 흡족하게 미소지었다. 그녀의 명에 따라 언데드들이 가까이 다가 왔다.
“주변에 수상한 움직임은?”
가장 가까이 서 있던 언데드가 달그락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자일의 흔적을 느꼈니?”
역시 달그락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카리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박쥐의 흔적은?”
달그락달그락.
그들은 한꺼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두개골이 덜렁거리며 움직였다.
“젠장.”
그녀는 쓰게 웃으며 이마를 짚었다. 긴장한 탓일까. 이마에서 미열이 느껴졌다.
[역시, 자일 놈이 가까이 온 것이냐?]
히론의 말이다.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이런 곳에서 나타날 박쥐는 그 새끼 것밖에 없을 테니까.”
쯧.
그녀는 혀를 차며 손을 저었다.
“다들 돌아가 봐.”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언데드들은 한꺼번에 승화되었다. 언제 뼈라는 고체를 지니고 있었냐는 듯, 연기로 변한 그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카리나는 제게로 밀려오는 검은 연기를 흩뜨리며 숨을 길게 내뱉었다.
“코앞에 있다는 뜻인데.”
아무리 루나와 접촉했다 한들 지금쯤 탑을 복원하느라 정신이 없어 내 게 신경을 쓰지 못할 거라 생각했었는데. 오산이었던 모양이다.
자일의 집착은 예상을 훌쩍 뛰어넘고 있었다.
끄응.
그녀는 머리를 헝클며 입술을 짓씹었다.
카리나는 자일이 싫었다.
왜, 라고 묻는다면 그가 악역이기 때문, 이라 대답해 줄 것이다.
그는 원작 속의 최강자였으며, 그렇기에 악역이었다. 원작을 읽을 때에 그를 얼마나 미워했던지.
그렇기에 카리나는 이곳에 태어났을 때부터 자일과 거리를 두었다.
처음에는 그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원작에서 묘사됐던 그는 피에 미쳐 있는 놈이었으므로, 붙잡혀 피가 빨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며 ‘혹시나’ 싶은 마음이 들었던 그녀였다. 그래서 자일과 조금의 친분을 쌓아 둘까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원작보다 더한 미친놈이었지. 원작은 약과였어.’
그는 무자비했으며, 잔혹했다. 그뿐이랴. 그는 죄의식이 없었다.
형제 열셋의 마나핵을 투여받고, 넋을 놓은 채 살고 있던 그녀에게 그는 무슨 짓을 했던가?
피를 달라 하였지. 형제를 잡아먹은 네 피의 맛이 궁금하다며. 주지 않는다면 네 목덜미를 뚫어서라도 가져갈 것이라고.
아버지가 말리지 않았다면 그는 내 목에 잇자국을 남겼을 것이 분명했다.
그는 태생부터 악한 존재였다. 그가 악이라는 것은 불변하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카리나는 자일이 싫었다. 극도로 혐오스러웠다.
[어떻게 할 생각이냐?]
히론은 혀를 날름거리며 말했다. 상념에서 빠져나온 카리나는 그를 향해 눈을 돌렸다.
[자일 놈이 가까이 있는 이상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는 노릇. 르네거 놈의 말대로 라템에 들어가는 건…….]
“싫다고 했어.”
[고집부리지 마라. 그게 가장 최선의 방법이라는 걸 알고 있지 않느냐.]
그는 전에 없이 날카로운 어투로 말했다.
그래. 히론의 말이 맞았다. 단순히 ‘아포칼리타를 피해 몸을 숨겨야만’ 하는 카리나로서는 그의 말처럼 행동하는 게 최선이었다.
“…….”
카리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밤하늘이 재차 그녀를 반겼다.
새까만 어둠과, 새하얀 별빛이 그녀의 시야를 풍족하게 감쌌다. 카리나는 깜빡임조차 없는 시선으로 하늘을 지그시 올려다보았다.
히론에게도 하지 않은 말이 있다.
나의 궁극적 목표는 단순히 살아남는 것이 아니었다.
‘아포칼리타가 멸망할 때까지’ 살아남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안간힘을 써 아포칼리타의 탑으로 돌아가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그곳에 있다간 나 역시 신마 전쟁에 휘말릴 것이 분명했으므로.
아포칼리타가 멸망하는 것을 똑똑히 지켜보고 싶었다.
가장 안전한 곳에 서, 그들의 탑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싶었다. 조금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뒤에.
숨어 있는 아포칼리타를 찾아 한 명씩 죽일 것이다. 내 손으로 그들의 생명을 거두어 줄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정말로 마지막으로.
‘나를 죽일 거야.’
내 몸에 박힌 그들의 마나핵을 뽑아 하나씩 소멸시켜 줄 것이다. 그리고 나의 마나핵 역시 폭파시킬 것이다.
죽기 위해서. 나 대신 죽어 버린 형제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이것은 그들이 죽었을 때부터 결심했던 일이었다.
죽음 따위야 두렵지 않았다.
이제와 죽음이 두려울 리 없었다.
다만 두려운 것은…….
‘아포칼리타가 멸망하지 않을까 봐.’
카리나는 두 손을 바르쥐었다. 힘을 주어 쥔 탓에 손등이 달달 떨렸다. 퍼런 핏줄이 솟아올랐다.
원작에서, 아포칼리타는 멸망한다.
이는 여주인공인 페넬로피가 각성하고, 남주인공인 케셰트가 성검의 주인이 돼 힘을 합쳐 나온 결과였다.
한데 지금은…….
‘너무 달라져 버렸어.’
르네거가 살아 있다는 것을 페넬로피가 알게 되면, 그녀는 어떤 태도를 취할까?
르네거가 성검의 주인이 된 이상, 케셰트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렇게 된 후에도, 과연 그들은 아포칼리타를 이길 수 있을까?
입술이 바싹 말라 왔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만약에.”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연합군이 아포칼리타를 이길 수 없게 된다면.”
[…….]
“이 세계를 아포칼리타가 지배하게 된다면 말이야.”
그녀는 꽉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툭, 떨어진 손의 끝에는 발간 피가 맺혀 있다.
“나는 싸울 거야, 히론.”
그녀의 녹색 눈이 뜨겁게 발광했다.
“죽는 건 무섭지 않으니까.”
* * *
해가 뜨기 전에 여관을 빠져나온 그들이었다.
카리나는 목에 히론을 감싼 채 앞서 걸어갔고, 르네거는 한 걸음 뒤에서 묵묵히 그녀를 따라갔다.
르네거가 무사히 따라오는 것을 느끼며, 카리나는 두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검은 기운을 머금었다. 혹시나 있을 일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자일이 이미 나를 찾은 이상, 내가 어디로 가는지는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하면 이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
그의 성정상 기습은 하지 않을 테지만, 그러해도 대비는 해 놓는 게 옳았다.
나 혼자서는 자일을 이기지 못할 테다. 하지만 르네거가 합류한다면 마냥 승산이 없는 것은 아닐 터.
‘시간은 끌 수 있을 거야.’
카리나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긴장 어린 숨을 내뱉었다.
“……나.”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나는 정말 잘 숨어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애초에 르네거만 만나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지 않았을까.
“……리나.”
아니. 하지만 그때에 르네거를 구하지 않았다면 내가 여주인공의 분노를 받지 않았겠는가.
나는 나의 죽음을 선택하고 싶었다. 내 스스로 삶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싶었다.
그래서, 원작에 얽혀 여주인공의 손에 죽게 되는 결말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르네거를 살리고, 그 대가로 날 가만히 두라 요청하는 게 더 나은 방법이긴 했다.
“카리나.”
카리나는 다소 놀란 채 르네거를 돌아보았다.
르네거는 그녀의 손목을 잡았던 손을 천천히 놓으며 멋쩍게 웃었다.
“불러도 듣지 않으셔서 말입니다. 괜찮으십니까?”
“아, 그랬어?”
카리나는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저었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느라.”
그러며 그녀는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쾅!
손끝에서 튀어나온 검은 기운이 르네거의 뒤로 날아갔다.
꿰에엑!
그녀의 기운에 맞은 마물은 괴성을 지르며 쓰러졌다.
“원래 이렇게 길이 험준하니? 지금까지 본 마물만 해도 수십 마리는 될 것 같은데.”
카리나는 죽은 마물에 시선조차 두지 않으며 물었다. 르네거는 놀랐던 마음을 가라앉히며 차분히 대꾸했다.
“라템의 지역이니까요. 마물이 몰리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 마물은 성력을 좋아하니까.”
카리나는 조소했다.
“성력에 닿으면 죽는 걸 알면서도 본능적으로 다가가지.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그렇기에 상극인 너와 내가 함께 얽혀 버린 걸까.
그녀는 차마 뱉지 못하는 말을 삼키며 발을 재우쳤다.
“수가 점점 늘어나는 걸 보니 가까워진 모양이야.”
“네. 조금만 더 가면 길이 나올 겁니다.”
“다행이네.”
카리나는 발목을 휘감는 넝쿨을 발로 짓이기며 대답했다.
이곳은 마물이 즐비한 탓에 공기가 텁텁했다. 숨이 막힐 정도로 매캐한 공기에, 그녀는 잔기침을 몇 번 내뱉었다.
“조심하십시오.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으셨을 텐데. 마물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러다 네가 다치면 더 큰 일이 아니겠어?”
“하지만.”
“됐어.”
카리나는 다시 한번 손을 휘둘렀다. 매복해 있던 마물의 몸이 반으로 쪼개졌다.
새빨간 내장이 튀어나오는 게 적나라하게 보여, 르네거는 재빨리 카리나의 눈을 가려 주었다.
“내가 저런 걸 보고 역겨워할 거라 생각해서 이러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니지만…….”
말을 흐리는 르네거를 보며 카리나는 웃었다.
역겹기는커녕, 히론에 주면 좋아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역시나, 인간과 나는 이렇게도 달랐다. 아니, 틀린 것일까.
그녀는 씁쓸함을 애써 떨쳤다.
“라템에는 널 찾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거야.”
그녀는 주제를 돌렸다.
“누가 가장 생각이 나?”
그런 카리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르네거는, 잠시 침묵했다. 생각을 하는 듯 보였다.
“……저를.”
그는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어릴 때부터 따랐던 동생이 있습니다. 저를 가족처럼 아끼던 아이였습니다.”
페넬로피 이야기임이 분명했다.
음. 페넬로피라면 너를 가족으로 생각한 게 아니라 애인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카리나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실종에 그 아이가 가장 슬퍼했을 겁니다. 저를 보면 크게 기뻐할 겁니다.”
당연히 그러겠지. 내가 봤을 때 페넬로피는 네게 반쯤 미쳐 있었으니까.
그렇게 생각을 이어 가던 카리나는, 불현듯 묘한 감정을 느꼈다.
기분이 이상했다. 정확히 말하면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왜일까.
왜, 나는 웃고 있는 르네거의 얼굴이 꼴 보기 싫은 거지.
저렇게도 새맑게 웃는 미소가 이상하리만큼 언짢았다.
……짜증 나게.
“좋겠네. 널 기다리는 인간도 있고.”
그녀는 빈정거리며 말했다.
“나는 없거든.”
그래서 전생도, 이번 생도 스스럼 없이 목숨을 내던질 수 있는 것이지. 그녀는 낮게 조소했다.
“왜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르네거는 굳은 표정으로 카리나를 직시했다.
처음이었다. 르네거와 가까워진 이후, 저렇게도 굳어 있는 그는.
“제가 이제껏 보여 드렸던 행동들은 생각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는 카리나의 손을 낚아챘다. 그리고 그녀의 손등에 느리게 입을 맞췄다. 진득한 숨이 손등을 타고 올라왔다.
“제가 당신을 기다립니다.”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열기가 이상하리만큼 거부감이 들었다. 카리나는 그의 손을 잡아 뺐다.
“지금도 나는 네 옆에 있어.”
르네거는 나른하게 눈을 들어 올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쏴아아, 바람이 불어왔다. 죽음의 향을 품고 있는 바람은 거세게 밀려와 카리나의 그림자를 흔들었다.
르네거는 카리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거센 바람을 맞고 있는 그녀는, 흐려지고 있었다. 희미해지고 있었다. 이 뚜렷한 세상 속에서, 그녀 자신만이 사라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르네거는 다시 한번 카리나의 손을 잡았다.
“이따금씩, 당신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
“그래서 더더욱 당신을 붙잡고 싶습니다.”
카리나는 그의 손끝에 묻은 감정의 농도를 알아챌 수 있었다. 잡힌 손을 빼내지 못한다.
“안 된다는 걸 알잖아.”
카리나는 느린 어투로 대답했다. 르네거는 입술을 자근 씹었다.
“제가 신관이기 때문입니까?”
“…….”
그녀는 답하지 않았지만, 르네거는 제 말이 정답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혀끝이 메말랐다. 바싹 마른 입안이 텁텁했다. 가슴에서부터 올라오는 말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왔다.
“그렇다면…….”
이때였다.
[카리나.]
히론의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동시에, 르네거의 허리에 차고 있던 성검이 발광했다.
“성검이 말을 걸었습니다.”
“말을?”
분명 르네거에게 힘을 뺏긴 이후에 말을 걸지 않는다 하지 않았나.
카리나는 빠르게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르네거는 그런 카리나의 손을 다시 낚아챘다. 이번에는 그녀가 절대 뿌리치지 못할 만큼의 힘으로.
“도망치라고.”
[도망쳐라, 카리나.]
뭐?
카리나는 반문했다. 아니, 반문하려 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쾅!
폭음이 울려 퍼졌다.
그들의 앞을 막고 있던 마물들이 꼬리를 말며 납작 엎드렸다.
마기가 깃든 나무들이 잠자코 숨을 죽였다. 하늘을 오가던 마물들의 모습은 감춰진 지 오래였다.
……이건 분명.
쾅!
다시 한번 굉음이 울려 퍼졌다. 비릿한 피 냄새가 그녀의 코끝을 무자비하게 자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