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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36화 (36/135)

36화

쾅!

굉음이 울려 퍼졌다. 비릿한 피 냄새가 카리나의 코끝을 무자비하게 자극했다.

뿌연 연기가 치솟았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연기는 카리나를 목표로 해 달려들었다.

“조심하십시오!”

르네거는 성검을 뽑아 연기를 베어 냈다. 그는 카리나를 뒤로 숨기며 성검을 바르쥐었다.

“괜찮으십니까?”

누가 누구의 안부를 묻는 것인지.

그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연기에 가려진 독혈을 흡입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카리나는 그런 그의 뒷목을 낚아챘다.

“나보다는 널 더 걱정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말이야.”

그러며 그녀는 르네거의 코와 입을 손으로 막았다.

내내 품고 있던 기운을 그의 비강에 불어 넣어 주었다.

르네거는 잠시 경계했으나, 곧이어 편안해진 호흡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숨을 토하며 몸에 힘을 풀었다.

“오래 버티진 못할 거야. 그러니까 그 전에 라템으로 돌아가.”

“당신을 두고 가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는 카리나의 손을 낚아챘다. 그의 손에 바싹 힘이 들어갔다. 맹렬한 기운은 카리나조차 뿌리칠 수 없을 만큼 홧홧했다.

“저는 당신을 지킬 겁니다.”

그는 마치 포효하는 사자처럼 날이 선 눈으로 카리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아.

카리나는 나직한 한숨을 뱉었다. 하지만 불쾌함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보이지 않을 만큼 미세하게 미소지었다.

“그럼 날 데리고 도망치든가.”

르네거의 입술 양 끝이 들어 올려졌다. 그는 콧잔등을 찌푸리며 낮게 웃었다.

“그쪽이 훨씬 더 듣기 좋습니다.”

그리고 그는 빠르게 자세를 잡았다.

또다시 밀려오는 안개를 검으로 베어 내며,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끼익, 끼이익.

소름 끼치는 소리가 지천에 가득했다. 코를 자극하는 피 냄새는 조금도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자일은 항상 이런 식이다. 최대한 의 공포를 느끼게 만들어 긴장하게 만든 후, 순식간에 덮쳐 목숨을 앗아간다.

참 고약한 성정이 아닐 수 없었다. 하기야, 그러니 아포칼리타라 해야 할까. 카리나는 조소하며 생각했다.

“이번에는 누구입니까?”

이번에는. 그 말이 참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그리고 다음에는, 더 나아가 또 다음에는. 연이어 찾아오는 목숨의 위협. 이 괴이한 뫼비우스의 띠를 끊을 수 있을까.

“널 죽이려 했던 이야. 알고 있지?”

르네거의 표정이 사붓 굳었다. 그는 더욱 세게 검을 바르쥐었다.

“그렇지 않아도 또 만나고 싶었던 이였습니다.”

르네거는 당연한 자신감을 뽐내고 있었다.

성검의 힘을 모조리 흡수한 만큼, 자신의 능력을 어느 정도 가능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진정한 성검의 주인이라면 자일을 이기고도 남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 이번 싸움에서 르네거가 이길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감.

이러한 불쾌한 직감은 틀린 적이 없었기 때문에, 카리나 역시 경계를 늦추지 못했다.

“이번만 넘어가면 끝인 겁니까?”

“끝이라니?”

“당신을 쫓는 다른 아포칼리타가 또 있냐는 말입니다.”

“아마도.”

카리나는 으쓱 어깨를 올렸다.

“내가 워낙 인기가 많아서 말이지.”

르네거는 미간을 좁혔다.

“그건 듣기 좋지 않은 말입니다만.”

그는 카리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당신을 기다리는 인간은 저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아,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했었지.

카리나는 사뭇 입술을 깨물었다.

“일단 살아남는 게 우선이야.”

“압니다.”

르네거는 마치 그런 카리나의 마음을 모두 다 알고 있는 양 환히 웃으며 대꾸했다.

“다시 이야기하지요.”

쾅!

지면이 깊게 파였다.

곧이어 새빨간 날개를 활짝 펴고 있는 자일의 모습이 나타났다.

* * *

자일 아포칼리타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오랜 시간, 카리나를 찾아 헤맨 그였다.

어찌나 꼭꼭 숨어 버렸는지 흔적조차 찾지 못한 것이 수년.

그리움보다 오기가 앞서는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녀의 그림자를 밟게 되었다.

그녀를 찾으면 모든 것이 끝날 줄로만 알았다.

그녀를 탑으로 끌고 가면 되는 것이라고, 그녀를 위해 만들어 놓은 방에 가둬 놓으면 이 그리움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건만.

“…….”

자일은 눈앞에 서 있는 인간 남자를 바라보았다.

카리나를 뒤에 숨긴 채 제게 감히 검 끝을 겨누고 있는 인간을.

그와 카리나가 다정히 대화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카리나가 그에게 힘을 불어 넣어 준 것도 보았다.

그녀가 그에게 웃어 준 것도, 보았다.

자신에게는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던 미소를 지어 주는 모습을 보았단 말이다.

불쾌했다.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 그보다 더한 감정일까.

분노.

그래. 이건 분노였다. 세상에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느껴 보는 감정.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뜨거운 기운.

카리나는 나의 것이었다.

그녀가 메두사의 머리에서 뽑혀 났을 때부터, 몇 년을 유리관 속에 갇혀 있다 종래에 눈을 떴을 때부터, 자일은 그녀와 함께였다.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녀의 창조부터 탄생까지 함께한 자가 바로 그였다.

그렇기에 카리나는 그의 것이었다.

절대로, 빼앗길 수 없었다.

자일의 붉은 눈동자가 더욱더 핏빛으로 물들어 갔다. 새까만 머리칼의 끝에 붉은 기운이 맴돌았다. 그의 기다래진 손톱이 허공을 마구잡이로 긁었다.

“카리나.”

그는 카리나의 두 눈을 직시했다.

“그곳은 네가 있을 자리가 아니다.”

그러며 카리나를 가리고 있는 르네거를 바라본다. 새빨간 눈알이 번들거리며 그의 몸을 훑었다.

그런 자일을 관찰하던 카리나는 피식 실소를 흘렸다.

“내가 있을 곳은 내가 선택해, 자일.”

그러며 그녀는 보란 듯이 르테거의 팔을 붙잡았다.

“이렇게까지 쫓아오는 거, 너무 구질구질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카리나는 턱을 비스듬하게 들어 올리며 자일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렇잖아. 내가 왜 탑에서 나왔는데?”

“카리나.”

“네 낯짝을 보기 싫어서 나온 거라는 걸 알고 있잖아?”

자일은 어떠한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처음과 같은 시선으로 카리나를 바라볼 뿐.

하지만 카리나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모진 말을 하면 할수록, 자일의 검은 속내는 더욱더 썩어 문드러진다는 것을. 덧댄 가면으로 감추고 있으나 그 안에는 짓이겨진 마음이 있다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그런데 왜 이렇게 매달리는 거야, 구질구질하게.”

더욱더 자일을 후벼 파는 말을 했다. 그의 마음이 바스러지길 바라면서.

“돌아가, 자일.”

그녀는 손을 들어 올렸다.

“죽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그녀의 손끝에서 뽑힌 힘이 자일에게로 날아갔다.

하지만 자일은 그녀의 공격을 가뿐하게 피했다.

한 바퀴 허공을 돌아 내려온 자일은 피식 입술을 비틀었다.

“약해졌군.”

그는 손톱으로 허공을 긁었다. 곧이어 찢어진 바람이 거세게 밀려왔다.

카리나는 눈을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날 선 바람이 뺨을 휘갈겼다.

“저 인간 때문인가?”

자일의 피가 섞인 바람이 쏟아졌다.

바람의 목표는 카리나의 두 다리였다.

“카리나!”

르네거는 바람의 정중앙을 갈랐다.

담겨 있던 자일의 피가 튀겨 르네거의 살을 문드러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정도는 괜찮았다. 카리나와 힘을 섞은 만큼,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는 터였다.

“당신의 상대는 나입니다. 나부터 상대하시지요.”

르네거는 자일과 마주 섰다. 자일은 눈에 띄게 헛웃음을 뱉었다. 그는 다시금 손을 들어 올렸다.

“용케 내 힘을 막았다고는 하나.”

휘잉.

그의 피로 가득 찬 바람이 쏟아졌다. 쏟아진 소용돌이는 르네거의 몸을 뒤덮었다.

“두 번은 없다.”

자일은 보란 듯이 비소했다.

인간 주제에 자신의 힘을 버틸 수는 없으리라.

지금쯤 갈라진 고깃덩어리가 되었으리라 생각하며 자일은 손을 거뒀다. 하지만.

“……하.”

그는 헛웃음을 뱉었다.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인간 남자를 내려다본다.

인간 남자를 보호하듯 펼쳐져 있는 검은 방패를 바라본다.

“카리나.”

자일은 곧장 카리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왜 네가 인간을 지키지?”

그는 카리나에게로 날아갔다. 그녀를 내려다보며, 다소 격양된 음성으로 말했다.

“네가 무언가를 지킬 줄도 아는 이였나?”

“당연한 거 아니야?”

카리나는 실소하며 대꾸했다.

“난 너같이 밑바닥을 기는 실험체가 아니거든.”

쿵!

카리나는 힘을 방출했다.

수십 개의 화살로 변모한 검은 기운은 자일을 향해 날아갔다. 자일은 묵묵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약해졌다 한들 충분히 도망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후두둑.

화살이 떨어졌다. 카리나는 자일에게 닿지도 못하고 추락해 버린 화살을 바라보며 쯧 혀를 찼다.

“인간 남자 하나 때문에 도망치지 못하는 것이로군.”

자일은 추락한 화살을 그대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었다.

카리나의 힘에, 자신의 힘을 불어 넣는다.

검고도 새빨간 기운.

그것이 거대한 구가 되어 허공으로 치솟았다.

“저 인간을 죽이면 네가 정신을 차릴까.”

그는 전에 없이 굳은 표정으로 카리나를 내려다보았다.

“네 앞에서 사지를 하나씩 잘라 줄 것이다. 팔을 자르고, 다리를 잘라, 종래에 눈을 뽑고 혀를 잘라서 네 앞에 드리워 주면.”

“…….”

“그때가 되어서 비로소 내게 복종할까.”

자일은 검은 구를 하늘 높이 띄웠다. 르네거에게로 날려 버릴 심산인 듯했다.

카리나는 그런 그를 보며 호기롭게 조소했다. 양팔을 들어 어깨를 으쓱 올린다.

“그럴 수나 있겠어?”

그게 무슨.

자일은 반문하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윽!”

자일은 그대로 추락했다.

커헉!

피를 뿜으며 몸을 웅크렸다. 잘려 버린 날개가 푸득거리며 땅을 굴렸다.

“잘했어, 르네거.”

카리나는 뒤에서 달려든 르네거를 바라보며 슬쩍 웃어 주었다. 그리고 다시 자일을 바라보았다.

“이것저것 생각해 보았는데 말이야.”

카리나는 발등으로 땅을 긁었다. 그녀의 발끝이 닿는 곳마다 검게 물 들었다.

쿠구궁!

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냥 널 여기서 죽이는 게 나을 것 같아.”

새하얀 해골 수백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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