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적당히 하거라. 네 몸을 생각해.]
히론은 전음을 통해 생각을 전달했다. 하지만 카리나는 그에 대답해 줄 수 없었다.
언데드를 일으킨 것만으로도 무리가 온 터였다.
그들을 하나씩 지휘하며 움직이는 것 자체가 힘에 부치는 그녀였다.
카리나는 울컥울컥 쏟아지려는 피를 삼키며 이를 꽉 깨물었다.
자일을 죽여야 한다.
이 자리에서, 죽여야 한다.
원작을 지키려 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포칼리타의 멸망을 위해서.
그런 고로, 지금 자일을 죽이게 되면 아포칼리타는 휘청거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주인공들이 더 손쉽게 아포칼리타를 무너뜨릴 수 있게 되겠지.
자일을 죽이고, 도망친다.
이것이 그녀의 계획이었다.
카리나는 힘을 끌어모아 방출했다.
쿠구궁!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언데드 수백 마리가 자일을 향해 달려들었다.
자일은 그를 피하고자 했으나, 찢긴 날개로는 날아오를 수 없었다.
찰나의 순간, 그는 결계를 치며 그 안에 몸을 숨겼다.
허억, 헉.
가파른 숨을 몰아쉬고 있는 게 보였다.
“네 그런 얼굴은 처음 보네.”
카리나는 그런 자일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꽤 기분이 좋아.”
쿵!
그녀는 다시 힘을 방출했다. 언데드들이 자일의 결계로 달려들었다.
쿵, 쿵, 쿠웅!
결계를 몸으로 짓누르며 그것을 깨뜨리고자 노력한다.
자일은 결계를 간신히 유지했다. 숨을 몰아쉬며 카리나를 직시한다.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무어라 말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추측하기 어려웠다.
이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정신이 희미했기 때문이었다.
카리나는 힘이 풀린 다리를 간신히 세우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카리나.”
다가온 르네거가 그녀의 허리를 낚아챘다.
“그만하십시오. 이젠 제가 하겠습니다.”
카리나는 대답 대신 그를 돌아보았다.
아무리 자신이 힘을 불어 넣어 주었다 한들, 공기 중에 퍼져 있는 독혈을 완전하게 정화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르네거의 얼굴은 눈에 띄게 파리해져 있었다. 식은땀이 가득 했다. 새하얘진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나보다 네가 더 죽을 것 같이 보이는데. 됐어, 저리로 가.”
카리나는 그런 그의 가슴을 밀었다. 하지만 르네거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카리나의 손목을 낚아챘다.
“왜 당신은 항상 그렇게 말을 합니까?”
마주친 그의 얼굴은 물기로 가득 차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습해진 얼굴은 카리나를 처량하게 내려다보았다.
“저는 당신을 지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제 걱정을 듣고 싶은 게 아니란 뜻입니다.”
그는 다른 손에 쥐고 있는 성검에 힘을 불어 넣었다. 새까만 어둠이 검신을 채우기 시작했다.
“힘을 거두십시오. 제가 하겠습니다.”
카리나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놓쳐 버릴 것 같은 정신을 부여잡으며 눈가에 힘을 준다.
“네가 죽을지도 몰라.”
르네거는 웃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는 웃었다.
새까만 힘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환한 웃음을 비추며, 그는 카리나의 뺨을 쓰다듬었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지요.”
그는 고개를 숙여 카리나의 뺨에 입을 맞췄다.
“맹약이 풀릴 때까지는 죽지 않을 겁니다.”
그는 카리나와 자신의 손바닥에 남아 있는 맹약의 문양을 더듬으며 말했다.
“당신을 살려야 하니까요.”
그는 카리나의 목덜미를 바라보았다. 더 정확히는, 카리나의 목을 감싸고 있는 히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히론의 마취 독이 그녀의 혈관을 파고들었다.
“윽…….”
시야가 암전되었다. 정신이 흐려졌다.
그녀는 르네거의 품 안으로 쓰러졌다.
“죄송합니다.”
그는 카리나를 안전하게 뉘어 놓은 후, 한 지점을 향해 걸어갔다.
결계를 찢고 나온 자일을 향해.
* * *
“허억!”
페넬로피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주저앉았다.
쿵, 쿵, 쿵.
빠르게 뛰는 심장이 그녀의 몸을 사로잡았다. 숨이 가팔라졌다.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수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데이펜과 라템의 신관 모두가 뛰어와 그녀를 부축했다. 하아, 하, 그녀는 숨을 토하며 어깨를 웅크렸다.
그리핀 종족의 아포칼리타를 죽인 후, 소식을 알리기 위해 라템의 영역에 방문한 그녀였다.
이곳은 르네거의 고향이자 그의 집. 그렇기에 오래 머물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오래 머물고 싶지 않기도 했다.
후자의 감정이 보다 앞서 들었으므로, 그녀는 최대한 빠르게 라템을 벗어나고자 했다. 그러했었는데…….
‘이 기운은 분명.’
페넬로피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매달고 있는 팬던트에서 새하얀 빛이 방출되고 있었다. 전쟁의 여신이 보내는 신호. 이것을 모를 리 없는 그녀였다.
“아포칼리타가 가까이에 있어요.”
“예?”
라템의 신관은 눈을 크게 뜨며 반문했다.
“하지만 아직 아무런 보고가 없었습…….”
“제가 틀렸다는 말인가요?”
페넬로피는 날카롭게 말했다.
그래. 이건 분명 아포칼리타의 기운이었다.
이 음습하고 더러운, 강하지만 처절한 기운은 분명 아포칼리타였다. 부정할 수 없었다.
“아주 가까이에, 한 명. 아니, 두 명의 아포칼리타가…….”
쾅!
들려온 굉음에 그녀의 말은 끝마쳐지지 못했다.
신관들은 모두 다 결계 바깥쪽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페넬로피 역시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신관을 모으세요. 쉽지 않은 전투가 될 겁니다.”
“하, 하지만 아직 아무런 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지금 사람을 모아 보았자 수가 적을 텐데요.”
“그, 그렇습니다. 이렇게 아무 준비도 없이 아포칼리타와 맞닥뜨렸다간 분명 전멸할 수도 있…….”
“언제부터 그렇게 목숨을 귀하게 여기셨나요?”
페넬로피는 호기롭게 조소했다. 그녀는 달달 떨고 있는 신관들을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제가 있어요.”
그녀는 신의 힘이 담겨 있는 팬던트를 움켜쥐며 말했다.
“그러니, 아무도 죽지 않을 겁니다.”
쾅!
다시 한번 굉음이 울려 퍼졌다. 페넬로피는 빠르게 그쪽으로 달려 나갔다.
* * *
“허억, 헉…….”
르네거는 숨을 몰아쉬었다.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성검을 쥐고 있는 손에 자꾸만 힘이 풀렸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두 다리를 곧추세우며 정면을 직시한다.
그의 몸은 온통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피가 아니었다.
자일의 피. 인간에게 닿으면 살을 썩게 만든다는, 라템의 일족에게는 더더욱 극독처럼 느껴지는.
그러나 르네거는 다행히도 썩지 않고 있었다. 카리나의 힘이 남아 있고, 히론이 기운을 불어 넣어 준 덕도 있었다.
그는 눈앞에 서 있는 자일에게 검을 겨눴다.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을 용하다 해 줘야겠군.”
자일은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르네거와 마주했다.
“나를 이 지경까지 몰아넣은 것도 칭찬해 줄 일이긴 하다만.”
그 역시도 만신창이가 된 터였다. 날개는 한쪽이 찢겼으며, 허벅지에는 깊은 금이 가 있었다. 너덜너덜한 살점이 온전히 드러났다.
그의 귀도 한쪽이 잘려 있었다. 목을 노렸던 공격이 아쉽게 빗나간 흔적이었다.
“언제까지 오만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을지 궁금하군요.”
르네거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비릿하게 조소했다.
“목이 잘릴 때까지도 그러할까요?”
르네거는 그대로 도약했다.
챙!
그의 검과 자일의 손톱이 맞부딪혔다.
자일은 뒤로 몸을 젖히며 다른 손을 휘둘렀다.
하지만 르네거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그는 자일의 팔을 디딤 삼아 높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쾅!
자일의 다른 날개를 그대로 잘라 버렸다.
푸드득!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한 날개는 파들파들 떨며 널브러졌다. 르네거는 그를 발로 짓이겼다.
“어떻습니까?”
르네거는 검의 끝을 자일의 목에 겨누며 말했다.
“그렇게도 무시했던 인간의 손에 의해 죽게 되는 소감이.”
쓰러진 자일은 그런 르네거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승리감이 만연한 낯빛.
감히, 인간 따위가 신의 존재를 벨 수 있다는 오만함에서 오는 얼굴.
“우습군.”
자일은 웃었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입을 크게 벌리며 새빨간 혀를 날름거렸다.
“날 죽이면 과연 카리나가 기뻐할까?”
르네거는 미간을 깊게 좁혔다. 검을 쥔 손에 힘을 준다.
검은 자일의 목덜미를 파고들었고, 자일은 새빨간 피를 뚝뚝 흘렸다.
“카리나는 당신을 죽이고 싶어 했습니다.”
“그녀의 손으로 죽이고 싶어 한 것이겠지.”
자일이 누워 있는 곳은 그가 흘린 피로 흥건해져 있었다.
하지만 자일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래. 마치 그의 피가 아닌 것처럼.
“네가 아무리 발악한다 한들, 카리나의 마음을 얻진 못할 것이다. 그녀는 다른 존재이니.”
다른 존재? 아포칼리타 종족과 인간의 구분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르네거의 숨이 멈췄다.
그는 미동조차 않은 채 자일을 내려다보았다. 흡사 본심을 관통당한 듯 그는 머뭇거리고 있었다.
“인간아, 네 짧은 삶은 우리의 무한한 고뇌를 알지 못한다.”
그는 르네거의 검을 바르쥐었다. 손을 따라 피가 흘러내렸다.
치이익.
마치 타들어 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르네거는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인간들이 오는군.”
인간들? 르네거는 자신도 모르게 경계를 늦추고 귀를 쫑긋 세웠다. 자일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오늘은 이렇게 물러나겠지만.”
휘잉!
거센 바람이 몰려왔다.
눈을 뜨지 못할 만큼 세찬 바람이 르네거의 온몸을 붙들었다.
“다음에는 정말 네놈을 죽여 주겠다.”
자일은 높이 도약했다. 바람을 타고 날아 오른 그는 막을 새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르네거는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사라져 버린 아포칼리타. 잡을 수 없는, 아포칼리타.
“젠장!”
르네거는 주먹을 바르쥐었다.
젠장, 젠장!
한 차례 욕을 더 씹은 그는 빠르게 몸을 틀었다.
“카리나!”
그는 카리나에게로 달려갔다. 아니, 달려가고자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오라버니.”
익숙한 목소리.
르네거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텅 비어 있는 얼굴을 하고 있는 페넬로피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