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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38화 (38/135)

38화

『페넬로피 데이펜은 홀로 세상에 나타났다. 그러니까, 태어난 것이 아니라 나타났다.

갓난아기인 그녀를 발견한 이는 새벽 기도를 올리고자 그날 처음 기도실의 문을 열었던 추기경이었다.

데이펜 일족의 최고위 성직자인 추기경은 말을 옮기기 좋아하는 부류였는데, 포도주에 취한 날이면 어김 없이 그날을 회상하며 실컷 떠들곤 했다.

재단 위에는 수십 개의 검이 있었는데, 페넬로피는 조금의 생채기도 없이 그 위에 누워 있었다는 것이다.

페넬로피를 처음 보았을 때에 자신은 마치 신의 계시를 받는 것만 같았노라고, 아니, 더 나아가 신의 현존을 느끼는 것 같았노라고, 그만큼 거룩하고 신성했다며 감탄 어린 찬사를 하곤 했었다. 그러며 말미에 말을 덧붙였다. 그래서 말이야. 페넬로피의,

부모는 누구지?

정말 신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신의 자식인 것일까? 기도실의 문이 꽉 잠겨 있었으니 아무도 출입하지 못했을 텐데, 그러니 신이 페넬로피를 그곳에 가져다 둔 것일까? 그렇다면 페넬로피는,

전쟁의 여신의 아이로구나.

페넬로피는 신의 아이가 되었다. 데이펜 일족의 거룩한 상징이 되었다.

페넬로피는 그렇게 키워졌다.

그녀는 인간으로서의 기본 의지를 갖기도 전에 신의 아이가 되어 버렸다. 신의 뜻을 따르고 신의 말을 섬기며 오직 신만이 삶의 이유가 되는 인간으로 키워졌다.

그녀는 영역 바깥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바깥은 위험했고, 그녀는 위험에 놓여서는 안 될 성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어느 날 생각했다.

모두 어디에 있지?

내 요람을 지켜주던 롤리는 어디에 간 거야? 내 식사를 도와주던 다리오는 어디로 간 거야? 내게 털 뭉치 장난감을 만들어 주던 로드리는 어디로 갔지? 잠들기 전 동화책을 읽어 주던 리셸은 대체 어디로 간 거야?

모두 다,

어디에 있는 거야?

그들이 모두 다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전쟁에 동원되었고, 패배해 죽었다.

삶과 죽음. 다른 평행선이나 종래에는 겹쳐져 점이 되는 것.

당연한 현실이었으나 그녀는 인정하지 못했다. 신이 선택한 일족이라며, 신의 어여쁨을 받는 일족이라며, 대체 왜,

죽어야 하는 건데?

추기경은 슬퍼하는 그녀를 꼭 끌어안아 주며 말했다.

그러니 네가 있어야 하는 것이란다.

그녀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포칼리타가 급습했던 날. 저를 지키던 추기경이 죽는 순간까지도 그녀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차라리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내가 있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는데, 어차피 살아 보았자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신의 아이고 무엇이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모두 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는데. 죽어 버렸는데.

그런 때에 그녀의 손을 잡아 준 것은 라템 일족의 소년이었다.

르네거.

르네거 라템.

그 역시 눈을 뜨니 라템의 신전에 뉘어져 있었다고, 이지를 갖기도 전에 바다신의 아들이 되어 성검의 주인으로 키워졌다고, 너와 나는 다를 것이 없다고, 그러니까 같은 우리는 같이 살아야 한다고.

페넬로피는 물었다.

너는 사라지지 않을 거야?

너는 죽지 않을 거야?

내 곁에 있을 거야?어느 날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져 버리지 않을 거야? 네 흔적을 그리며 내가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게 해 줄 거야? 정말로,

죽지 않을 거야?

르네거는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며 악을 쓰던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응.

죽지 않을게.

페넬로피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들의 약속은 십오 년간 유효했다.

르네거가 죽기 전까지는.

-덫에 걸린 새는 도망치지 못한다 中-』

* * *

“……오라버니.”

페넬로피는 텅 비어 있는 눈으로 르네거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가냘프게 떨리는 두 눈이 르네거의 면면을 훑었다.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의 몸을 바라본다.

핏물이 자욱한 얼굴을 바라본다.

상처가 가득한 몸을 바라본다.

페넬로피는 곧장 르네거에게로 달려갔다.

“오라버니!”

그녀는 르네거의 품에 안겼다. 그의 가슴으로 파고든다.

그의 등허리를 만진다. 그의 숨을 느낀다. 오르락내리락 움직이는 가슴을 더듬으며, 그가 살아 있음을 인지한다. 하아, 그녀는 시름을 토하며 눈을 내리감았다.

“죽은 줄 알았어.”

그녀의 음성에는 울음이 묻어 있었다.

“정말, 죽어 버린 줄 알았어.”

아니, 그녀는 울고 있었다. 저를 지켜보고 있는 신관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울었다.

수장으로서의 무언가를 놓아 버린 것처럼, 그녀는 펑펑 울며 르네거의 뺨을 매만졌다.

“모두 다 오라비가 죽었다고 말했어. 나는 아니라 했고, 아니라고 믿었어. 그래. 내 믿음이 맞았잖아. 오라버니는 죽지 않았고, 이렇게 살아 있지. 맞아. 내 생각이 맞았어. 난 틀리지 않았어.”

그녀는 숨도 쉬지 않으며 말했다. 르네거의 거칠거칠한 뺨을 만지며, 그렇게 입술을 뻐끔거린다.

하지만.

“왜…… 그래?”

그녀의 눈이 놀람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르네거의 표정을 살피며 입술을 떨었다.

“왜…… 그러는 거야? 나를 본 게 기쁘지 않아?”

페넬로피는 달달 떨리는 시선을 두며 르네거를 바라보았다. 아. 르네거는 탄식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그는 애써 짓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페넬로피의 등을 토닥였다.

“고마워. 날 기다려 줘서.”

전과 같은 얼굴이다. 일전과 똑같이 다정한 얼굴. 페넬로피는 드리웠던 불안감을 거두었다. 그러나.

“잠시만, 페넬로피.”

르네거는 그런 페넬로피를 밀쳐 냈다. 그리고 그녀를 지나쳐 걸어갔다.

울고 있는 그녀의 뺨을 닦아 주지도 않고, 더 위로해 주지도 않은 채.

그가 달려간 곳은 잘려 나간 나무 그루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옆에 누워 있는 한 여자를 향했다.

르네거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아직도 기절해 있는 카리나의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가슴에 귀를 대어 본다.

규칙적으로 뛰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하아,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나는 보이지도 않으냐?]

카리나의 목 뒤에서 기어 나온 히론의 말이었다. 그는 오랜 시간 결계를 치고 있는 것이 버거웠다는 양 다소 갈라진 음성으로 말했다.

“아니요. 그렇잖아도 찾으려 했습니다.”

르네거는 작게 웃으며 대꾸했다. 하지만 히론은 쉽사리 넘어가 주지 않았다.

[흥. 되었다. 바람이나 피고 말이다.]

“……바람이라니요. 그런 게 아닙니다.”

[카리나를 두고 다른 여자를 안지 않았느냐. 그것이 바로 바람이지 무엇이냐.]

“그런 게 아닙니다.”

[흥. 카리나가 일어나면 다 말할 것이다.]

르네거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곧이어 다가오는 페넬로피에 의해 말문이 막히게 되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페넬로피는 그의 앞에 섰다. 그리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아포칼리타잖아.”

페넬로피는 누워 있는 카리나를 보며 말했다.

“왜 아포칼리타를 부축하는데? 왜?”

“내 은인이야.”

르네거는 단호히 대꾸했다.

“날 살려 준 이야. 그리고 더 이상 아포칼리타가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페넬로피는 소리쳤다. 그녀는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토하며 악을 질렀다.

르네거가 안고 있는 아포칼리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데이펜의 영지를 급습한 아포칼리타.

추기경을 죽인 아포칼리타.

나의 사람들을 죽인 아포칼리타.

그게 바로 저자였다.

“저 여자를 알아. 아니, 나만 알까? 모두가 알고 있어. 오라버니도 알잖아! 저 여자의 손에 얼마나 많은 일족들이 죽었는지!”

페넬로피는 어깨를 달달 떨며 소리쳤다.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카리나의 목을 조를 것만 같은 태세였다.

“당장 죽여야 돼.”

“페넬로피.”

“죽여야 한다고!”

“그만!”

르네거는 카리나를 세게 끌어안으며 몸을 일으켰다. 마치 페넬로피를 경계하는 것처럼, 그녀와 거리를 두었다.

“이분이 없었으면, 난 죽었어.”

“오라버니.”

“내가 죽길 바랐던 건 아니라고 생각해.”

페넬로피의 눈이 허망해졌다. 혼이 빠진 것같이, 허무해진 시선이 르네거를 향했다.

“어떻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페넬로피는 두 주먹을 바르쥐었다. 파르르 떨리는 경련이 손을 타고 어깨까지 넘어와 그녀의 얼굴을 뒤덮었다.

“내가 얼마나 오라비를 걱정하고, 또 그리워하고, 또 슬퍼했는지 뻔히 다 알면서…….”

“페넬로피.”

“오라비도 흘려 버린 거야?”

“그런 게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면 대체 왜 아포칼리타를 보호하는데!”

르네거는 미간을 사붓 좁혔다. 더 말을 해 보았자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카리나의 상태를 보아하니 더 시간을 끌어서도 안 될 것 같았고.

“돌아가.”

그는 뒤편에 서 있는 신관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중에 얘기하자.”

오라버니! 페넬로피는 다시 소리쳤다.

“이렇게 가 버릴 거야? 내가, 내가 얼마나 오라버니를 걱정했는데……!”

르네거는 품속의 카리나를 소중하게 감싸 안으며 페넬로피를 내려다보았다.

“지금은 때가 아니야. 막 전투를 끝냈고, 나도 이분도 많이 다쳤어. 지금은 치료를 해야 해.”

“그러니까 왜 아포칼리타를!”

“날 구해 준 은인이라 했어. 그랬는데도 이렇게 같은 말을 반복할 거라면, 나는 더 할 말이 없어.”

페넬로피는 그대로 멈췄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 못했다.

“제발 날 이해해 줘.”

르네거는 무심하게 그녀를 지나쳤다. 라템의 신관에게로 다가간다.

“수장님께 제가 왔다고 전해 주십시오.”

신관은 눈에 띄게 움츠러들었다. 그는 르네거와 카리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 그 아포칼리타는…….”

“제가 책임집니다.”

르네거의 눈매가 굳었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시선이 신관을 향했다.

“제 말을 거역할 생각은 아니겠지요.”

신관은 몇 번 입을 뻐끔거리다, 이내 고개를 푹 숙인 후 길을 안내했다. 르네거는 익숙한 양 그의 뒤를 따랐다.

[다시 봤다, 르네거.]

카리나의 팔을 감싸고 있는 히론이 말했다.

[카리나에게 이르는 건 재고해 주겠다.]

그 우스갯소리에, 르네거는 기가 찬 웃음을 터뜨렸다.

경악에 찬 눈빛을 주고받고 있는 신관들을 보지 못하고.

분노에 차 몸을 떨고 있는 페넬로피를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보지 않고 그는 걸어갔다. 라템의 영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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