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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39화 (39/135)

39화

“더럽게 답답하네.”

샐러딘은 창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중얼거렸다.

환기를 시키고자 창을 연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 안에 가득 차 있는 퀴퀴한 공기는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이건 비단 이 방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 음습한 탑에는 찌들어 있는 피 냄새가 가득했다.

“아. 나가고 싶어.”

그는 재차 중얼거리며 난간에 몸을 기댔다.

자일의 권유-라고 하지만 명령이었다-에 따라 탑으로 거처를 옮긴 샐러딘은 매일매일 짜증 나는 하루를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자일이 그를 억지로 불러들였기 때문만이 아니다. 샐러딘은 그저, 이곳이, 이곳이기 때문에 싫었다.

3년 전 기존의 탑과 똑 닮은 이곳이 싫었다. 방의 위치도, 계단의 모양도, 샹들리에의 빛발도 모두 다 똑같은 이곳이 지긋지긋했다.

이 탑에 엮인 기억은 하나같이 끔찍한 것이었으므로, 샐러딘은 눈을 뜨고 있는 순간 순간이 너무도 괴로웠다.

-대체 왜 이런 꼴로 만들어 놓은 거야?

자일에게 외쳤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러나 샐러딘은 답을 알고 있었다.

“카리나 때문이겠지.”

자일은 카리나가 이 탑을 얼마나 증오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는 카리나를 이곳으로 끌고 와 그녀가 절망에 빠지는 꼴을 보고 싶은 것이었다.

‘미치려면 곱게 미치지 아주 등신이 되어 버렸어.’

샐러딘은 한숨을 뱉으며 백색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카리나에 대한 마음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그였다.

자일 역시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겠지만, 자일은 자신과 결이 달랐다.

자일은 카리나의 불행을 보고 싶어 했다. 그녀가 밑바닥까지 떨어져 우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 그러며 자신에게 매달리는 것을 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샐러딘은 아니었다. 샐러딘은 카리나의 행복을 바랄 뿐이었으니까.

행복이란 것을 겪어 본 적이 없으므로 행복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지만, 그는 적어도 카리나가 웃기를 바랐다.

억지로 보여 주던 근근한 미소 말고, 내면에서 올라오는 환한 웃음을 짓기를 바랐다.

이것이 샐러딘의 사랑이었다.

‘그런 미친놈과는 다르다고.’

샐러딘은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들었다.

지금쯤 자일은 카리나를 만났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되었을까. 과연 카리나는 자일을 따라올까?

……아니. 그녀는 절대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죽는다고 말하겠지.

카리나는 탑을 싫어했다. 자신이 탑을 싫어하는 것과 같은 류의 감정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는 아포칼리타라는 존재 자체를 혐오했기 때문에 탑을 싫어했다.

-왜 저렇게 살아가는 거야?

어느 날, 그녀는 앞다투어 아버지에게 마물의 시체를 진상하던 형제들을 보며 말했다.

-왜 저렇게 재롱을 피우면서 살고 있냐는 말이야.

그런 말을 하는 그녀의 눈은 분노에 차 있었다. 새파란 녹지에 새빨간 불이 피어오른 것처럼, 발화된 감정이 그녀의 두 눈에 가득했다.

하지만.

-……하긴. 나도, 너도 저렇게 했지. 그래서 살아남은 거고.

곧이어 그녀의 두 눈이 죽었다. 불이 타오르던 게 언제냐는 듯, 재가 돼 버린 녹음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역겨워.

그에 무어라 대답했던가. 아니, 샐러딘은 어떤 대답도 해 주지 못했다.

그녀가 말하는 ‘역겨운 것’은 아포칼리타도 아버지도 아닌, 카리나 스스로를 뜻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카리나는 아포칼리타의 모든 것들을 증오했다. 자기 자신까지도.

그렇기에 1차 신마전쟁에서도 일부러 패배한 것이겠지. 또한 그렇기에…….

‘아버지도 죽인 것이겠지.’

샐러딘은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헝클었다.

바깥이라도 둘러볼까. 그는 그리 생각하며 다시 난간을 붙들었다. 그때였다.

“……뭐야, 저건.”

멀지 않은 하늘에 작은 점이 떠 있었다.

새까맣게 보이는 점.

그것은 점점 크기를 확장하고 있었다. 이곳으로 날아오고 있는 것이리라.

“저게 대체…….”

쾅!

뿌연 먼지가 치솟았다. 부서진 바닥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콜록, 콜록.

샐러딘은 기침을 뱉으며 손을 저었다.

그리고 무릎을 굽혀 날아온 물체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얼마 가지 않아, 그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뭐 하는 새끼야, 너?”

샐러딘은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날아온 것은 자일이었다. 그것도 반사 상태로 보일 만큼 엉망이 된 몸을 한 채.

“야. 죽었냐?”

샐러딘은 널브러져 있는 자일의 어깨를 툭툭 발로 건드렸다.

“쿨럭, 컥…….”

자일은 몸을 말며 피를 토했다. 새빨간 피가 쏟아졌다. 샐러딘은 못 볼 것을 봤다는 양 눈살을 찌푸렸다.

“야이 씨, 넌 어디 가서 아포칼리타라고 하지 마라. 이렇게 처맞고 다니는데 무슨.”

“닥……쳐라.”

“어이고, 입은 살아 계시네.”

자일의 상태는 그야말로 처참했다.

살점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깊게 파여 있는 상처들. 잘려 있는 귀. 찢긴 날개까지.

여기까지 날아온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해 줄 수 있을 정도였다.

용케 살아 있네. 샐러딘은 입을 비죽이며 생각했다.

“카리나한테 당한 거야?”

쿨럭, 자일은 피를 토했다. 죽음의 향에 가까운 냄새에, 샐러딘은 재빨리 코를 막았다.

“그러니까 덤비지 말라 했잖아. 카리나가 얼마나 강한데 너 따위를 상대하지 못하겠어? 어휴, 등신.”

아무리 카리나가 강하다 해도 자일에 비견할 바가 아니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샐러딘은 항상 이와 같은 말을 하곤 했다. 자일의 자존심에 조금이라도 상처를 주기 위해서 말이다.

자일의 감겼던 눈꺼풀이 들어 올려졌다.

“이게…….”

그는 가파른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녀에게 당한 상처로 보이나?”

뭐? 샐러딘은 그의 몸을 조금 더 자세히 살폈다.

온몸에 나 있는 자상들. 자일의 피와 섞여 있어 얼핏 보면 검은 기운이 듬뿍 묻어 있지만, 자세히 살피면…….

“라템이냐?”

라템의 기운도 함께 묻어 있었다. 더럽고 재수 없는 신성력이 가득했다는 말이다.

“라템에게 당했다고? 어떻게? 전쟁이라도 한 거야? 아니, 카리나를 찾으러 갔으면서 갑자기 라템은 왜?”

“라템이, 카리나와 함께 있다.”

샐러딘의 입이 그대로 멈췄다. 그는 불식간에 굳어 버린 얼굴로 자일을 내려다보았다.

“왜?”

그의 눈매에 서늘한 빛이 묻었다. 날카로워진 눈빛은 싸늘하기 그지없다.

“왜 라템의 인간 새끼가 카리나와 함께 있어? 왜?”

하지만 자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눈을 감을 뿐.

이 새끼가…….

샐러딘은 자일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야. 기절하지 말고 대답해. 야!”

샐러딘은 그의 멱살을 잡고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쿨럭, 컥, 다시금 피를 토한 자일은 이를 부득 갈며 샐러딘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한마디만 더 하면 정말 죽여 버리겠다.”

금방이라도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처럼 괴기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샐러딘은 보란 듯이 조소했다.

“그 몸으로 잘도 그러겠네. 죽여 봐, 한번.”

자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샐러딘을 붙잡은 손에 바싹 힘을 주었다.

형형한 기운이 넘어왔다. 새까만 힘이 샐러딘의 살을 짓이겼다.

치익.

살이 타는 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손목의 살이 녹아 뼈가 드러났다. 에이 씨, 샐러딘은 기겁하며 손을 잡아 뺐다.

“알았어, 알았다고. 그러니까 하나만 대답해. 그럼 네가 뒈지든 말든 상관 안 할게.”

샐러딘은 자일의 멱살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카리나는 어디 있어?”

* * *

카리나는 일어났을까.

르네거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그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그의 흐릿한 심연을 드러내 주는 것처럼, 희미하고 불투명한 빛만 남아 있을 뿐.

카리나가 걱정됐다.

그녀가 해를 입을까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어차피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 라템은 얼마 없으니.

또한 라템 중에 어느 누가 그녀를 해할 수 있을까.

그런 것들이 아니라,

그녀가 사라져 버릴까 두려웠다.

돌아가니 없어져 있을까 걱정되었다. 그녀를 영영 찾지 못하게 될까 심장이 쿵쾅거렸다.

아무리 히론이 자신만 믿으라 소리를 쳤다고 한들…….

‘카리나가 그의 말을 들을 리가 없지.’

르네거는 생각하며 손을 말아 쥐었다.

가슴에서 시작해 손끝 발끝으로 밀려간 불안함은 종래에 그의 머리를 뒤덮었다. 후우, 숨이 가팔라졌다. 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르네거는 다소 싸늘해진 시선으로 수장을 돌아보았다.

“더 하실 말씀이 없다면 돌아가겠습니다.”

라템의 수장, 스벤은 그런 르네거를 주시했다.

스벤의 늙은 주름이 보다 깊어졌다. 연륜이 보이는 혼탁한 눈동자가 차분해졌다.

“네가 살아 돌아온 것은 매우 기쁜 일이다.”

스벤은 두 손을 차분히 모으며 말했다.

“하지만, 아무 보고도 없이 아포칼리타를 이곳으로 데리고 온 것은 질타받아야 할 터인데.”

“저를 구해 준 은인입니다.”

“그렇다 한들 우리의 적이다.”

“그분은 더 이상 아포칼리타가 아닙니다.”

“그렇다 한들 우리의 일족을 죽인 숙적이다.”

“그분이 없었다면 저는 죽었을 겁니다.”

르네거의 말끝이 흔들렸다. 그러나 스벤의 시선은 변함이 없다.

그저 날카롭고, 뚜렷한 눈빛을 내보일 뿐.

스벤의 눈길에 담긴 뜻을 알고 있는 르네거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나았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군요.”

그는 바득 이를 깨물었다. 스벤은 그런 르네거를 여전히 응시하다, 이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이야. 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그는 한껏 다정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나는 너를 위해 아포칼리타를 숨겨 주었다. 네가 아포칼리타와 함께 있다는 것을 일족들이 알게 되면 너를 질타할 테니 말이다.”

“…….”

“나는 네가 살아 돌아온 이유도 함구하였다. 수많은 적을 물리치고 꿋꿋이 살아온 것이라 공표하였지. 결과는 어떠하냐? 너에 대한 칭송이 하늘을 찌르고 있지 않느냐.”

스벤은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르네거의 손을 꽉 잡아 주었다.

“나는 너를 마음 깊이 걱정하였어. 그러하여 네가 살아온 것에 감사를 표할 뿐이다.”

그의 손은 지극히도 따스했다. 연륜을 품고 있는 주름 사이사이에 다 정함이 깃들어 있는 듯싶었다.

그렇기에 르네거는 자신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모로 돌린다.

수장, 스벤은 태고부터 맺어진 인연이었다.

스벤은 자신을 처음으로 발견해 준 이였으며 젖먹이 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옆에 있으며 저를 돌봐 준 이였다.

그렇기에 르네거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스벤의 말을 거역한 적이 없었다. 거역할 수 없었다. 스벤은 곧 스승이요, 아버지였으니까.

그래서일까. 그래서,

“하지만 그 아포칼리타는 안 된다.”

이렇게,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르네거의 마음을 거세하는 것일까.

“감히 아포칼리타 따위가 대신전에 몸을 뉘이고 있다니……. 신께서도 분노하실 게다.”

스벤은 보다 힘을 주어 르네거의 손을 붙잡았다.

“네가 처리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의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곧 신뢰에서 오는 것. 르네거가 자신의 말을 따르리라 굳게 믿고 있는 듯했다.

르네거는 다시금 헛웃음을 터뜨렸다. 손을 내려다본다. 스벤이 붙잡고 있는 손은 카리나와의 맹약의 증표가 남아 있는 오른손이었다.

“만약 제가 하지 못하겠다 말씀을 드리면.”

르네거는 시선을 들어 올렸다.

“저를 가둬 두고 그분을 죽이려는 생각이십니까?”

스벤의 눈매가 사붓 굳었다. 깊은 주름에 언뜻 노여움이 배었다.

“저를 위해 아포칼리타를 숨긴 것이 아닐 테지요. 성검의 주인이자 라템의 상징인 제가 추문에 휩싸일 것이 염려되었기 때문 아닙니까?”

“…….”

“아포칼리타에게 목숨을 구걸한 사실을 숨긴 것도, 마찬가지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르네거는 힘을 주어 붙잡힌 손을 빼냈다.

“말은 똑바로 하시지요. 저를 마음 깊이 걱정한 것이 아니라, 라템의 결속을 마음 깊이 걱정한 것이 아닙니까.”

스벤은 르네거의 손이 빠져나간 자리를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흘러 사라지는 온기를 더듬으며, 그는 손을 세게 바르쥐었다.

“많이 변해 버렸구나, 아이야.”

그의 부드러웠던 눈매가 날카로워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그 아포칼리타가 너를 변하게 만든 것일 테지. 뱀을 품고 있는 괴물이니만큼, 간악한 이일 테니.”

“카리나를 함부로 재단하지 마십시오.”

“이름까지 부르는 사이가 되었다니.”

스벤은 황망히 조소했다. 그리고 곧, 르네거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다른 이가 보았다면 네가 아포칼리타의 술수에 현혹되었다. 의심할 것이다.”

그의 혼탁한 회색 눈동자가 사납게 번뜩였다.

“의심의 끝은 곧 죽음이요, 그 아포칼리타를 죽이지 않는다면 네가 처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버릴 텐데.”

“…….”

“어찌하겠느냐?”

르네거는 무의식중에 목을 매만졌다.

이제껏, 배신자들의 목이 단두대에서 동강 나는 장면을 숱하게 보았다. 그것을 볼 때마다 르네거는 그저 안타까움, 더 나아가 경멸과도 같은 감정만을 품었었다.

그러기에 왜 신을 배신하였습니까, 신께서는 우리를 지켜 주는데, 신의 비호를 받고 있는 라템의 안에서 살아야지…….

그리 생각했던 그였지만.

-지금 내 말을 믿고 있니?

카리나를 만난 이후, 달라져 버렸다.

이제는 처형당한 사형수들의 의중을 짐작하는 것보다, 처형을 명령한 수장의 의중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바로 지금처럼.

“신께서는 살인을 하지 말라 명하셨지요.”

르네거는 목을 더듬던 손을 무겁게 내렸다.

“한데 교리에 반했다는 이유만으로 처형을 하는 것은, 신의 말씀을 어기는 일이 아닙니까?”

스벤의 입이 벌어졌다. 르네거는 곧장 말을 이었다.

“혹, 수장님께서 인간을 멋대로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입니까?”

스벤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노여움이 깃든 입매는 잔뜩 삐뚤어져 있었다.

“네가…… 감히 라템의 교리를 의심하는 것이냐?”

“라템을 이끌어 가는 수장님의 뜻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르네거!”

스벤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짚고 있던 지팡이를 들어 르네거를 향해 겨눈다. 지팡이의 끝에 푸른빛이 맴돌았다.

“여기서 더 불경한 말을 한다면 참지 않을 것이다.”

“수장님.”

르네거는 그런 스벤을 무심히 바라보며 제 검은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제 머리카락 색이 이리 변한 것에 대해 묻지 않는 걸 보니, 알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그 역시 몸을 일으켰다. 검을 뽑는다. 새까만 검신이 드러났다. 새하얘질 수 없는, 칠흑의 검이.

“그럼 묻지요. 성검에 한 많은 혼들이 갇혀 있다는 사실을 왜 알려주지 않으셨습니까?”

성검이 깊게 요동쳤다. 그와 똑같이 검게 변해 버린 르네거의 얼굴은 무정하기 짝이 없었다.

“저 역시 성검에 힘을 빼앗겨 죽을 것임을, 왜 일러 주지 않으셨습니까?”

스벤의 눈이 흔들렸다.

저 동요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저에 대한 죄책감에서 오는 것인가, 아니면 들켜 버린 진실에서 올 여파에서 오는 것인가.

짐작건대 후자일 테다. 르네거는 짧게 조소했다.

“일전처럼 수장님의 말씀을 잘 듣는 착한 아이로 남고 싶었습니다만…….”

진심이었다.

일평생 스승이자 아버지처럼 여겼던 스벤과, 등을 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스벤은 자신을 제자이자 자식처럼 아끼지 않는다.

라템의 번영과 존속을 위해 사용하는 패, 그저 그뿐.

이 사실을 왜 이제야 알아챈 것인지. 르네거는 스스로의 우매함을 비웃었다.

“이제는, 힘들 것 같군요.”

뒤를 돈다. 들어왔던 방문 쪽을 향해 발을 튼다.

“멈춰라.”

스벤은 지팡이를 휘둘렀다.

쿵!

지팡이 끝에서 뽑혀져 나온 푸른빛이 르네거의 발치에 닿았다.

“어딜 가는 것이냐? 멈추라 하지 않았느냐!”

그는 다시 한번 지팡이를 휘둘렀다. 응축된 빛은 르네거의 몸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쿵!

르네거는 검집으로 빛을 튕겨 냈다. 자칫했다간 정말 당해 버렸으리라.

곤두박질쳐져 소멸하는 스벤의 힘을 바라보며, 르네거는 다시 한번 절망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스벤을 바라본다.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간다.

“한 번만 더 제게 힘을 사용한다면.”

르네거는 스벤의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발광하던 푸른빛은 그의 손안에서 사라졌다.

“저 역시 참지 않을 겁니다.”

맹세의 배반은 어려우나 그것을 지키기는 쉬우리라.

르네거는 굳어 있는 스벤을 뒤로하고 자리를 떠났다.

카리나가 보고 싶었다.

지독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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