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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40화 (40/135)

40화

꿈을 꿨어.

카리나는 가물가물한 눈을 들어 올리며 생각을 읊조렸다.

이곳에 살기 전, 그러니까 이 빌어먹을 책 속 세계에 환생하기 전의 ‘나’에 대한 꿈을 꿨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꿈보다는 기억을 떠올렸다는 것이 맞는 말이었다. 카리나는 기억을 떠올렸다.

* * *

-쏴아아

그날은 비가 오는 날이었다.

평소처럼 아버지의 술 심부름을 하던 날. 하지만 아버지는 평소와 달랐다.

문을 열자마자 보인 아버지, 그리고 그녀에게로 향해 있는 칼끝.

그녀는 술이 담긴 비닐봉지를 내던진 채 그대로 뛰쳐나갔다.

거기 서, 당장 안 서…… 외침이 들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빗길에 몇 번이고 미끄러지고 몇 번이고 넘어졌지만 끊임없이 달렸다.

쏴아아.

빗줄기는 굵어졌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비는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웠으며, 그 어느 때보다 서러웠다.

그녀는 높은 계단 앞에 다다랐다. 뒤를 보니 아버지는 여전히 그녀를 쫓아오고 있었다.

칼은 없다. 그것보다 더 무서운 손이 있을 뿐.

-대체 왜 이러는 거야!

그녀는 소리쳤다.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으면서, 세상의 그 누구보다 아낀다고 했으면서, 하나뿐인 내 딸, 행복하게 해 준다고 했으면서

사업이 실패했기 때문일까. 가난해졌기 때문일까. 그래서, 사랑이 사라져 버린 걸까.

-제발 그만 좀 해!

그녀는 몸을 파르르 떨며 소리쳤다. 이때, 비에 젖은 발이 뒤로 꺾였다. 어긋난 다리는 그녀를 더 이상 지탱해 주지 못했다.

몸이 뒤로 넘어갔다. 아버지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손을 뻗으면 그에게 닿을 테지만, 그녀는 그러하지 않았다. 잡히고 싶지 않았으니까.

눈을 감기 전, 생각했다.

어쩌면 사랑은, 불행 앞에 서면 작아지는 게 아닐까.

그녀의 몸은 그렇게 계단 아래로 추락했다.

* * *

“후우…….”

카리나는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 내렸다. 축축한 물기가 손바닥에 닿았다. 요에 손을 닦으며 미간을 좁 혔다.

벌써 이십팔 년 전의 이야기다.

그렇기에 잊은 줄로만 알았다. 아버지의 얼굴도 어머니도 그 무엇도 기억나지 않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떠올라 버리다니.

잊고 싶었는데. 생각하고 싶지 않았는데.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아니, 몸 전체가 떨려 왔다. 카리나는 무릎을 그러모으며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참으로 얄궂지 않은가.

엉망이 되어 버린 삶이 힘들어 포기했는데, 더 엉망인 세상에서 태어나 버릴 줄이야.

그래서.

카리나는 이 삶이 지독하게 싫었다. 때때로 환멸이 올라와 구역질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이 삶도 이제 곧.

아포칼리타가 멸망하는 날, 나는 즉시…….

[카리나야!]

히론의 목소리에, 카리나는 서서히 현실로 돌아왔다. 그제야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본다.

침대, 협탁뿐인 정갈한 방이 눈에 들어왔다. 새하얀 벽이 보였다. 신의 형상을 딴 조각상이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설마.

[몸은 좀 어떤 것 같으냐? 어디가 아프거나 하지 않느냐?]

히론은 카리나의 허벅지에 올라오며 말했다. 카리나는 그런 히론의 목을 움켜쥐었다.

“이곳이 라템의 대신전이라는 말만 하지 마.”

[……맞다.]

“미쳤구나, 네가 드디어.”

탁.

그녀는 손을 풀며 이마를 짚었다. 깊게 좁혀진 미간을 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코끝에 닿는 성력의 향이 고까웠다. 피부에 느껴지는 깨끗한 기운이 불쾌했다. 그녀는 몸서리를 치며 어깨를 떨었다.

“전투 도중에 날 문 것으로도 모자라서 여기까지 나를 데리고 와? 네가 제정신이야?”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히론은 카리나의 말허리를 자르며 소리쳤다.

[네가 거기서 계속 싸웠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다쳤을 것이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하지만!”

[그리고 너를 다른 곳으로 데려갈 수도 없었어. 널 옮기다가 더 좋지 않아질까…… 걱정이 되어. 그래서 이곳으로 왔다.]

카리나는 더 말을 하려다, 이내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목덜미의 상처를 더듬더듬 만져 보았다.

상처가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이상하리만큼 그곳이 화끈거렸다. 몸의 상태가 좋지 않은 까닭이리라,

자일은 강했다.

자신의 예상보다 더.

목의 상처 때문에 약해졌다는 말은 그의 앞에서 핑계나 다름없었다.

내가 온전한 몸이라 한들 그를 이길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다른 방법을…….’

다른 수가 있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이었다. 지금으로써는 타계를 고민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일단, 나중에 생각하자.’

카리나는 식은땀에 묻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생각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르네거 놈이 이겼다.]

“……그래?”

[이겼다기보다는 자일이 물러선 것이지만.]

“그게 이긴 거지.”

원작에서 ‘진정한 성검의 주인’은 자일과 필적할 만큼 강하다. 어쩌면 그보다도 더.

그러니 르네거가 자일과 대적할 수 있는 게 당연했다.

아직 성검의 힘을 모두 다 흡수하지 못했을 텐데 그 정도라면…….

‘승산이 있을지도.’

르네거가 아포칼리타를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 자일만 쓰러뜨리면 아포칼리타를 멸망시키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닐 테니까.

‘하지만 르네거는 신관이지.’

그의 성격이 전과 달라졌다 한들, 태생이 변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는 신관이었다.

나는 아포칼리타였고.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일 수 없는 사이였다.

역시 자일은 나 혼자 상대해야 하는 걸까. 카리나는 고심을 이어갔다.

[그리고…….]

카리나의 이런 복잡한 심경을 모르는 히론은,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 뒤에 라템의 신관들이 왔다. 그리고 데이펜의 여자 수장이 왔는데…….]

여자 수장? 카리나의 눈이 커졌다.

“페넬로피?”

[네가 그 이름을 어떻게 아느냐? 그래. 그 이름을 가진 인간이 맞다. 르네거 놈이 불렀으니 말이다.]

페넬로피가 이곳에 있었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기절한 것이 다행일 수도 있었다. 페넬로피와 부딪히지 않았으니까.

[네가 쓰러져 있는 틈을 타 그 인간 여자가 르네거 놈에게 안기더구나.]

“……그래. 그랬겠지.”

[이르지 않는다고 했는데 말해 버렸군.]

히론의 말을 더듬던 카리나는, 이내 눈살을 찌푸리며 코웃음을 쳤다.

“난 르네거와 아무 사이가 아닌걸. 눈치 보지 마.”

[그놈이 널 좋아하지 않느냐?]

“아마도.”

카리나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변하는 건 없어. 어차피 내가 이곳을 나가면 다신 보지 않게 될 테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히론은 혀를 날름거렸다. 카리나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행동이었다.

[내가 보았을 때 르네거 놈은 네게 단단히 빠져 있다.]

“그래서?”

[그놈을 이용하라는 말이다.]

카리나는 낮게 조소했다.

어쩜 이렇게 우리의 생각은 똑같을까. 아포칼리타의 존재들은 이렇게도 간악한 것일까.

그녀는 손에 턱을 괴며 히론을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지금 네 힘으로는 자일 놈을 이길 수 없지. 하지만 르네거 놈이 함께 한다면 승산이 있을 테다.]

“그건 그렇지.”

카리나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르네거는 신관인걸. 나와 같은 아포칼리타가 아니잖아.”

[대관절 그게 무슨 상관이라는 말이냐?]

히론은 목을 꼿꼿하게 세우며 카리나와 눈을 마주했다.

[어차피 그놈은 널 좋아하고 있지 않느냐? 네가 함께하자 말만 하면 성서를 버리고 달려올 놈일 텐데 말이다.]

히론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있었다.

카리나 또한 동의했다. 하지만 기이할 만큼 꺼려졌다.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왜일까. 이유는 잘 가늠할 수 없었다.

카리나는 깍지를 껴 손을 잡았다. 등을 말아 허리를 굽혔다. 히론을 바라본다.

“나는 말이야, 히론.”

그녀의 녹색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믿지 않아.”

[무엇을?]

“모두 다.”

그녀는 자조적이게 조소했다.

“지금 상황에서 말을 하자면 르네거의 마음을 믿지 않는다는 게 적절하겠네.”

그가 자신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이 사랑에 가까운 것이라는 것쯤은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카리나는 그를 믿지 않았다. 믿지 못했다.

어차피 사랑이란 것은 불행 앞에 서면 힘을 잃을 테니까.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었다.

[그래서…….]

히론은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두려운 것이냐?]

카리나의 눈이 커졌다. 히론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르네거 놈이 널 배신할까 봐? 그래서 두려운 것이냐? 그래서 르네거 놈과 함께하기가 어려운 것이고?]

“……아니, 그런 건 아니야.”

[거짓말이다.]

“그런 게 아니래도.”

카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히론의 말을 완전히 부정할 수가 없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생각을 바로 하기가 어려웠다.

정말 그렇기 때문일까?

또다시 사랑에 배신당할까, 두려운 것일까?

잘 모르겠다. 어쩌면 잘 알고 싶지 않은 걸 수도 있었다. 카리나는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카리나야.]

히론은 카리나를 향해 고개를 들이밀었다.

[몸은 다 컸는데 정신은 아직도 아이나 다름이 없구나.]

그는 혀를 이용해 카리나의 뺨을 핥아 주었다.

그의 체온은 높지 않았지만, 그가 핥아 주는 부분이 따뜻해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카리나는 얕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말이다.]

히론은 좋은 생각이 났다는 양 눈을 크게 올려 뜨며 말했다.

[그놈이 신관이기를 거부한다면?]

“……뭐?”

[그리고 온전히 너만을 믿는 신자가 된다면?]

“히론. 그건…….”

[그럼 믿을 수 있겠느냐?]

카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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