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 듯합니다.”
아힌의 말을 끝으로, 접견실에는 침묵이 찾아왔다.
스벤은 아힌에게서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복잡한 심경을 정리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 침묵 속에서, 아힌은 슬며시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르네거.
르네거 라템.
대체 왜 살아서 돌아왔다는 말인가?
아힌은 아랫입술을 짓이기듯 깨물었다.
자신은 페넬로피를 사랑한다. 그렇지만 페넬로피는 르네거를 사랑한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겠는가?
그는 사랑하는 여인의 미래를 축복해 줄 수 있을 만큼의 아량을 가진 사내가 아니었다.
그녀가 나 대신 다른 사내를 사랑한다면. 그렇다면.
‘죽여 없애야 한다.’
그렇기에 르네거를 쿠히란의 지역으로 보낸 것이었다. 그가 죽기를 바랐으므로.
하지만 그는 살아왔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페넬로피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아포칼리타라는 장애물 덕분에 르네거와 함께하지 않는 것 같으나, 이것은 시간문제일 뿐. 곧 르네거에게 제 마음을 표현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그 전에…….
‘르네거를 죽인다.’
불행 중 다행으로, 르네거는 자신이 데리고 온 아포칼리타와 가까이 지내는 듯했다. 이를 이용한다면 르네거의 목숨을 문제없이 끊어 낼 수 있을 터.
르네거의 죽음이 확실해지면, 페넬로피 역시 마음을 정리할 수 있게 되겠지.
페넬로피는 나의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넘겨줄 수 없어.
아힌은 구겼던 인상을 바로 펴며 얼굴을 들어 올렸다. 스벤을 바라본다.
저 꼬장꼬장한 늙은이를 꾀어낼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르네거의 변심을 다른 신관들이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라템 일족의 공동체 의식을 자극하는 것. 아힌은 빠르지 않게 말을 덧붙였다.
“바다신의 아들이자 다음 대의 수장으로 언급이 되고 있던 그 르네거 라템인데……. 신의 교리를 저버렸다는 말이 돌게 되면.”
“아힌 경! 그런 말은!”
“다른 신관들이 참으로 좋아하겠습니다. 그렇지요?”
스벤의 눈매가 사붓 떨렸다. 굳건했던 입매가 스륵 녹아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럼 그렇지. 아힌은 비죽 웃으며 깍지를 꼈다.
“후우…….”
스벤은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주름진 눈가를 꾹꾹 누르며, 미간을 잔뜩 좁힌다.
“내가 르네거를 얼마나 아끼는지, 경은 알 것이라 생각하오.”
“그럼요. 제가 모를 리 있겠습니까.”
아힌은 대답하며 비죽 웃었다.
그럼. 알다마다.
르네거 라템을 아끼다 못해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검열하며 간섭했었지. 자신의 뜻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매질을 했었고 말이야.
그것이 ‘아낌’이라 한다면, 아힌은 그럴 수 있노라 대답했다. 아끼지 않고서야 그를 통제하려 할 리 없으니 말이다.
그래. 내가 페넬로피를 아끼는 것처럼.
아힌은 제게로 시선을 돌리는 스벤을 바라보며 여상히 웃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르네거의 변심을 참고 넘어갈 수가 없소.”
“배신을 당하신 거니까요.”
“그렇소!”
쿵!
스벤은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말했다.
“대체 그 착한 아이가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
아아. 그는 허물어지듯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나 그다지 진정성이 느껴지지는 않는 모습이었다. 아힌은 무심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생각해 보았소.”
스벤은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르네거가 데리고 온 아포칼리타가 뱀의 여자이니만큼, 그 간악한 술수에 홀렸을 가능성이 있지 않겠소?”
라템의 성검과 연관이 있는 아포칼리타. 그렇기에 스벤은 더욱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더더욱 르네거를 용서할 수 없을 텐데요.”
아힌은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하지만 르네거가 그 아포칼리타를 죽인다면 없었던 일이 될 터.”
이런.
아힌은 이마를 짚었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줘 보겠소.”
욕지거리가 혀끝에 닿았으나, 이내 풍화되었다.
후우.
아힌은 심호흡을 하며 들끓었던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렇게 안 봤는데, 수장께선 참 마음이 약하시군요.”
그는 다시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스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정말 르네거를 자식처럼 여기셨나 봅니다.”
스벤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을 뿐.
그 머뭇거림에서 오는 진실을 추측할 수 있었기에, 아힌은 스벤에게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새로운 성검의 주인을 찾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라거나.”
움찔.
스벤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아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세카이나의 신전에 꽤 괜찮은 소년이 있더군요.”
“……세카이나라면 3년 전 아포칼리타에게 정복된 곳일 텐데.”
“신의 광명은 어디든지 비추니까요. 그곳에도 라템의 신자는 있답니다.”
스벤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힌을 바라본다. 등등한 기세를 비추고 있는 그의 얼굴을 관찰한다.
“그렇다면 내가 알아봐도 되겠소?”
“얼마든지요. 이름이 뭐라더라…….”
아힌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케셰트. 케셰트 라템이었습니다. 그 이름을 가진 아이를 찾으면 될 겁니다.”
“……알아보겠소.”
스벤의 목에 힘이 들어갔다.
제아무리 아힌을 껄끄러워한다 한들, 그가 부리는 바람이 가져오는 정보까지 밀어낼 수 없었다. 그의 정보는 이제껏 틀린 적이 없으니 말이다.
‘만약 새로운 성검의 주인을 찾게 된다면…….’
르네거는.
스벤의 눈이 불현듯 번뜩였다.
“나는 곧 르네거를 설득해 볼 생각이오.”
“얼마든지요.”
“하지만 르네거가 여전히 내 말을 거부한다면.”
스벤은 아힌과 눈을 마주쳤다.
르네거에 대한 소문이 퍼지는 것을 겁내고 있는 바, 그를 보란 듯이 처형시킬 수는 없다. 그러므로 라템의 병력도 이용할 수 없다.
그러니.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아힌 경에게 맡겨도 되겠소?”
르네거를 지독히 싫어하는 아힌 데이펜뿐.
아힌은 기다렸다는 듯 환한 웃음을 지었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처리해 드릴 수 있습니다.”
이 역시도 뱀의 속삭임과 같은 것이라.
스벤은 그의 손을 맞잡았다.
* * *
“으읏…….”
르네거는 카리나의 뒷목을 그러당기며 그녀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카리나는 느껴지는 묵직한 감각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벌려지는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질척한 신음이 서로를 유혹하듯 끝없이 새어 나왔다.
윽.
카리나는 목의 상처가 타들어 가는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르네거의 피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오는 통증으로써, 그녀의 망가졌던 몸이 회복되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증거였다.
카리나는 목으로 넘어오는 그의 피와 숨을 핥으며 달뜬 신음을 내었다. 르네거 역시 그에 반응하듯 더욱더 몸을 밀착했다. 조금의 벗어남도 없이.
[너희는 내가 있는 걸 항상 잊는 것 같구나.]
아차. 싶었으나 지금은 히론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르네거는 히론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 양 카리나의 안으로 더욱더 깊이 파고들었다. 그럴수록 카리나는 더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이대로 더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대답도 하지 않다니……. 말세다, 말세야.]
히론은 똬리를 틀었던 몸을 쭉 폈다. 혀를 날름거리며 고개를 내젓는다.
[늙은 마물에 대해 공경이 없구나. 이렇게 살아서 뭣 하겠느냐. 쓸쓸히 죽든가 해야…….]
“넌 나와 같이 태어났거든?”
결국 방해를 이기지 못한 카리나는 르네거의 얼굴을 밀며 소리쳤다.
[나는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잠들어 있었다. 그러니 내 나이는 너에 비할 바가 아니지.]
“그래. 너 나이 많아서 좋겠다.”
나도 전생까지 합치면 오십이 넘거든? 카리나는 차마 뱉지 못한 말을 삼키며 눈을 흘겼다.
“됐어. 그만하자. 흥이 깼어.”
쯧.
카리나는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제 팔을 붙들고 있는 르네거의 가슴을 밀어낸다.
“치료하는 행위에 흥이 어디 있겠습니까.”
르네거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뚝뚝 묻어났다.
그는 버클이 풀린 성직 칼라를 잡아 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나른하게 내려다보는 시선에는 배반적인 금욕이 듬뿍 담겨 있었다.
“더 할 수 있습니다만.”
그는 하얀 사제복의 단추를 풀며 말했다. 얼핏 보이는 목덜미는 지나칠 만큼 야했다.
그의 말대로, 조금 더 해도 괜찮을 테지만…….
힐끗.
카리나는 히론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르네거의 처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일까. 히론의 앞에서 르네거와 붙어 입을 맞추는 행위가 조금 불편하게 느껴졌다.
카리나는 조금씩 르네거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아.”
“적당히 해.”
그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기며 웃음을 터뜨렸다.
르네거는 아쉽다는 양 입을 꾹 다물며 풀었던 단추를 채웠다. 카리나의 옆에 몸을 앉힌다.
“그래서 말이야.”
그런 르네거를 지켜보고 있던 카리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쓰러져 있던 삼 일간, 무슨 일이 있었어?”
르네거는 자신도 모르게 멈칫거렸다. 이곳에 오기 전, 스벤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카리나는 그런 그의 어색한 낯빛을 바로 알아챘다.
“얼굴이 안 좋은 걸로 봐서 좋은 일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고…….”
그녀는 한쪽 다리를 꼬아 올리며 말했다.
“수장이 너를 괴롭혔니?”
그녀는 어쩜 이렇게 모든 것을 다 아는 걸까. 르네거는 감탄했지만, 그 말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카리나는 그의 침묵이 뜻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르네거를 향해 상체를 숙이며 고개를 까딱였다.
“죽여 줄까?”
그 말에, 르네거는 푸시시 웃음을 터뜨렸다. 눈가가 접힐 정도로 크게 웃는다. 카리나는 눈을 찡그리며 숙였던 몸을 되돌렸다.
“뭐야, 왜 웃는 거야?”
“당신다워서요.”
르네거는 곧장 대답했다. 그는 카리나를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을 이었다.
“신이 지켜보고 있는 대신전 안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존재는 당신밖에 없을 겁니다.”
“내가 불경하다는 말을 하는 거야?”
“그건 맞습니다만…….”
르네거는 몸을 일으켜 카리나의 앞으로 다가갔다. 한쪽 무릎을 꿇으며, 그녀의 무릎에 손을 얹는다.
“항상 그렇듯, 그래서 좋다는 말을 하려 했습니다.”
해사한 웃음이 그의 얼굴을 덮었다. 티끌 하나 없는 깨끗한 표정이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드러내 주었다.
이런 건…….
카리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짓씹었다. 그의 얼굴을 외면한다.
“정말, 치료가 필요 없습니까?”
그는 카리나의 허벅지 쪽으로 천천히 손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이때였다.
[내가 있다는 걸 잊지 말아라.]
히론은 꼬리로 르네거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더라도 너를 허락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절 싫어하시는 겁니까? 우리가 나름 친해진 줄 알았는데요.”
[인간 주제에 나와 친해졌다니! 그런 더러운 말은 하지 말아라!]
히론은 빽 소리치며 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네놈이 라템인 이상, 카리나의 짝은 될 수 없다! 알겠느냐?]
르네거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푸른 눈동자에 선명한 이채가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