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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43화 (4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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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네놈이 라템인 이상, 카리나의 짝은 될 수 없다! 알겠느냐?]

르네거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푸른 눈동자에 선명한 이채가 스쳤다.

“태어나기를 라템의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어떡하겠습니까.”

그의 음성에는 신성함이 있었다. 눈빛에는 신실함이 있었다. 신의 기운. 신의 사랑을 받는 인간의 기운. 그 모든 것이 르네거를 감싸고 있었다.

[또, 또, 꼬박꼬박 말대답! 카리나야, 봤느냐? 저 인간이 나를 괴롭힌다.]

히론은 카리나의 손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카리나는 이런 히론의 모습이 낯설다는 양 어색하게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히론이 오늘따라 어리광이 심하네. 말마따나 수천 년을 살았으면서 말이야.”

[르네거 놈이 신의 기운을 잔뜩 묻히고 있으면서 네 곁에 있으니 하는 말이 아니더냐! 난 싫다! 저놈이 신관이라 싫어!]

“히론.”

카리나는 히론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르네거는 르네거 라템이야. 르네거의 정체성을 부정할 수는 없어.”

[그렇지만……!]

“그리고 내 짝은 내가 선택해, 히론.”

그녀는 히론의 입을 꾹 말았다.

“어차피 이틀 뒤면 헤어질 사이야. 괜히 힘 빼지 말자.”

참 이상한 일이다.

카리나는 분명 히론에게 말을 하고 있는데, 르네거는 그녀의 말이 가슴에 꽂힌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이틀 뒤면 헤어질 사이.

그건 내가 라템이기 때문인가? 라템의 인간이기 때문에, 카리나는 나를 선택하지 않는 것인가?

르네거는 바싹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고개를 저으며, 흘러들어 온 상념을 애써 떨친다.

[그래도 난 네 옆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르네거 저놈은 널 두고 바람을 핀 놈이니까.]

르네거의 두 눈이 커졌다.

“아니, 그건……!”

그는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로 히론과 카리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말하지 않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미 말했다.]

“악속을 어기다니요.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셨습니다.”

[내 혀끝을 봐라. 두 갈래다. 흥.]

“정말 너무하십니다.”

르네거는 난감함을 지우지 못하는 듯, 두 손을 꽉 맞잡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 아이는 제가 말씀드렸던 동생……”

“말 안 해도 알고 있어.”

카리나는 피식 웃으며 손을 뻗었다. 르네거의 날렵한 턱선을 어루만진다. 쓰다듬는 그 손길은 이상하리만큼 서늘했다.

“너를 그만큼 따랐던 동생이니, 내가 이곳에 온 것이 지독히 싫을 수 있지. 이해할 수 있어.”

카리나는 마치 중얼거리듯 말을 읊조렸다. 그리고 곧, 르네거에게로 말을 틀었다.

“그 아이가 나에 대해 뭐라 했니?”

르네거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느껴지는 이 한기는 비단 피부의 체온만이 아닐 것이다.

이는 분명 그녀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 르네거는 할 말을 찾지 못해 방황했다.

“날 죽이라 했니?”

죽여야 돼, 아포칼리타라고, 당장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일 거야…… 그리 외치던 페넬로피가 떠올랐다.

르네거는 더 이상 카리나를 올곧이 보지 못하고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래서.”

카리나는 그를 만지던 손을 거두며 말했다.

“날 죽일 거니?”

그녀의 손이 떠나간 자리는 공허하기만 하다.

차가운 기운이 있던 자리도 허무해질 수 있구나. 르네거는 새삼 깨달은 양 고개를 푹 숙였다.

“……당신을.”

그는 이마를 카리나의 무릎에 대었다.

“당신을 지키는 것보다 죽이는 것이 더 힘들 겁니다.”

제 몸에는 뜨거운 열이 돈다. 하지만 카리나의 몸에는 차가운 한기만 가득하다.

이 극단적인 온도가 과연 얽힐 수 있을까.

……아니. 그것보다야.

“하지 못할 일이기도 하고요.”

내가 그녀의 속에 편입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리라. 르네거는 그렇게 판단했다.

“그래?”

르네거는 천천히 고개를 올렸다. 그리고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다른 때보다 짙은 녹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는 그녀의 생각을 가능해 보았다.

“그럼 됐어.”

하지만 카리나는 그 무엇도 보여 주지 않았다. 그저 알겠다는 웃음뿐, 그리고 외면뿐.

“나도 남의 손에 죽고 싶진 않거든.”

그 말에 다른 뜻이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르네거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그녀의 눈길을 더듬으며, 이상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 * *

이제 그만 돌아가 보라는 카리나의 말에, 르네거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방을 빠져나오게 되었다.

조금 더 있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감히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았으므로.

더불어 히론의 말이 자꾸만 머리에 맴돌아…….

-네놈이 라템인 이상, 카리나의 겉에는 올 수 없다. 알겠느냐?

그렇다면 내가 라템임을 포기하면, 카리나의 곁을 허락해 주겠다는 뜻일까.

르네거는 차분히 시선을 내렸다. 두 손을 바라본다.

한 손바닥에는 카리나와의 맹약 흔적이 남아 있고, 다른 한 손목에는 바다신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팔찌가 걸려 있다.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르네거 님!”

생각의 흐름을 깨뜨리는 외침이 들려왔다. 르네거는 자연스레 인상을 굳힌 채 고개를 돌렸다.

돌아보니 소년티를 벗지 못한 신관 여러 명이 서 있었다.

“어…… 아, 안녕하세요. 저희는 이번에 대신전에 입적하게 된 예비 신관입니다.”

그들은 르네거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르네거 님께서 돌아오셨다는 이야기에 뵙고 싶어 찾아왔어요. 그 아포칼리타들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오셨다고…….”

“아.”

르네거는 짤막한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했지. 수장이 아포칼리타를 숨기고, 거짓된 내 공적을 퍼뜨렸지.

이렇게 생각하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르네거는 더욱 눈가에 힘을 주었다.

“이기지 못했습니다.”

“……네?”

“이기지 못하고, 살아만 돌아온 것입니다.”

죽일 수도 없었고요. 르네거는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삼키며 말을 끝마쳤다.

“아…… 그, 그러시구나.”

“할 말은 다 끝났습니까?”

싸늘한 말에, 신관들은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얼어붙은 채 멍하니 르네거를 바라만 볼 뿐.

“그럼 이만.”

르네거는 짧게 목례를 한 후 자리를 떠났다. 그때까지도 굳어 있는 그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제야 정신을 차린 신관들은 당황이 섞인 속삭임을 주고받았다.

“정말 저분이 성검의 주인이 맞아?”

“아까 추기경님께서 말씀해 주셨잖아. 저분이 맞아.”

그들은 흔들리는 눈으로 르네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분명…… 엄청 상냥한 분이라 하지 않았어?”

“다정하다고도 들었는데…….”

이제 갓 신관이 된 소년들인지라, 그들은 르네거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바다신의 아들. 그리고 성검의 주인.

자애로운 성정, 드높은 신앙심.

그에 대한 찬양만 하여도 수십 날을 들었으리라. 그렇기에 그가 살아 돌아온 것에 격한 기쁨을 표했건만.

르네거는 예상과 달랐다. 다르기만 할 뿐일까. 그들의 기대는 와장창 깨져 버렸다.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고개를 푹 떨어뜨리며 작게 읊조렸다.

“무서워.”

* * *

“히론.”

르네거가 나간 후, 카리나는 히론을 향해 손을 뻗었다.

“왜 갑자기 르네거에게 그런 말을 한 거야?”

[그런 말이라니?]

“라템의 인간이라 싫다는 둥, 신의 기운이 묻어나서 싫다는 둥, 평소에는 하지도 않았던 말을 했잖니.”

그녀는 히론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하지만 히론은 시선을 피했다. 찔리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르네거를 내 아래에 두려고 한 거지? 음흉하긴.”

히론의 흔들리던 시선이 제자리를 찾았다. 그는 날름거리던 혀를 집어 넣으며 카리나를 응시했다.

[네 눈치 빠른 건 비견할 이가 없을 거다.]

“당연한 말을.”

카리나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르네거가 내게 오길 원해?”

[너 역시 당연한 말을 하는구나.]

히론은 목을 빳빳하게 세우며 말했다. 그 태도가 너무도 올곧아, 카리나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벽에 몸을 기댄다. 르네거를 떠올린다.

제게 보이는 정열적인 눈빛을, 맹목적인 감정을, 간절한 숨을……. 모두 다, 진심으로 보이는 것들을.

그런 그의 태도에 카리나의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하면 그것은 거짓일 테다.

하지만.

“나는 잘 모르겠어.”

감정은 찰나의 것일 뿐이 아니던가.

사랑은 불행 앞에 쉽게 휘발되어 버리는 것이니까.

르네거만큼은 그렇지 않을 거란 보장은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

카리나는 손끝을 말아 쥐었다.

하아.

숨을 토하며 머리를 쓸어 넘긴다.

“그래. 히론 네 말이 맞아. 르네거가 내 옆에 있으면 확실히 도움이 되겠지.”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하지만?]

“우리는 그에게 선택을 강요할 수 없어. 그러고 싶지도 않고.”

[왜?]

히론은 성이 난다는 듯 몸을 크게 부풀리며 말했다.

[네 말 한마디면 꼬리를 흔들고 달려올 놈인데? 대체 왜?]

“르네거는 그만의 삶이 있으니까.”

카리나는 열린 창문 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아래를 내려다본다.

르네거가 마련해 준 방은 라템의 대신전 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했다.

창문 아래는 작은 정원이 있었다.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은 오솔길밖에 없는 곳. 울창한 수풀이 가득한 곳. 밀회를 즐기기 좋은 곳…….

르네거를 만나기에 좋은 곳.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르네거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팔을 붙잡고 있는 페넬로피 역시도.

“주인공들의 만남이네.”

카리나는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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