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카리나는 창틀에 손을 기대고 턱을 괸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잘 정돈된 정원에는 르네거와 페넬로피가 함께 서 있었다.
자스민 꽃처럼, 연한 보라색을 띠고 있는 페넬로피의 머리카락은 짧게 잘려 있었다.
어깨에 닿지 않는 길이의 머리칼은 끝이 고르지 못해 들쑥날쑥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 엉망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페넬로피의 화려한 이목구비가 짧아진 머리카락에 더 시선을 두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원작에서 빼어난 미인이라 서술되었던 그녀가 아니었는가.
길고 큰 눈매와 자줏빛의 눈동자, 작고 높은 코와 날렵한 턱선이 돋보였다.
르네거의 미모야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페넬로피 역시 그에 비견할 만큼 어여뻐, 그들을 보고 있자니 꼭…….
‘한 폭의 그림 같네.’
카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깊이 불쾌해졌기 때문이다.
후우. 그녀는 한숨을 뱉으며 이마를 짚었다.
[그래. 저 여자다. 데이펜의 수장.]
어느새 카리나의 등을 타고 올라온 히론이 말했다.
“알고 있어.”
짧게 대꾸한 카리나는 다시금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우직하게 서 있는 르네거, 그리고 그런 그의 팔을 잡고 있는 페넬로피.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 큰 불쾌함이 찾아왔다. 카리나는 눈살을 더욱 찌푸렸다.
[저, 저것 보아라. 손을 잡고 있지 않느냐! 내 이것들을……!]
히론은 서로 손을 잡은 그들을 바라보며 크게 아가리를 벌렸다.
하지만 곧, 카리나의 눈치를 살핀다.
[……이러지 말라 했지. 자중하겠다. 화내지 말아다오.]
그는 파르르 떨던 꼬리를 숨기며 고개를 파묻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카리나는 일말의 미동도 없었다.
그저 르네거와 페넬로피를 바라볼 뿐. 맞잡고 있는 손을 바라볼 뿐.
“흐음…….”
카리나는 턱을 치켜들었다. 시선을 비스듬하게 내리깔며, 손으로 목덜미를 더듬는다.
“나도 좀 짜증이 나네.”
툭, 툭.
그녀는 목의 상처를 쓰다듬으며 무심히 입을 열었다.
“내가 쓰러져 있던 삼 일간 방 밖으로 나간 적 있어?”
[그러진 않았다. 아무래도 라템 놈들의 공간이다 보니 쉽게 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
목덜미를 더듬던 그녀는 곧 손을 내려 창틀을 짚었다.
다시금 바라본다. 르네거와 페넬로피의 모습을.
왜?
불과 한 시간 전만 하여도 나의 손이 닿아 있던 그가 아니었는가.
한데, 왜?
왜 내가 아닌 다른 이를…….
그녀는 창틀을 세게 움켜쥐었다. 핏줄이 올라온 하얀 손등은 그녀의 언짢은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 주고 있었다.
“히론.”
그녀의 입술이 보란 듯이 치켜 올라갔다. 비틀린 입매가 도드라진다.
“산책이나 할까?”
촤악-
그녀의 등 뒤로 검은 날개가 뽑혀져 나왔다.
* * *
신입 신관들과 헤어진 후, 르네거는 빠른 걸음으로 광장을 벗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저를 쳐다보는 신관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경외, 감탄, 그리고 동경…….
과거에는 저 시선들에 어떠한 책임감을 느꼈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그저…….
후우.
르네거는 한숨을 뱉으며 머리를 헝클었다.
-그럼 왜 라템은 아포칼리타의 신자들을 죽이는 거야?
-왜 라템은 같은 신을 믿는 인간들을 죽이는 걸까?
-성검 역시 마찬가지야. 마치 흡혈귀처럼, 주인에게 달라붙어 죽을 때까지 생명력을 빨아들이지.
카리나와의 대화가 귓전을 떠나지 않았다. 뇌리를 잠식한 그녀의 말은 그의 생각과 신념과 인생을 모두 다 의심하게 만들었다.
더 이상 라템을 올곧게 믿을 수 없다.
더 이상 신실한 신관의 흉내를 낼 수 없어.
더 이상, 나는…….
“…….”
르네거는 다시금 주변을 둘러보았다. 힐끗거리는 시선들은 여전하다.
그래.
과거에는 충실한 책임감을 느꼈었으나, 지금은, 지금의 나는.
싫다.
싫어.
저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는 것이, 저들에게 맞춰 주어야 한다는 것이, ‘나’를 버리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너무도 끔찍하고 지겨웠다.
르네거는 걸음을 재촉했다.
“오라버니!”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르네거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돌렸다. 제게로 다가오고 있는 페넬로피가 보였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는 거야? 수장이 불렀어?”
“아니, 그건 아니야.”
“그럼 나랑 얘기 좀 해.”
페넬로피는 르네거의 팔을 붙잡았다. 르네거는 난처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대답했다.
“다음에 하자.”
“다음?”
하. 페넬로피는 코웃음을 쳤다.
“삼 일을 기다렸어.”
“…….“
“오늘도 날 피하려는 생각이라면, 절대 그러지 못할 거라고 말할 거야.”
르네거는 미간을 좁혔다. 다시 주변을 둘러본다. 저와 페넬로피를 바라보고 있는 신관들이 보였다.
페넬로피가 아무리 가족처럼 가까운 동생이라 해도, 그녀는 이제 데이펜 일족의 수장이었다.
그런 그녀를 자신이 내치는 꼴은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분명 말이 나올 테니까.
“……가자.”
지겨워.
르네거는 답답한 가슴을 애써 억누르며 발을 틀었다.
그들이 향한 곳은 과거 종종 함께 있던 장소, 별관의 작은 후원이었다.
르네거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1층, 2층, 층을 세며 카리나가 있을 방의 창문을 바라본다.
창문은 열려 있었으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치료를 마친 후 피곤하다는 말을 했으니 지금쯤 자고 있겠지.
르네거는 카리나가 보기 전에 페넬로피와의 대화를 빠르게 마무리하고 싶었다. 페넬로피를 바라본다.
“그래.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야?”
“……지금 그게 할 말이야?”
페넬로피는 두 주먹을 바르쥐었다.
“자그마치 십오 년이야. 오라버니와 나는 십오 년 동안 함께했어. 비록 일족이 다르다 해도, 우리는 그 누구보다 오랜 시간을 보냈어. 알잖아, 오라버니도. 내가 얼마나 오라버 니를 따랐는지.”
……모를 리가 있겠는가.
페넬로피와 르네거는, 기억이 나지 않는 아주 오래전부터 함께였다.
각기 느닷없이 나타난 존재였던 그들은 서로 비슷한 점이 매우 많았다. 그렇기에 더더욱 ‘가족’과도 같은 결합으로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르네거도 페넬로피를 완전히 내칠 수 없는 것이었건만.
페넬로피는 르네거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팔을 붙잡는다. 애걸하듯 매달린다.
“내가 산에서 놀다 절벽 밑으로 떨어졌을 때 기억해?”
그녀는 애써 입술을 들어 올렸다. 꾸며 낸 미소를 걸며 르네거를 더 세게 붙잡는다.
“오라버니가 날 찾아와 줬잖아. 모두 내가 죽었다고 했는데도, 오라버니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몇 날 며칠을 찾아 줬잖아. 그래서 내가 이렇게 살아 있잖아.”
“…….”
“나도 그랬어. 오라버니의 생사를 확인하려고, 온 힘을 다했어. 그 지긋지긋한 수장 자리도 떠맡고! 오라버니를 찾으려고 안간힘을 다 썼어.”
그녀는 울고 있지 않았지만, 음성은 지극히도 축축했다.
“그래서, 이렇게 살아 있는 모습을 보게 됐는데…….”
페넬로피의 손아귀에 바싹 힘이 들어갔다.
“대체 어떻게, 아포칼리타를 비호할 수 있어?”
또다시 같은 이야기다. 르네거는 크게 한숨을 토해냈다. 그러나 페넬로피는 멈추지 않았다.
“저 아포칼리타가 죽인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데. 내 유모도, 친구도, 동료도 죽였어. 모두 다! 그런데…….”
그녀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파르르 떨리는 어깨가 보였다. 앙상해진 날개뼈가 옷 위로 드러났다.
“정말 어떻게, 오라버니가 그럴 수 있어?”
그녀의 손에 힘이 풀렸다. 툭 떨어진 손은 허공을 배회하다 이내 낙화했다.
그런 페넬로피를 가만히 바라보던 르네거는,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돌렸다.
숨을 들이켠다. 들끓는 마음을 진 정시키고자 노력한다.
“나 역시.”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 역시 네가 보고 싶었어.”
페넬로피의 고개가 들어 올려졌다. 르네거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쿠히란에서, 죽기 직전에 가장 먼저 생각난 게 너였어, 페넬로피. 내가 없으면 네가 울지 않을까, 내가 죽으면 너는 어떻게 살아갈까, 그런 걱정이 가득했어.”
“오라버니.”
“하지만 한편으로는 받아들여야 했지. 신을 위한 전투에서 죽는 건, 명예로운 일이었으니까.”
르네거는 시선을 돌렸다. 붉어진 눈가가 지극히도 습했다.
“그렇게 죽을 뻔한 순간에…….”
“…….”
“아포칼리타가 나를 살려 준 거야.”
르네거의 가슴이 부풀어졌다. 들이찬 숨이 토해지듯 흘러나왔다.
“그래. 알아. 신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버려야 하는 우리의 사명을. 원래라면 아포칼리타의 도움을 거부하고 죽었어야 했겠지. 하지만. 하지만 나는.”
“…….”
“살고 싶었어.”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살아남아서, 다시 살아가고 싶었어. 너를 만나고 수장님을 만나고 라템의 모든 신관들을 다시 만나고 싶었어. 그렇게, 죽고 싶지 않았어.”
처음 카리나의 집에서 눈을 떴을 때, 르네거는 살아남은 것에 대한 기쁨을 오롯이 느끼지 못했다. 죄책감이 앞서 들었기 때문이다.
신관이란 응당 목숨을 바쳐 신을 섬겨야 하거늘. 그 목숨을 가히 여긴 자신이 한심하게도 느껴졌다.
하지만 그러해도 르네거는, 살고 싶었다. 살아남고 싶었다.
“그래서 아포칼리타에게 목숨을 구걸했어.”
페넬로피의 숨이 일순간 멎었다. 혼란스러움이 그녀의 얼굴을 뒤덮었다.
“제발 살려 달라고, 날 보호해 달라고, 그렇게 애걸했어. 그래서? 난 살아났지. 이렇게 살아 있어. 그분이 없었다면 나는 죽었을 거야.”
“……오라버니.”
“너는 내가 살아 있길 바랐지. 그래서 어때? 아포칼리타에게 목숨을 구걸한 대가로 살아난 나를 보는 게.”
페넬로피는 말이 없었다. 그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볼 뿐. 짧아진 머리카락이 뺨에 닿아 있다.
식은땀과 얽혀 있는 머리카락은 그녀의 음습하고도 복잡한 심정을 대변해 주는 듯싶었다.
얼마의 침묵이 지나갔을까. 페넬로피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죽으면.”
그녀는 다시금 눈을 들어 올렸다. 르네거를 바라본다.
“죽으면 신의 곁으로 갈 수 있잖아. 그것만 바라고 살아왔잖아. 그런데 어떻게…….”
서서히 깨지는 침묵은, 외면하려 했지만 외면하지 못한 페넬로피의 진심이 드러나게 만들었다.
“어떻게 아포칼리타에게 목숨을 구걸할 수 있어? 대체…… 어떻게……. 왜.”
일전보다 더 동요하고 있는 음성이었다. 르네거가 아포칼리타에게 홀렸다는 말을 했을 때보다, 그녀는 지금 더 슬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르네거는 어깨에 주었던 긴장을 풀며 작게 웃었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죽었어야 했을까?”
페넬로피의 자줏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가, 죽었어야 됐을까?”
그러나 페넬로피는 대답이 없다.
그 침묵 속, 르네거는 페넬로피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었다.
페넬로피 데이펜.
가족 같은 존재.
……아니.
“너도 다를 게 없구나.”
다른 이들과 다를 것이 없는 존재.
페넬로피와 간신히 손가락만 얽혀 있는 손을 내려다본다.
……이제는.
‘이렇게 닿고 싶지 않아.’
르네거는 그녀의 손을 무심하게도 뿌리쳤다.
“오라버니!”
페넬로피는 황급히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휘이잉-
세차게 불어온 바람이 그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페넬로피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르네거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로 간의 거리가 벌어졌다. 더 이상 가깝지 않았다.
“오라버…….”
역시 말은 이어지지 못한다. 이는 페넬로피가 말을 멈췄기 때문이다.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새까만 날개가 그녀의 시야를 뒤덮었다. 피처럼 붉은 드레스가 그녀의 시선을 빼앗았다. 뱀의 것처럼 찢어진 눈동자가 시선을 붙들었다.
이건 분명…….
“이거 실례.”
카리나 아포칼리타.
“난 누가 내 물건 만지는 걸 딱 질색해서 말이야.”
페넬로피의 시선에 켜켜이 분노가 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