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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45화 (45/135)

45화

“난 누가 내 물건 만지는 걸 딱 질색해서 말이야.”

쏴아아.

다시금 바람이 불어왔다.

돌풍처럼 세차게 밀려온 바람은 우두커니 서 있던 페넬로피의 잔영을 흔들리게 만들었다. 그녀는 커다란 눈을 수차례 깜빡였다.

눈앞의 아포칼리타를 바라본다.

잊을 수 없는 얼굴. 잊어서는 안 되는 얼굴.

“……카리나 아포칼리타.”

‘그녀’였다.

신마전쟁 때 수백의 라템을 죽였던 이. 나의 동료를, 친우를 죽였던 이. 무자비한 시선으로 어떠한 감정도 내보이지 않던, 괴물.

페넬로피는 두 주먹을 바르쥐었다. 섬뜩하리만큼 매서워진 눈이 카리나를 향했다.

“어머, 너도 나를 알고 있니?”

카리나는 흥미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내가 유명 인사이기는 한가 보네. 날 보자마자 이름을 말하다니 말이야.”

그녀는 생긋 웃으며 말을 마쳤다.

얼핏 보면 페넬로피의 기세를 전혀 개의치 않아 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그것이 아니었다.

‘아, 죽겠네.’

카리나는 배어 나오는 식은땀을 옷자락에 닦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원작 주인공들과는 엮이지 않으려 했는데.’

느닷없이 짜증이 나가지곤. 참지 못해 버렸다.

이게 다 르네거 때문이다. 카리나는 저를 바라보고 있는 르네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카리나.”

그는 카리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직 몸도 회복되지 않았을 텐데요.”

카리나의 팔을 붙잡는다. 하지만 그의 손아귀에는 힘이 없었다. 그저 카리나를 조금 붙들어 놓는 정도일 뿐.

카리나는 그런 르네거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로 날아올랐을 적, 카리나는 르네거의 자흔만을 좋았다.

그리고 곧, 르네거와 페넬로피가 나누는 대화를 엿들을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죽었어야 했을까?

-너도 다를 게 없구나.

그 말을 할 때에 표정이 어떠했던가.

마치 소멸돼 버리는 것처럼 희미했던 웃음, 흐르진 않았으나 말라붙어 남아 있던 눈물.

그렇게도 서글픈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었던가.

그 모습이 르네거의 본모습인지, 아니면 지금 눈앞의 얼굴이 본모습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카리나는 제 팔을 잡고 있는 그의 손등에 손을 얹었다.

“네가 보여서.”

“……네?”

“네가 보고 싶어서 나왔어.”

르네거의 입이 벌어졌다. 곧이어 양 뺨이 붉게 물들어 가는 것이 보였다.

귓불까지 차오른 발간 열은 그의 얼굴을 무너지게 만들었다. 그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카리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때였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달려온 페넬로피가 르네거의 손을 잡아당겼다.

“지금 내 눈앞에서 뭘 하고 있는 거냐고!”

힘을 주지 않고 있던 르네거의 몸은 뒤로 밀렸다.

페넬로피는 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카리나와 마주 섰다. 그녀의 손에 새빨간 힘이 맺히기 시작했다.

“오라버니가 죽이지 못한다면 내가 할게.”

“페넬로피!”

르네거는 빠르게 카리나를 잡아당겼다. 카리나의 앞을 막아선다.

“그만해.”

그는 목전의 페넬로피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카리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는 사실을.

나쁘지 않은데.

카리나는 간지러운 마음을 느끼며 얕게 웃었다.

“비켜.”

“그만두라고 말했어.”

“비키라고 말했잖아!”

쾅!

페넬로피의 두 손에서 불꽃이 피어 올랐다.

일렁이던 불꽃은 곧 형상을 갖춰 한 자루의 검으로 변모했다.

전쟁의 여신의 딸이자 불의 정령왕과 계약한 이다운 모습이었다.

흐음. 이걸 어쩐다.

카리나는 팔짱을 낀 채 페넬로피와 르네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여기서 전력을 다해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고……. 아니, 애초에 지금 몸 상태라면 싸우기도 힘들 텐데.

카리나는 난감한 기색을 애써 감췄다.

“난 데이펜의 수장이야. 내 눈앞에 아포칼리타가 있는 이상, 곱게 보내 줄 수는 없어.”

그녀는 카리나를 향해 칼끝을 들이밀었다.

쿵!

날아온 불꽃은 카리나의 턱 끝에 다다랐다. 그러나.

“그만두라고 말했어.”

페넬로피의 힘을 막은 건 르네거였다.

그는 화상을 입은 손바닥을 접어 말며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

“지금 그만두지 않는다면.”

휘잉.

신관복의 끝자락이 양껏 흩날렸다.

“난 널 공격할 수밖에 없어.”

그 역시 성검을 빼 들었다. 검의 끝을 페넬로피에게 겨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태도였다.

페넬로피는 입을 뻐끔거리며 숨을 멈췄다.

르네거와, 카리나를 차례대로 바라본다.

지금이라도 당장 저를 공격할 수 있을 정도로 흉흉한 기색을 띠고 있는 르네거와, 그런 르네거를 보며 흡족하게 웃고 있는 아포칼리타를 바라본다.

“지금 대체…….”

페넬로피는 이마를 감싸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우웅.

불의 검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금 나를 공격하려 한 거지?”

그녀는 전에 없이 허망한 표정으로 르네거를 바라보았다.

“지금, 나를 죽이려고 한 거지?”

그런 게 아니야, 라고 말을 하고 싶었으나 르네거는 그러하지 않았다.

사실 그런 게 맞을 수도 있었으므로.

정말 페넬로피가 카리나를 공격했다면 자신은…….

‘페넬로피를 베었을 수도 있다.’

르네거는 입술을 꽉 깨물며 성검을 더 세게 바르쥐었다.

그런 르네거의 생각을 알아챈 것일까. 어쩌면 확신한 것이 아닐까. 페넬로피는 허무한 실소를 흘렸다.

“좋아해?”

르네거의 두 눈이 커졌다.

“저 아포칼리타를 좋아하는 거야? 그래서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거고? 그래서 죽이지 못한 거고?”

그는 황급히 카리나를 돌아보았다. 카리나는 미동 없이 서 있었다.

르네거는 입을 벌렸다 다물리기를 반복했다. 혀끝에 맴도는 말이 자리를 찾지 못하고 사라졌다.

이때였다.

“르네거!”

스벤의 외침이 들려왔다. 모두가 함께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스벤을 포함한 신관 수십 명이 다 함께 뛰어오고 있었다.

“왜 신관들이 한꺼번에…….”

르네거는 눈살을 찌푸리다, 이내 카리나를 향해 말을 돌렸다.

“방에서 곧장 내려오신 게 아닙니까?”

“응.”

카리나는 가볍게 대꾸했다.

“한 바퀴 돌았지. 오랜만에 날개도 편 겸.”

이런.

르네거는 난감한 웃음을 흘렸다.

“르네거! 이게 무슨 짓이냐! 당장 검을 내려놓지 못하겠느냐!”

가까이 다가온 스벤이 기겁하며 외쳤다. 르네거는 검을 든 손을 머뭇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르네거.”

카리나의 말이었다.

“수장의 말을 따라. 지금은 그래야지.”

그녀는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야 나중에 죽여도 네가 의심 받지 않을 테니까.”

이런 상황에 농담을 던지는 카리나를 보며, 르네거는 피식 실소를 뱉었다. 검을 집어넣는다.

“당신은…….”

스벤은 카리나와 마주 섰다. 그의 시선이 카리나의 얼굴에 닿았다.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본다.

“안녕?”

카리나는 그런 스벤을 향해 생긋 웃음을 내보였다.

“오랜만에 보네. 잘 지냈니?”

전혀 무탈한 안부에, 스벤은 꺽꺽 숨을 들이켜며 손발을 바르르 떨었다.

지금 이 아포칼리타가 무어라 하는 것인가. 우리의 일족 수백 명을 죽인 이 아포칼리타가, 지금 내 눈앞에서……!

스벤은 주먹을 바르쥐었다. 가파진 숨을 뱉으며 아드득 이를 간다.

“숙소로 돌아가시오.”

“벌써?”

“돌아가란 말을 하지 않았소!”

어머.

카리나는 입을 가리며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인간이 내게 화를 내기도 하고 말이야.”

그녀는 미간을 사붓 찌푸렸다.

“좀 짜증 나네.”

촤악!

카리나는 날개를 활짝 펼쳤다.

칠흑같이 새까만 날개가 보란 듯이 허공을 누볐다. 검은 깃털이 스벤의 얼굴에 닿았다. 그는 기겁하며 깃털을 떨쳐 냈다.

“내가 참아 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길 바라. 그렇지 않았다면 이곳의 인간들은 모두 다 죽었을 테니.”

카리나는 페넬로피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나 페넬로피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그녀는 피처럼 붉어진 눈으로 카리나를 쏘아보았다.

역시, 피폐물의 여주인공답다니까.

카리나는 제 팔에 소름이 돋은 것을 모른 척하며 날갯짓을 했다.

“먼저 돌아가 있을게, 르네거.”

여전히 페넬로피를 바라보며 말을 한 그녀는, 이내 하늘 높이 도약했다. 그녀가 서 있던 곳에 남아 있는 것은 오직 검은 깃털뿐이었다.

“저, 저 경박한……!”

스벤은 뒷목을 잡으며 몸을 떨었다. 당장이라도 저 아포칼리타를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이 치달았다.

하지만.

인정해야 했다.

자신은 저 아포칼리타에게 겁을 먹었다는 것을. 감히 덤빌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을. 분노에 차 있지만 객기를 부릴 뿐, 더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스벤은 다시 한번 어금니를 꽉 깨물며 숨을 몰아쉬었다. 르네거를 바라본다.

“르네거.”

카리나의 흔적을 좇으며 멍하니 서 있던 르네거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스벤을 내려다보았다.

“따라오거라. 건히 할 말이 있으니.”

그러나 르네거의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르네거는 그제야 페넬로피를 바라보았다. 페넬로피 역시 그를 바라본다.

페넬로피는, 르네거가 그 누구보다 가장 아꼈던 동생이다.

가족보다 더 가까운 존재. 내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아껴 주고 싶었던 아이.

……하지만.

-죽으면 신께 갈 수 있잖아. 그것만 바라고 살아왔잖아.

-어떻게 아포칼리타에게 목숨을 구걸할 수 있어?

페넬로피 역시도, 나의 목숨을 걱정해 주지 않는 것을.

참으로 얄궂지 않은가.

이십여 년을 함께한 일족들이지만, 나의 생명을 걱정해 주지 않는다.

나의 안위를 걱정해 주는 것은 주적이라 생각했던 아포칼리타, 그녀뿐.

르네거는 설핏하게 조소했다.

이제야 마음이 바로 선 듯한 느낌이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수장님을 따라가겠습니다.”

“오라버니.”

페넬로피가 르네거의 소매를 붙잡았다.

“나와 더 할 이야기가 있잖아.”

그녀의 눈망울은 축축했다.

언제 검을 들고 화를 내질렀냐는 듯, 그녀는 영락없는 열여덟 살의 어린아이, 그뿐이었다.

그러나.

“아니.”

르네거는 그런 페넬로피의 손을 야멸차게 뿌리쳤다.

“앞으로도 없을 거야.”

그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카리나와의 맹약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손을.

……이것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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