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한바탕하고 왔구나.]
창틀에 앉아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히론이 말했다. 카리나는 펼쳤던 날개를 접으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한바탕은 무슨. 그랬다면 누구 하나는 죽었을 거야.”
[더 이상 인간은 죽이지 않겠다 하지 않았느냐?]
“저 인간들은 예외.”
카리나는 짧게 대꾸한 후 침대에 널브러지듯 누웠다.
히론의 말이 이어 들려왔지만 카리나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허공만 바라볼 뿐.
페넬로피와 르네거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짜증이 올라왔던 그녀는 곧장 르네거에게로 향했다. 그들 사이를 갈라놓으면 짜증이 덜어질 것 같았으므로.
하지만 결과는 어떠한가? 일전보다 더 불쾌해진 마음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후우.
카리나는 아랫입술을 씹으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페넬로피를 떠올린다.
어떠한 결의와 어떠한 경건함이 공존해 있던 그녀의 눈을 떠올린다.
그녀의 그러한 감정은 방어적인 태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지키겠다는 행동.
데이펜의 일족이라든가, 평화라든가, 저를 아껴 주는 친애하는 인간이라든가…….
이를 짐작하니, 카리나는 지독히도 서러워졌다.
페넬로피가 지키려는 것은 자신이 일평생 가져 보지 못했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참 우습지.’
카리나는 다시금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애초에 페넬로피와 자신은 역할부터 다른 인물이라고, 그녀는 이 세계의 주인공이지만 자신은 그저 그런 악역일 뿐이라고, 그렇게 자위해 보려 했지만 울컥울컥 치미는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페넬로피와 자신은, 마치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사는 곳은 평화와 행복과 안정이 가득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살육과 복수와 전쟁만이 즐비해 있다.
그녀는 종래에 해피 엔딩을 맞이할 테지만, 나는…….
자기 파괴적인 결말뿐이 남아 있지 않지.
“……정말 화가 나네.”
원작의 주인공과 악역 조연 간의 괴리는 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카리나는 자꾸만 비교하게 되었다.
왜 나는 이번 생에서도 행복하지 못하는 걸까.
왜 나는 행복할 수 없는 걸까.
그녀는 생각을 씹어 삼키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래서, 내 말을 듣고 있느냐?]
이제껏 실컷 떠들고 있던 히론이 고개를 쭉 내밀며 말했다. 카리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말해 봐. 뭐라고?”
히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데이펜의 수장을 조심하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얘나 쟤나 모두 다 페넬로피 생각뿐이구나. 카리나는 미간을 좁히며 혀를 찼다.
[저 계집이 전쟁의 여신의 딸이라는 건 왜 말해 주지 않은 것이냐?]
“깜빡했어.”
별로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고. 카리나는 말을 덧붙였다.
[쯧. 귀찮게 됐어. 그러니 조심하란 말이다. 오늘처럼 괜히 얽히지 말고.]
평소라면 무던하게 넘겼을 법한 잔소리였지만, 지금의 카리나는 평소 같지 않은 터였다. 그녀는 다소 날카로워진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만큼 페넬로피가 강한 거야?”
[뭐?]
히론은 기가 막히다는 양 코웃음을 쳤다.
[먼 미래에는 어찌 될지 모르나, 지금은 아니다. 약한 인간일 뿐이야. 하지만 네게는 다르지.]
“그게 무슨 말이야?”
카리나는 자리를 잡았다. 히론과 마주 본다.
[네 모체를 잊은 것이냐? 넌 전쟁의 여신의 저주를 받은 메두사의 몸에서 나온 이이다.]
“그래서?”
[전쟁의 여신을 어미로 둔 이의 힘이 네게 어떻게 작용할지 몰라서 묻는 것이냐?]
“당연히 모르니까 물어보지.”
[……치명적일 것이다. 네 회복력도 들지 않을 수 있어. 지금의 너는 데이펜의 수장을 이기지 못해.]
카리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원작에서도 카리나는 쉽게 죽어 버렸지. 페넬로피와 맞닥뜨리자마자 말이야.
페넬로피가 단순히 강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는데……. 더 깊은 속사정이 있던 모양이었다. 카리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물론 르네거 놈이라면 다르겠지만 말이다.]
히론은 그런 카리나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너를 지키려 눈이 뒤집히는 꼴을 보고 있자니 꽤 즐거워지더구나.]
그는 슬금슬금 기어와 카리나의 손등에 꼬리를 대었다.
[그래서 말인데, 정말 르네거 놈을 데리고 갈 생각이 없는 것이냐?]
카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히론을 내려다볼 뿐.
생각해 본다.
불과 얼마 전, 르네거를 처음 보았던 때를.
그때에 그를 구했던 것은 페넬로피의 표적에 자신이 들어가길 원치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결과는 어떠한가?
페넬로피와 대척점에 서 버렸다. 즉, 그녀의 표적에 이미 내가 깊숙이 들어가 버렸다는 뜻이다.
거기에 죽었어야 할 르네거는 죽지 않고 살아 있어 버리고, 자일은 내게 꽂혀 호시탐탐 나를 노리고 있고, 페넬로피와도 이러한 관계가 되어 버렸으니…….
‘원작은 개가 가져갔네.’
하아.
카리나는 숨을 토하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뒷목이 뻐근했다.
‘이젠 뭘 해도 괜찮지 않을까.’
과거, 원작을 읽으며 페넬로피를 마음 깊이 응원했던 그녀였지만 그것은 과거일 뿐이었다.
지금의 카리나는 페넬로피가 싫었다. 정확히 말하면, 페넬로피가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질투가 났고 질투가 나기 때문에 그녀가 싫었다.
그러므로.
‘하나쯤은 빼앗아도 괜찮겠지.’
아니, 빼앗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원작에서 르네거는 죽어 페넬로피의 곁에 없지 않은가.
지금은 그가 죽는 게 아니라 떠나는 것뿐. 카리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카리나는 젖혔던 고개를 숙였다.
“르네거가 오면.”
그녀는 한 음절씩 힘을 주어 가며 말했다.
“함께 나가자는 말을 할게.”
그녀의 눈 안에는 짙은 결의가 담겨 있었다. 페넬로피가 보여 주었던 것과 다를 것이 없는.
* * *
접견실에 다다른 르네거는, 스벤의 안내를 받기도 전에 소파에 스러지듯 몸을 앉혔다.
그에 스벤은 불쾌한 기색을 표했으나 르네거는 개의치 않았다. 작금 스벤의 기분보다 제 답답함의 해갈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면담을 마친 지 세 시간도 지나지 않았습니다만.”
르네거는 스벤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잠시 멈칫거리던 스벤은, 이내 심호흡을 하며 르네거와 맞은 편에 몸을 앉혔다.
“긴히 할 말이 있어 너를 불렀다.”
“아까 말씀하시지 않고요.”
“르네거.”
스벤의 손이 오므라드는 것이 보였다. 르네거는 설핏 조소했다.
과거에는 스벤의 말 한 마디에 복종하고 두 마디에 무릎을 꿇었던 그였다.
스벤을 존경했기 때문이다. 거대한 라템 일족을 책임지고 있는 이. 우러러보아도 모자람이 없노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의 르네거에게 있어 스벤은 그저 카리나와의 만남을 방해하는 장애물, 그리고 자신의 뜻을 억지로 관철시키려는 독재자. 그뿐이었다.
그러니 이런 여유로운 태도가 나오는 것이리라. 르네거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며 대답했다.
“말씀하십시오.”
스벤은 다시금 숨을 들이켰다.
“뱀의 여자와 얼마나 가까워졌느냐?”
르네거의 눈이 가늘어졌다.
또다시 카리나에 대한 이야기다.
예상은 하고 있었으나, 맞닥뜨리게 되니 여간 불쾌한 것이 아니었다.
과거 그녀는 인간을 죽였으나, 그것은 스스로의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더 이상의 살육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리 말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그녀는 아포칼리타가 아니었다. 죄를 짊어진 탄생의 족쇄를 이제야 끊어 버린 자유인일 뿐.
이런 카리나인데, 왜 이렇게도 다들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것일까.
페넬로피도, 스벤도.
르네거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저의 목숨을 구해 주신 분이니만큼, 최대한으로 존중하고자 합니다.”
스벤은 침음을 흘렸다. 그러곤 벌떡 몸을 일으켰다. 뒷짐을 지며 창가 쪽으로 다가간다.
어느새 노을이 져, 창밖은 붉은 기운이 가득했다.
어슴푸레한 밤의 기운과 섞여 있는 낮의 빛은 오묘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선과 악처럼.
“성검과 네가 그리 변한 것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으리라 생각이 된다.”
르네거는 무의식중에 제 머리에 손을 얹었다. 검게 변해 버린 머리카락을 더듬는다.
“그래……. 모든 것은 바다의 신에서부터 시작한다. 너는 바다신의 성물을 쥘 수 있는 후손이니,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겠다.”
르네거는 스벤이 할 말을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바다신이 반려를 되살리기 위해 전쟁의 여신과 거래를 했으나 전쟁의 여신이 배신을 하여 바닷속으로 몸을 감춰 버렸다고.
히론에게 이야기를 들었기에, 반복해 내용을 듣는 것은 필요가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바다의 신은 저주에 걸렸다.”
스벤은 르네거의 예상과 전혀 다른 말을 내뱉었다. 르네거의 눈이 다소 커졌다.
“고대 마물, 그러니까 아포칼리타의 선조가 되는 사악한 존재들이 바다의 신에게 저주를 내렸다는 말이다.”
저주라니. 이는 르네거가 알고 있는 것과 완전히 결이 다른 이야기였다.
“바다신의 힘을 시기한 고대 마물들은 간악한 꾀를 냈다. 바로 바다신을 사랑에 빠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힘을 모아 최고의 미인을 만들었고, 바다신을 유혹하게 만들었다.”
들을수록 혼란스러워지는 내용이었다. 르네거는 묵묵히 경청했다.
“바다신은 그들의 꾀를 알아채지 못했고, 결국 그 존재를 사랑하게 되었다.”
“…….”
“그러하여, 어찌 되었을 것 같으냐?”
르네거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스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낮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바다신이 갑옷을 벗고 있을 때에, 그 존재는 검을 들어 바다신의 가슴을 꿰뚫었다. 기습을 당한 바다신은 쉬이 반격하지 못했지. 그의 울부짖음은 하늘을 찌를 정도로 커다랬고, 그가 흘리는 피는 바다가 넘치도록 많았다.”
르네거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바르쥐었다.
“그에 이상함을 느끼고 전쟁의 여신이 지상에 내려왔다. 그리고 바다신의 가슴을 꿰뚫은 존재를 발견하고, 즉시 그를 봉인한 후 바다신을 구해 내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바다신은 더 이상 지상에 머무를 수 없을 정도로 큰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회복을 위하여 바다신은 황급히 하늘로 올라가야 했으나, 땅에 남겨진 우리 일족들을 염려했다. 그에 전쟁의 여신이 이르노니…….”
-너의 피가 묻은 이 검을 성물로 내려라. 이것이야말로 신의 것이리니.
르네거는 마른침을 삼켰다.
혼란스러운 정신에 눈앞이 아찔했다. 식은땀이 절로 흘러나왔다.
“하여 우리는 성검을 갖게 되었으나, 신의 힘이 아닌 피가 담겨 있어 불완전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하여 우리는 성검의 주인들을 제물로 바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스벤의 음성에는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씁쓸함, 안타까움, 연민…….
거짓으로 꾸며 낼 수 없는 감정들이 가득했다.
그렇기에 르네거는 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여 이러한 희생을 안타까이 여긴 초대 수장이 전쟁의 여신에게 물었다.”
-바다신의 힘을 온전히 이어받으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그러자 여신께서 말씀하시길.”
스벤은 눈을 들어 올렸다. 탁한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바다신을 농락한 고대 마물을 죽여라. 그녀는 봉인을 풀고 이 세상에 태어날 테니.
그는 르네거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디딜 때마다 그의 뒤편에 걸려 있는 붉은 노을이 불확실하게 흔들렸다.
“그 이름은 메두사.”
이제야 르네거가 아는 익숙한 이름이 나왔건만.
“뱀의 여자. 카리나 아포칼리타다.”
왜 이리도 잔인한 이야기가 되어 버린 것인지.
르네거는 입술을 반쯤 벌린 채 스벤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빛이 담겨 있지 않았다.
“죽여라, 르네거.”
스벤의 뒤편에는 더 이상 노을이 보이지 않았다.
새까매진 밤하늘만 보란 듯이 걸려 있을 뿐.
“그래야 수만 명의 라템이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