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그래야 수만 명의 라템이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
스벤의 접견실을 나온 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르네거는 그때의 상황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무어라 대답을 하고 나왔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그곳을 벗어나기에 급급했을 뿐.
르네거는 무릎 위에 올렸던 손을 말아 쥐었다.
바다의 신이 먼저 메두사를 사랑하고, 전쟁의 여신에게 배신을 당해 바다 깊은 곳으로 숨어 버렸다는 히론의 말과,
고대 마물들이 악의적으로 바다신을 해쳐 그의 힘을 빌릴 수 없게 되었다는 스벤의 말은 서로 상충되는 이야기였다.
무엇이 진실인가?
누구의 말이 거짓인가?
아니, 이 중에 과연 진실이 있기는 한 것인가?
르네거는 깊은숨을 내뱉었다. 시선을 떨어뜨린다. 금이 가 있는 바닥이 보였다.
만약 스벤의 말이 진실이라면, 정말 사실이라면…….
카리나를 죽여야만 바다신의 힘이 회복되고 성검에 깃든 힘이 강해진다는 이야기가 아니던가.
그렇게만 된다면 성검의 주인은 더 이상 죽지 않아도 될 테고, 더 나아가 라템의 일족들도 바다신의 비호를 받아 더 강해질 것이다.
-죽여라, 르네거.
르네거는 다시금 숨을 토해 냈다.
만약, 과거의 자신이었다면 조금의 지체 없이 카리나를 베었을 것이다. 라템을 위하여, 신을 위하여.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나는 카리나를 죽일 수 있는가?
그녀에게 검을 겨눌 수 있는가?
그의 꽉 다물린 턱이 잘게 떨렸다.
나는, 감히 그녀를…….
르네거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혼자 고민해 보았자 나오는 답은 없다. 카리나를 만나야 했다. 만나 그녀에게 물어야 했다. 그녀와 이야기를 해야 했다.
그는 걸음을 재촉했다. 보폭이 넓어진 걸음은 그의 조급한 마음을 증명했다.
그렇게 카리나가 있을 별관 건물에 다다랐을 때 즈음.
르네거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낄 수 있었다.
본디 이곳 별관은 머무는 이들이 없어 인적이 드문 곳이다. 한데 이상하게도 입구에 신관들이 모여 있었다.
설마.
불안함이 앞서 들었다. 르네거는 빠르게 달려갔다.
“르네거?”
그런 그를 반긴 것은 평소 친분이 있던 신관, 사무엘이었다. 르네거는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너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얼굴 좀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더만!”
사무엘은 평소와 다름없는 친절한 얼굴을 하며 르네거에게로 다가왔다.
“머리 색은 무슨 일…… 아니, 아니야. 묻지 않을게. 고생이 많았나 보구나. 얼굴이 말이 아니다. 괜찮은 거야?”
“……괜찮습니다. 한데 무슨 일입니까? 왜 다들 여기 모여 있는 겁니까?”
“에르가 이상한 기운을 느꼈대서. 별관을 안 쓴 지 오래됐잖아. 혹시 몰라 같이 와 봤지.”
이상한 기운이라 하면 분명 카리나를 말하는 것일 테다. 르네거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잖아도 제가 어제 와 봤습니다만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돌아가셔도 됩니다.”
“그래?”
사무엘은 가볍게 대꾸했다. 평소 심각한 상황을 만들지 않는 그의 성정으로 미뤄 보아 이대로 넘어가 줄 수도 있을 듯했다. 하지만.
“에르. 들었어? 르네거는 아무 문제도 없다는데?”
“나랑 장난하냐?”
젠장.
르네거는 성큼성큼 다가오는 에르를 보며 이마를 짚었다.
“이렇게 사악한 힘이 느껴지고 있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고? 네놈의 눈이 제 작동을 안 하는 건 아니고?”
에르는 르네거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이걸 어쩐다. 르네거는 난감함을 미처 감추지 못했다.
“들어가 봐야겠어.”
“안 됩니다!”
르네거의 큰 소리에, 사무엘과 에르 모두 그를 돌아보았다. 개중 에르는 미심쩍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야, 너 왜 그래?”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르네거의 면면을 살폈다.
“너답지 않게 식은땀도 흘리고……. 설마. 저 안의 기운과 네 놈이 상관있는 거냐?”
눈치는 빨라 가지곤.
르네거는 애써 표정을 정돈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무 일 없습니다. 그저 여러분들이 걱정돼서요.”
“걱정? 왜, 네놈이 우리보다 강하다고 뻐기는 거냐?”
“에르. 네 열등감을 르네거에게 풀지는 마.”
“넌 닥쳐.”
에르는 사무엘의 어깨를 툭 밀치며 인상을 찌푸렸다.
“네가 무슨 말을 하든, 우리는 들어갈 거야.”
“그럼 같이 들어가시지요.”
“왜, 우리가 당할 것 같냐? 너보다 약하니까?”
“에르.”
사무엘은 에르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르네거를 향해 멋쩍게 웃어 보인다.
“미안해, 르네거. 얘가 잠을 못 자서 그런지 오늘따라 예민하네. 괜찮다면 같이 들어갈까? 우리도 좀 걱정이 돼서 말이야.”
“허락해 주신다면 함께 하겠습니다.”
“너는 정말 말도 예쁘게 하는구나. 그에 비해 에르는……. 넌 좀 배워라. 나이도 한참 어린 르네거한테 질투하지 말고.”
“시끄러워.”
탁.
에르는 사무엘의 손을 뿌리치며 앞서 걸어갔다. 사무엘은 여전히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에르의 뒤를 졸졸 쫓아갔다.
사무엘과 에르. 대신전에 온 이후 말을 트고 친분을 쌓았던 이들.
오랜 시간 수련한 이들이지만, 다행히도 저들은 치유력을 중점으로 하는 신관들이었기 때문에 전투에는 젬병이었다.
저 둘 정도는 어떻게 제압할 수 있을 테지.
기절이라도 시켜 둔 후 나중에 둘러대야겠어. 르네거는 그리 생각하며 그들의 걸음을 따라 쫓아갔다.
그리고 별관의 문을 열었을 때.
훅, 풍겨져 오는 강한 기운에 르네거는 자신도 모르게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살펴보니 사무엘은 구석에서 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르네거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기운이었기에, 그는 제법 온전한 상태로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빠르게 에르의 흔적을 찾는다.
“……르네거.”
멀지 않은 곳에 에르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르네거는 그에게로 뛰어갔다.
“너 아무래도 눈알을 빼내서 씻어야겠다.”
에르의 하얀 얼굴은 더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래.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가 가리키는 방향, 그곳에는.
“……카리나.”
그녀가 서 있었으므로.
* * *
이건 뭐지.
카리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히론과의 대화를 마치고, 결심을 세운 카리나는 그때부터 창밖을 내다보며 르네거를 기다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저 멀리 르네거가 보였을 때 즈음 그녀는 마중을 나갈 생각으로 방에서 빠져나왔다.
그 과정에서 르네거를 보다 잘 구슬리기 위해 맹약에 얽힌 힘을 세게 방출한 것뿐이건만…….
‘저걸 어쩌지.’
함께 들어 온 신관 한 명은 쓰러져 있고, 다른 한 명은 기절 직전이다.
카리나는 슬금슬금 르네거의 눈치를 살폈다.
“미안. 다른 인간들과 함께 올 줄은 몰랐어서.”
그녀의 말에, 르네거는 깜짝 놀라며 빠르게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미리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그건 그래.”
카리나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 올렸다.
카리나와 르네거 사이에 흐르는 기류는 노곤하기 짝이 없었다. 별관 전체에 퍼져 있는 살기 어린 기운과는 어울리지 않게.
그렇기에,
“뭐, 뭐야?”
에르는 당황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처럼 벌벌 떨리는 다리를 겨우 세우며 숨을 들이켰다.
“르, 르네거. 저, 저 아포칼리타와 아는 사이야? 지금 뭘 하는……!”
이런.
르네거는 이마를 짚었다.
원래 계획은 사무엘과 에르가 눈치채지 못하게 기절시키는 것이었으나,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죽여야 하나.’
흠칫.
르네거는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생각에 스스로 놀라며 어깨를 움츠렸다.
‘일단 기절만 시키자.’
그는 허리에 차고 있던 검집을 빼 들었다. 이것으로 에르를 가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나쁜 짓은 하면 안 되지.”
어느새 다가온 카리나가 르네거의 손목을 붙잡았다.
“넌 신관이잖니.”
그녀는 르네거를 잡아끌어 뒤로 밀쳤다. 그리고 에르와 마주 섰다.
“안녕?”
에르는 입을 쩍 벌린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포칼리타와 마주해 오는 두려움 때문일까, 아니면 카리나에게 넋이 나간 것일까.
어느 쪽이건, 르네거는 큰 불쾌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다소 날카로워진 시선으로 에르를 돌아보았다.
“아, 아포칼리타가 왜 이곳에……!”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 뭐, 뭐가 됐든 네가 알 게 아니지만 말이야.”
카리나는 그리 말을 하며 손을 뻗었다. 무방비 상태인 에르의 이마를 감싼다.
“별로 이 능력을 쓰고 싶지는 않았는데.”
카리나의 동공이 잘게 떨렸다. 홍채를 덮을 정도로 커다래졌던 동공은, 이내 실처럼 얇아졌다.
“어쩔 수 없지, 뭐.”
파앗-!
그녀의 눈동자가 발광하듯 빛이 났다. 뜨거운 열이 느껴졌다. 당장 눈을 감고 싶을 정도로 엄청난 열기였으나, 카리나는 꿋꿋하게 참아 냈다.
드래곤 피어.
수년 전 그 능력을 얻은 카리나는 아비의 힘을 결합시켜 발전시켰다.
그렇게 완성된 드래곤 피어에는 상대를 무력화시키는 것뿐 아니라 다른 능력까지 쓸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상대의 기억을 지우는 것.
‘이럴 때 유용하단 말이지.’
아프긴 하지만.
카리나는 눈을 뒤집고 쓰러지는 에르를 바라보며 눈을 박박 비볐다.
“무엇을 하신 겁니까?”
느닷없이 쓰러져 버린 에르였기에, 르네거는 놀란 음성으로 물었다. 카리나는 가볍게 대꾸했다.
“기억을 지웠어. 오늘의 일은 기억하지 못할 거야.”
그녀는 눈을 몇 번 더 비비다, 이내 구석에 쓰러져 있는 사무엘을 가리켰다.
“저 인간의 기억도 지워야겠지?”
사무엘에게로 다가가는 카리나의 뒤를 쫓으며, 르네거는 다급히 물었다.
“힘에 부치신 것 아닙니까?”
찰나에 인상을 찡그린 것을 보았나 보다. 카리나는 그를 보며 작게 미소 지어 주었다.
“괜찮아.”
사무엘의 이마에 손을 올린다. 파앗, 또다시 빛이 그녀의 눈에 머물렀다.
“네가 치료해 줄 테니까.”
재차 널브러지는 사무엘을 뒤로하고, 카리나는 르네거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나저나, 놀라웠어.”
카리나는 르네거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네가 같은 신관인 동료를 해하려 하다니 말이야.”
웃, 르네거는 자신도 모르게 짧은 신음을 내었다. 제 목덜미에 닿은 그녀의 손이 지나치게 차가웠기 때문이다.
서늘한 감촉을 느끼니, 이제야 뜨거웠던 머리가 식는 느낌이 들었다.
뒤틀리고 들끓었던 마음 역시도 가라앉았다. 올바른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듯했다.
그녀의 말대로, 나는 동료인 신관을 해하려 했다.
단순히 기절만 시킨다 결심했지만 그것 역시도 저들에게 있어 배신일 터.
나는 왜 그러했는가?
“나를 위해서 그런 거니?”
카리나를 위해서였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
일평생 신을 바라보고 신을 지키고 신을 섬겼던 그였지만,
지금의 그는 아니다.
현재의 르네거는, 오직 카리나만을 위하고 있었다.
그래. 대관절 고대의 전설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신의 뜻과 라템의 번영이 이제는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는,
나는 그저…….
“카리나.”
르네거는 카리나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녀의 손을 천천히 옮겨, 손바닥에 슬며시 입을 맞췄다.
“저는…….”
그는 느리게 눈을 들어 올렸다. 나른하지만 열망이 가득한 시선이 카리나를 탐닉하듯 퍼져 나왔다.
“당신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러며 그는 손에 힘을 주었다. 카리나는 속절없이 붙잡힌 손목을 바라보며, 예상한 듯 낮은 웃음을 내뱉었다.
“이걸 어쩐다.”
그녀는 콧잔등을 찌푸렸다.
“나도 비슷한 말을 하려 했는데.”
슬쩍 미소 짓는 그녀의 눈은 뱀처럼 가늘게 찢어져 있었다.
“같이 도망칠까, 르네거?”
마치 뱀의 유혹과도 같은 말이라.
르네거는 그런 그녀를 거부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