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48화 (48/135)

48화

[……라템의 수장이 그런 말을 했단 말이냐?]

르네거에게 스벤의 말을 모두 다 전달받은 히론은 분개하며 쐐액 아가리를 벌렸다.

[우리가 바다신을 해하려 했다고? 우리가? 하!]

그는 꼬리를 파르르 떨며 더 크게 외쳤다.

[우리는 단 한 번도 그러한 적이 없다! 애초에 마물들은 악한 성정도 되지 못했어! 그 시대에 살아 보지도 않은 놈 주제에 감히 역사를 왜곡하다니! ]

“그래, 그래. 알았어, 히론. 진정해.”

[너 같으면 진정할 수 있겠느냐!]

카리나를 뿌리친 히론은 다시금 소리쳤다. 그러다 힘이 풀린다는 듯 툭 고개를 떨어뜨렸다.

[태초의 고대 마물들은 신과 공존하며 살길 원했다.]

히론은 다시금 고개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격한 노기가 눈 안에 가득하다.

[그 협정을 파기한 것은 신 놈들이야! 우리가 아니다!]

후우, 후.

한참 숨을 몰아쉬던 히론은, 이내 르네거를 향해 획 몸을 틀었다.

[그 잡놈의 말을 믿는 것은 아니겠지, 르네거?]

갑자기 제게로 돌려진 주제에, 르네거는 난감함을 감추지 못했다.

“저는…….”

르네거는 손을 깍지 껴 잡았다.

그가 내린 결론은, 누구의 말도 믿지 않는 것이었다.

히론의 말도, 스벤의 말도.

자신이 겪은 일이 아닌 주제에 대해 타인의 말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하다 생각했으므로.

중요한 것은 자신이 그 어떠한 말에도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 선택을 내린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러한 생각을 그대로 말하면 분명 히론이 화를 낼 것 같았다.

어쩌지.

르네거는 바싹 마른 입술을 꾹 다물며 히론의 눈치를 살폈다.

“뭐, 상관없지 않아?”

그런 르네거를 막아 준 것은 카리나였다.

카리나 역시 히론의 말을 온전히 믿을 수 없는 터였다.

원작 소설에서도 언급이 되지 않았던 이야기였으니까.

사실 히론의 이야기뿐 아니라 신과 고대 마물이라는 형체 자체도 받아들이기 힘든 그녀였다.

주신이 존재하고 주신의 자식들이 존재하고 마물이 존재하고 인간이 만들어졌다니.

전생에서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던 그녀로서는 온전히 믿기에 힘든 부분이 있는 게 당연했다.

카리나는 르네거를 향해 눈을 찡긋한 후 다시금 말을 이었다.

“르네거가 믿건 말건 상관없는 일이야. 어차피 나를 따라오기로 결정했으니까.”

그녀는 웃음기를 머금었다.

“라템의 신관이라는 신분을 버리는 거잖니. 대단하다 해 줘야지. 타박할 게 아니라.”

으윽.

히론은 꼬리를 말며 혀를 쑥 집어 넣었다. 카리나와 르네거를 번갈아 바라본다.

[흥. 그래도 대답하지 않은 건 감점 요인이다.]

“히론.”

히론은 고개를 휙 돌려 버렸으나, 일전처럼 크게 노여워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여간 귀엽다니까.

카리나는 작게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한데 왜 갑자기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냐?]

히론은 의뭉스러운 시선으로 르네거를 바라보았다.

[아까 보아하니 같은 신관 놈도 공격하려 하고.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이냐?]

르네거는 맞잡은 손을 더 세게 쥐었다.

무슨 변화가 있었냐니.

아무 변화도 없다.

그저, 내가 지닌 생각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게 되었을 뿐.

“……저는.”

자신이 바라는 건 오직,

“카리나와 함께 있고 싶습니다.”

그녀의 곁에 있는 것뿐.

이렇게 스스로의 욕망을 알게 되니 자연스레 욕망에 따라 행동하게 된 것이다.

“그저 그뿐입니다.”

그는 말을 마치며 손에 주었던 힘을 풀었다. 히론은 짧게 혀를 날름거렸다.

[하면 너의 신은 어찌하고?]

르네거는 조소했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에게 있어 신이란 건, 허황된 존재 그 이상도 아니었으니까.

“저를 구원해 준 이는 신이 아니라, 카리나입니다.”

[…….]

“그렇다면 카리나가 저의 신이 되겠지요.”

그는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카리나를 바라본다.

“맹목적으로, 매달릴 수 있는.”

그의 푸른 눈에 이채가 돌았다. 꾹 닫혀 있는 입술은 반듯하기 짝이 없었다.

피식.

카리나는 실소를 흘렸다.

“나는 너무 기대기만 하는 남자는 별로인데.”

“자중하겠습니다.”

“잘 생각했어.”

카리나는 콧잔등을 찌푸리며 웃는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르네거는 본디 신에게 맹목적인 신앙을 보였던 이였다.

하지만 그런 신을 이제 외면하게 되었으니.

‘내게 집착하겠네.’

그녀는 턱을 괴며 짧게 혀를 찼다.

[그래서, 언제 나갈 생각이냐?]

“글쎄.”

히론의 말에, 카리나는 한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깜빡, 깜빡.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생각을 정리해 본다.

“아무래도 오늘 밤이 좋을 것 같아.”

[그렇게나 빨리?]

“응. 난 라템이랑 상극이니까.”

르네거는 사붓 움찔거렸다. 그 기색을 느낀 카리나는 빙그레 웃으며 그의 손등에 손을 올렸다.

“넌 예외야, 르네거. 우리는 묶여 있는 사이잖니.”

르네거의 입매가 녹아내렸다. 그는 자꾸만 치솟으려는 입가를 애써 정돈하며 작게 미소 지었다.

묶여 있는 사이라는 건 맹약을 뜻하는 것이겠지.

카리나의 치료가 끝나면 맹약을 풀어야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카리나와 입을 맞추는 행위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될 테다.

‘왠지…….’

맹약을 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솟구쳤다.

하지만 이를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 르네거는 부러 말을 돌렸다.

“그럼 오늘 밤에 나가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수장이 예민해져 있는 마당에 더 지체하면 안 될 테니까.”

카리나는 가벼이 대꾸했다.

“다 죽여 버리고 싶지만, 그러면 안 되잖아?”

그녀는 킥킥 웃으며 말을 끝마쳤다. 그 말이 농담인 것을 당연히 알아, 르네거 역시 비슷한 웃음을 흘리며 수긍했다.

하지만.

르네거는 묘한 찝찝함을 품었다.

이대로 몰래 도망을 치면 과연 스벤이 가만히 있을까? 자신을 뒤쫓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카리나의 삶을 깨뜨리게 되는 것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자신조차 몰래 도망을 치는 것은, 결코 이득이 되는 일이 아닐 것이다. 르네거는 그렇게 판단했다.

“먼저 나가 계십시오. 숲의 입구에서 만나는 것으로 할까요?”

“왜? 늦게 나오려고?”

카리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르네거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리할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카리나가 괴로워지는 일이 없도록.

그가 할 일이 남아 있는 터였다.

* * *

“흐음.”

창가에 기대 있던 아힌 데이펜은 나지막한 비음을 내뱉었다.

손을 허공으로 들어 올린다. 밀려 온 바람이 그의 손을 휘감다 이내 손가락 끝으로 말려 들어갔다.

“이거 재미있게 됐는데?”

아힌은 킥킥대며 중얼거렸다.

바람을 이용해 르네거의 뒤를 쫓았던 그였다.

르네거가 별관으로 가는 것도, 그곳에서 다른 신관들을 만난 것도, 그들을 공격하려 한 것도, 아포칼리타를 만난 것도, 모두 다 지켜보았다는 말이다.

“가까운 사이일 줄은 짐작하고 있었다만 이 정도일 줄이야.”

르네거가 아포칼리타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성애가 담겨 있었다.

그러니 신을 배반하고 아포칼리타와 함께 가겠다는 말까지 나오지.

-아무래도 오늘 밤이 좋을 것 같아.

오늘 밤.

그들은 대신전을 빠져나갈 것이다.

아포칼리타와 르네거는 따로 움직인다 하였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르네거를 공격할 수 있다.’

아포칼리타가 곁에 있다면 어려웠을 텐데, 다행인 점이었다.

‘이참에 확실히…….’

죽여 버려야 한다.

아힌의 눈이 사납게 번뜩였다.

그는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바로 옆방으로 가, 문을 두드렸다.

“페넬로피. 자?”

얼마의 침묵이 지난 후, 미약한 대답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무슨 일이야?”

“들어가도 될까?”

“……그래.”

아힌은 문고리를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멍하니 걸터앉아 있는 페넬로피에게 다가간다.

“좀 괜찮은 거야?”

아힌의 말에, 페넬로피는 커다란 눈을 수차례 깜빡였다.

“뭐가 괜찮냐고 묻는지 모르겠네.”

그녀의 하얀 얼굴에는 색이 없었다. 파리해진 낯빛일 뿐, 어떠한 생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말라 부르튼 입술이 도드라지게 보인다. 한껏 야윈 볼 어귀에 그림자가 져 있다.

“갑자기 아포칼리타가 나타난 것? 그 아포칼리타를 오라버니가 변호하는 것? 오라버니가 변심한 것?”

“…….”

“뭐가 괜찮냐고 묻는 거야, 대체?”

그녀는 허망한 시선으로 아힌을 올려다보았다. 생기 없이, 죽어 있는 눈빛.

그를 바라보며, 아힌은 올라오려는 미소를 애써 참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네 마음을 이해해.”

페넬로피의 옆에 몸을 앉힌다.

“나 역시도 르네거가 그렇게 변할 줄은 몰랐으니까.”

그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침착했으며 지나치게 다정했다. 페넬로피는 얌전히 그의 말을 경청했다.

“이게 다 아포칼리타 때문이야.”

아힌은 힘을 주어 말했다.

“뱀의 여자잖아. 인간을 현혹시키는 뱀의 피를 타고났다고. 그래서 르네거도 어쩔 수 없었을 거라 생각해.”

페넬로피는 두 손을 맞잡았다. 까끌까끌한 손등을 엄지로 쓸며, 마른 침을 천천히 삼킨다.

“정말, 홀린 걸까?”

그녀는 아힌과 눈을 마주했다.

“그 아포칼리타 때문에 오라버니가 변한 걸까?”

아힌은 다시금 입꼬리가 들어올려지는 것을 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생각해.”

그의 얼굴에는 동정, 연민과 같은 친절한 감정만 남아 있었다. 그렇기에 페넬로피는 아힌을 조금도 의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아힌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그 아포칼리타를 죽이면 르네거가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을까?”

그는 페넬로피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고 싶지 않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