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밤하늘은 어두웠다.
손톱만큼 작아진 초승달은 밤을 밝혀 주지 못했고, 구름 너머로 숨어 버린 별은 빛을 내지 못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카리나는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딛기 위해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촤악-
날개를 펼친다. 밤보다도 더 새까만 날개가 활짝 펼쳐졌다. 히론은 그런 카리나의 몸을 감싸며 위로 올라왔다.
[몸은 괜찮으냐?]
히론은 카리나의 목덜미를 살피며 물었다.
“그럼. 아까 치료를 받았잖아.”
그녀는 가벼이 대꾸하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떠올린다. 르네거가 떠나기 전, 나눴던 입맞춤을.
함께하기로 결정을 내린 르네거는 다른 때보다 더 절박하게 매달렸다. 그의 말대로 카리나가 자신의 신이라도 되는 양, 맹목적으로 그녀를 탐했으며 신실하게 그녀를 떠받들었다.
-이제는 헤어지지 않을 수 있겠네요.
오랜 입맞춤이 끝난 후,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했던 말이었다.
저 신관복을 더 이상 못 보는 건 아쉬운데. 카리나는 떠오른 생각을 애써 지우며 그를 배웅했다.
입술을 더듬는다. 르네거의 온기가 남아 있는 곳을 매만진다.
“어쩌면…….”
카리나는 읊조리듯 중얼거렸다.
“더 위험해질지도 몰라.”
[그건 그렇지. 라템의 인간들이 너를 쫓을 수 있으니 말이야.]
“그 뜻이 아니야.”
[그럼?]
히론은 혀를 날름거리며 되물었다.
“르네거가 내게 매달리니까.”
[그게 뭐가 문제란 말이냐?]
“그러니까, 르네거에게 벗어날 수 없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야.”
히론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하면 그때 죽여 버리면 되지 않느냐?]
카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히론의 혀가 더 길게 튀어나왔다.
[흐음.]
그는 카리나의 뺨을 한 번 핥아 주었다. 까끌까끌한 감촉이 여과 없이 다가왔다. 카리나는 손등으로 뺨을 닦았다.
[그놈과 함께 있고 싶으면 마물로 만들어 버려라. 그래야 평생 함께할 수 있을 테니.]
“그럴 생각 없어.”
[왜?]
히론은 더욱 놀라며 반문했다.
[그놈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더냐? 마물과 합치면 더 강해질 테니 말이다.]
“르네거는 신관이야. 마물을 없애는 신관.”
[하지만 지금은 신관이기를 포기하였지.]
그건…….
카리나는 입을 벌렸다, 이내 다물었다. 고개를 젓는다.
“말씨름하고 싶지 않아. 일단 나가자.”
[네가 졌다는 걸 인정하는군.]
“히론.”
[알았다. 다물겠다.]
정말 갈수록 이상한 말만 한다니까.
카리나는 히론을 한 번 쏘아본 후, 다시금 정면을 응시했다.
창틀에 발을 디딘다.
높은 층고였기에, 탁 트인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우측으로는 높은 첨탑이, 좌측으로는 신을 조각한 거대한 조각상이 우뚝 서 있다.
정작 신을 실제로 본 히론은 그들의 외양에 대해 아무 언급도 하지 않는데, 신을 보지 못한 인간들만이 신의 형상을 상상하며 멋진 모습으로 꾸며 놓는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카리나는 조소하며 허공으로 발을 내디뎠다. 최악! 공기를 가르며 하늘 높이 도약한다.
숲을 벗어나는 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겠지. 카리나는 그리 생각하며 비행 속도를 다소 늦췄다.
이때였다.
챙!
느닷없이 날아온 화살에 카리나는 빙그르르 몸을 돌렸다.
“뭐야, 이건?”
카리나는 항로를 돌려 자신을 쫓아오는 화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쾅!
그녀의 힘과 맞부딪힌 화살은 힘을 잃고 그대로 소멸했다.
“대체 어디서…….”
[조심해라!]
쾅!
불꽃이 날아왔다. 쿨럭, 카리나는 기침을 뱉으며 황급히 더 높게 올라갔다. 불길이 치솟아 있는 아래를 내려다본다.
“저건…….”
저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는 페넬로피를 바라보며, 카리나는 헛헛한 조소를 흘렸다.
“날 너무 좋아하는 여주인공님이시네.”
* * *
끼익, 끽.
르네거는 아무도 없는 복도를 천천히 거닐었다.
그가 향하는 곳은 라템의 수장, 스벤이 있는 곳.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끊임없이 생각해 보았다.
자신의 존재가, 카리나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방법을.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 보아도 뚜렷한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도망친다면 스벤은 끝까지 자신을 쫓아올 테니까.
그렇게 된다면 카리나의 계획과 염원에서 멀어지게 된다.
그녀를 괴롭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하여 내린 결론은 단 하나.
‘…….’
르네거는 주먹을 바르쥐었다. 심호흡을 하며, 스벤의 방문을 두드린다.
얼마 가지 않아,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이 벌컥 열렸다.
“르네거?”
스벤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놀란 눈으로 르네거를 맞이했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냐?”
들어오라는 손짓에, 르네거는 천천히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문을 닫는다. 걸쇠를 걸어 문을 잠근다.
“설마, 아까 한 이야기에 결론을 내린 것이냐?”
스벤은 다소 밝아진 얼굴로 물었다. 르네거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스벤은 얼핏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이 아니었다.
그는 르네거를 탐색하고 있었다. 혼탁한 회색 눈동자에는 불신이 가득했고 빳빳한 입매에는 의심이 만연했다.
이제야 스벤의 본모습이 보인다.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이.
저를 쓸 만한 패로 생각하고 있는 이.
저를 쥐락펴락하는 이.
……왜, 나는 진즉 이런 것을 몰랐단 말인가.
어쩌면 자신의 맹목적인 신앙이 문제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와 그것을 돌이킬 수는 없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수는 없다. 더 잘못되지 않게 막을 수만 있을 뿐.
“여줄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르네거는 스벤과 마주 서며 말했다.
“제가 아포칼리타와 함께 들어온 것을 아는 신관이 몇 명입니까?”
그의 질문을 멍하니 듣던 스벤은, 이내 미간을 깊게 찌푸리며 기억을 되짚었다. 한 손가락씩 접어 본다.
하나, 둘…… 다섯.
스벤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을 응시한다.
“나를 포함하여 다섯 정도 되지. 그때에 데이펜의 수장과 함께 나갔으니.”
“다섯이요.”
르네거는 그의 말을 답습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군요.”
스벤은 자신에게 카리나를 죽이라 말하였다.
하지만 자신은 카리나를 죽일 수 없다. 그녀와 함께 있는 것 말고는 그 무엇도 상상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러니.
죽여야 할 것은 카리나가 아니라.
“다섯 정도면, 그렇게 큰 죄책감이 들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스벤일 터.
“그게 무슨……!”
스벤의 말은 끝마쳐지지 못했다.
윽!
그는 배를 부여잡으며 그대로 쓰러졌다.
“르네거!”
스벤은 빠르게 지팡이를 휘둘렀다. 하지만 르네거의 앞에서는 어린아이 장난일 뿐.
르네거는 제게로 날아온 스벤의 힘을 가볍게 막으며 검을 바로 잡았다.
“대체 왜 이러는 것이냐! 네가 어찌 감히 내게 이럴 수 있단 말이야!”
스벤은 숨을 헐떡이며 외쳤다. 그의 배에서부터 줄줄 흐르는 핏줄기가 르네거의 신발을 적셨다. 그러나 르네거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어찌 감히라…….”
르네거는 피식 조소했다.
“그렇다면 수장님은 제게 왜 그러셨습니까?”
“뭐, 뭐?”
“왜 저를, 저답게 살 수 없도록 만드셨습니까.”
휘익!
르네거는 날아온 스벤의 힘을 가볍게 튕겨 냈다. 쓰러져 있는 스벤의 발치까지 다가간다.
“그러니…….”
그는 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저를 가만두셨어야지요.”
스벤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피하려 했으나 피할 수 없었다.
“윽!”
그는 꿰뚫린 어깨를 부여잡으며 몸을 데구르르 굴렀다.
이런 고통은 처음이었다. 그래. 처음이었다.
아포칼리타와의 전쟁에 한 번도 참전하지 않았던 그였다.
그는 수장이었으므로, 라템을 이끄는 중요한 사람이었으므로 생명을 저버릴 수 없다는 것이 주이유였다.
그렇기에 그는 강했지만 동시에 약했다. 바로 지금처럼.
“그만하거라! 그만! 왜, 왜 이러는 알겠다. 그래. 그 아포칼리타 때문이겠지. 알았다! 네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해 줄 테니 제발 그만하거라!”
스벤은 피가 나는 어깨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지극히도 간절한 외침이건만, 르네거는 무정하기 짝이 없었다.
“저는 말입니다, 수장님.”
지익, 직.
르네거는 검을 끌며 스벤에게 다가갔다.
“지키고 싶습니다.”
지키고 싶다.
카리나를, 그리고 자신을.
카리나의 마음을,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더 이상, 잃고 싶지 않습니다.”
허황된 것들로 시야를 가리고 싶지 않았다. 지키고 싶었다. 모든 것을.
르네거는 다시 한번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르네거……!”
이대로 내리친다면, 스벤의 실낱같은 목숨은 금세 끊어지리라.
르네거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내리그었다.
하지만.
쾅!
“쿨럭……!”
느닷없이 터진 폭발에 르네거는 그대로 뒤로 밀려 쓰러졌다.
쿨럭, 컥.
몇 번의 기침을 하며 어깨를 들썩인다.
이게 대체…….
르네거는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곧.
“수장을 죽이려 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아힌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아힌 님.”
“그래. 오랜만이네.”
그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스벤에게 조금도 시선을 두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서 있는 르네거만을 바라볼 뿐.
그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르네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너도 피에톤 같은 배신자가 되었을 줄이야.”
아힌은 보란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난 너희 같은 것들을 혐오하거든.”
그는 손바닥을 펼쳤다. 새하얀 바람이 그의 손 위에서 소용돌이쳤다.
“죽어야겠다, 르네거.”
아힌은 빠르게 도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