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아힌은 바람을 타고 곧장 르네거에게로 달려들었다.
쿵!
그의 검이 르네거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가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하아, 르네거는 숨을 몰아쉬며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성검을 바르쥔다. 각성한 이후 단 한 번도 반응하지 않았던 성검이지만 그러해도 힘은 쓸 수 있는 터. 성검은 르네거의 의지에 의해 낮게 공명했다.
챙!
그들의 검이 맞부딪혔다. 바람을 응용해 만든 아힌의 검은 시시각각 모양을 바꿔 상대를 옭아매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마치 갈고리가 달린 밧줄처럼 변한 검은 르네거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의 오른손을 포박한다.
“윽……!”
르네거는 붙잡힌 손에 힘을 주며 몸을 뒤로 젖혔다.
촤악!
아힌의 검은 르네거의 손에 깊은 자상을 남기며 물러섰다. 허억, 르네거는 숨을 헐떡이며 피가 흐르는 오른손을 갈무리했다.
“이렇게 싸우다 보니 옛날 생각이 나네.”
아힌은 여유로운 미소를 입에 걸며 말했다.
“어렸을 땐 이렇게 자주 대련을 했잖아. 그때마다 너는 내게 졌고 말이야.”
챙! 챙!
아힌은 자비 없는 칼부림으로 르네거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실력이라니. 너도 참 너무하다 생각하지 않냐?”
휘잉!
불어온 바람이 르네거에게로 밀려 갔다. 마치 족쇄처럼 견고해진 바람은 르네거의 움직임을 단단히 속박했다.
“실력에 비해 과분한 자리를 가졌으면 적당히 만족하고 감사해해야지, 주제에 감히 배신을 하려 해?”
아힌은 조급하지 않은 걸음으로 다가갔다. 검을 들어 르네거의 목덜미에 가져다 댄다.
“난 이래서 네가 싫은 거야. 가진 건 뭣도 없으면서 있는 척은 혼자 다 하잖아.”
검은 르네거의 살갗을 아슬아슬하게 건드렸다.
“그것도 오늘로 끝이네.”
피식.
아힌은 웃으며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의 바람대로 검은 움직이지 않았다. 르네거가 맨손으로 검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당신이…….”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손을 지나 손목까지 흐른 핏줄기는 새하얀 사제복을 붉게 물들였다.
“저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새하였던 흰자는 핏줄이 터져 붉어지고 있다.
“솔직히 말씀하십시오. 페넬로피가 저를 따르기 때문에 제가 눈엣가시였다고.”
쾅!
방출된 힘은 아힌의 복부로 날아갔다.
“으윽!”
쿨럭, 컥.
아힌은 느닷없는 공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바닥을 뒹굴었다.
기습을 당한 탓인가?
아니. 그것이 아니다. 정면으로 맞섰더라도 지금과 같은 통증이 있었으리라.
아힌은 다시 한번 기침을 토해내며 몸을 웅크렸다.
“이 건방진 새끼가……!”
그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사지가 후들거려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머리가 멍했다.
“아포칼리타와 맞서 싸운 적도 없는 주제에 제 실력을 평가한 당신이 더.”
르네거는 보란 듯이 비웃었다.
“건방진 것 아니겠습니까.”
크흑!
아힌은 르네거에게 뒷머리를 붙잡힌 채 고개를 젖혔다. 컥, 피를 내뿜는다.
“당신의 힘이 제게 얼마큼의 타격을 줄까 궁금해 가만히 있었습니다만…….”
“이거 놔!”
“확실히, 제가 강해지긴 했군요.”
퍽!
르네거는 아힌의 머리를 발로 걷어찼다. 지익, 직, 성검을 끌며 널브러진 아힌에게로 걸어간다.
“먼젓번 아포칼리타와의 싸움에서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제 힘을 잘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너 이 새끼……! 가만 안……!”
“그러니 지금 시험해 보는 게 좋겠네요.”
르네거는 빙긋 웃었다.
무해하리만큼 새하얀 미소가 아힌의 두 눈알을 덮었다.
* * *
“쿨럭…….”
아힌은 바닥에 얼굴을 처박으며 기침을 내뱉었다.
그의 몸은 말 그대로 만신창이였다. 깊게 베인 상처에서는 피가 지혈되지 않고 있었고, 내상도 심각해 거듭 피를 토하고 있으니 피 칠갑을 한 것처럼 보였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다. 이건 완벽한 패배였다.
“네가…….”
아힌은 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우며 말했다.
“이렇게 강해졌는지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말이야.”
그의 어투에는 체념이 묻어 있었다. 저가 아무리 발악해 보아도 르네거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탓이다.
그는 아드득 이를 갈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대체 무슨 수를 쓴 거냐?”
그는 허망한 웃음을 잇새로 흘리며 말했다.
“아포칼리타의 힘이라도 받은 거냐? 뱀의 여자의 힘을?”
검에 묻은 피를 닦던 르네거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닥쳐라!』
르네거의 말허리를 자른 것은 성검의 전음이었다.
갑자기?
르네거는 놀라 눈을 크게 뜨며 성검을 내려다보았다.
『어찌 그 간악한 것의 힘을 받았다는 망발을 할 수 있단 말이냐! 르네거, 뭣 하느냐! 저걸 당장 죽여 버리지 않고!』
아주 오랜만에 의지를 드러낸 성검이지만, 변한 것은 없었다. 르네거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다시 성검을 세게 바르쥔다.
“아힌 님.”
그는 아힌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아힌이 등장할 것이란 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본디 르네거의 계획은 카리나를 본 신자들을 처리한 후 도망치는 것이었다. 자신을 쉽게 의심할 수는 없을 테니 도망칠 때까지 적당한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힌이 등장했다.
아힌 데이펜은 데이펜 일족의 주축이 되는 인물.
거기에 아힌이 자신을 만난다는 사실을 다른 데이펜 일족이 알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힌을 죽이게 된다면 자신은 라템뿐 아니라 데이펜에게까지 쫓기게 될 수 있는 노릇.
‘젠장.’
르네거는 입술을 짓씹으며 미간을 깊게 좁혔다.
“제가 여기서 당신을 살려 준다면, 저를 쫓지 않을 겁니까?”
『그래. 이제 내 말은 완전히 무시하는구나.』
성검의 볼멘소리를 무시하며, 르네거는 아힌에게로 시선을 두었다.
“미친놈. 라템의 수장을 죽여 놓고 쫓기기 싫다고 하다니.”
“안 죽였습니다.”
르네거는 고개를 저었다. 구석에 널브러져 얕은 숨을 내뱉고 있는 스벤을 바라본다.
“죽이려 했을 때 당신이 찾아왔으니까요.”
그러니 아직 살아 있다고, 하니 상황을 타개할 수 있도록 입을 닥치라고. 르네거는 그리 말하고 있었다. 하, 아힌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걸 다 덮어 달라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이거 정말 미친놈이네.”
쿨럭.
그는 다시 한번 피가래를 뱉으며 느리게 상체를 일으켰다. 자상을 입은 어깨를 붙잡으며 눈을 들어 올린다.
“이유는?”
“…….”
“그 아포칼리타와 함께하려고?”
아힌의 자줏빛 눈에 비웃음이 서렸다.
“왜, 너와 천년만년 함께 살기로 약속이라도 했냐?”
그는 크게 빈정거렸다.
“정말 미친놈일세, 이거. 고작 아포칼리타 한 마리 때문에 네 모든 걸 다 내던져 버리고 말이야.”
아힌은 르네거를 올려다보았다. 사나운 시선이 보인다. 형형한 눈빛 너머, 그가 지니고 있는 무언의 억울함이 엿보였다.
“돌은 새끼. 그러다 뒈질 거다, 너.”
저주에 가까운 말을 들으며, 르네거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입안이 꺼끌꺼끌했다. 마치 입병이 난 것처럼, 입안과 혓바닥 모두가 다 따끔거렸다. 아힌을 내려다본다.
“제가 가진 것이 있기나 합니까?”
그 역시 말에 억울함이 묻어 있었다. 착취된 세월에 대한 분통. 르네거는 손을 세게 바르쥐었다.
“저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자의로 선택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움직였고, 모든 것은 수장님의 뜻대로 움직였습니다.”
그는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이런 제가, 가진 것이 과연 있기나 합니까?”
르네거는 말을 마치며 얕은 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 흐름을 깨뜨린 것은 아힌의 외침이었다.
“너는 페넬로피를 가져갔잖아!”
아힌은 분에 북받친다는 듯 크게 소리쳤다. 쿨럭, 다시금 기침을 쏟는다. 하지만 멈추지 않는다.
“페넬로피를 가져간 주제에, 뭐? 가진 게 없어? 네가 별것 아니라 생각한 그것이 내게는 얼마나 간절한 것이었는지 알기는 해?”
아힌은 뜨거워진 눈시울을 붉히며 르네거를 노려보았다.
일평생, 그는 페넬로피를 가지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해 주려 노력했고, 그녀를 위해서라면 제 살을 깎아서라도 돕기를 바랐다.
하지만 결과는 어떠한가?
그녀의 눈은 언제는 르네거를 향해 있었다. 자신보다 하등 잘난 것이 없는 그놈에게.
그런데 이제 와 페넬로피를 버리고 아포칼리타를 택한다고? 내 것을 모조리 다 가져가 놓고?
아힌은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너는 모든 것을 다 가졌던 놈이야. 그런데 이걸 버리고 도망치는 거지. 고작 아포칼리타 한 마리 때문에.”
으득.
아힌은 어금니를 세게 갈며 눈을 부라렸다.
“그러니 너는, 앞으로 네가 바라는 걸 아무것도 가지지 못할 거다.”
“아힌 님.”
“아무리 원해도 절대 손에 넣을 수 없을 거다. 발악하고 울부짖어도 절대 가질 수 없을 거야! 어차피 네놈과 아포칼리타는 함께할 수 없을 테니까!”
“그 입.”
르네거의 검이 아힌의 목덜미에 닿았다.
“다무십시오.”
서늘한 감촉에 머리가 차가워졌다. 아힌은 일그러뜨렸던 얼굴을 바로 하며 씨익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내 말을 아직도 이해 못 했어?”
그는 비칠비칠 몸을 일으켰다. 허청거리는 걸음으로 르네거에게 다가온다.
“아포칼리타는 너와 함께할 수 없을 거라고.”
그의 입술에 걸려 있는 웃음이 어딘가 조마조마했다. 묘한 불안함이 스며들었다.
“이미 뒈졌을 테니까.”
쾅!
멀지 않은 곳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저곳은 대신전 바깥의 숲.
이게 대체 무슨.
르네거는 아힌의 멱살을 잡아 올리며 소리쳤다.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늦었어.”
아힌은 피식피식 웃으며 입꼬리를 찢어 올렸다.
“늦었다고, 르네거.”
* * *
아, 죽겠네.
카리나는 뻥 뚫린 옆구리를 부여잡으며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허억, 헉.
가파른 숨이 목구멍까지 치달았다.
[카리나야! 괜찮은 것이냐?]
다리를 타고 올라온 히론이 카리나의 옆구리를 핥으며 말했다. 카리나는 그런 히론의 머리를 밀며 인상을 찌푸렸다.
“괜찮아 보이니?”
정말 죽겠네.
카리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페넬로피의 힘은 아직 미숙했기 때문에, 카리나는 그녀보다 우위에 선 상태로 싸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방심한 사이에 페넬로피의 공격을 맞은 카리나는 그때부터 맥을 차릴 수 없었다.
-지금의 너는 데이펜의 수장을 이기지 못해.
히론의 말이 맞았다.
전쟁의 여신의 자식인 페넬로피의 힘은, 카리나에게 있어 독약과도 같은 것이었다.
쿨럭.
카리나는 피를 쏟으며 몸을 웅크렸다.
“아, 어떻게 방법이 없으려나.”
카리나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중얼거렸다.
“여기서 죽고 싶진 않은데.”
삶에 크나큰 미련은 없지만, 그러해도 지금 여기서 죽는 건 꽤나 억울한 일이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거였다면 처음 이 세계에 환생했을 때에 목숨을 끊어 버렸을 테니까.
지금 그녀에게는 정확한 목표가 있지 않은가.
아포칼리타가 멸망하는 것을 두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죽을 수 없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왜 개안을 하지 않는 것이냐?]
히론은 카리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저 여자는 면역이 없을 터, 개안만 하면 당장 돌이 돼 죽어 버릴 텐데 왜 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죽으면 안 되니까.”
여기서 여주인공을 죽여 버리면 결말은 어쩌라고? 누가 아포칼리타를 멸망시키는데?
카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아니, 아니. 되었다. 그럼 각성을 하는 것은 어떠냐?]
“그것도 기각.”
[대체 왜?]
“지금 각성을 할 거였으면 진즉했어. 그리고 난 절대 각성 같은 건 안 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각성은 3차 성장을 뜻했다. 더불어 카리나가 자주 생각했던 ‘마지막 수’이기도 했다.
2차 성장까지 마친 지금, 마지막 성장을 끝내게 되면 훨씬 더 강해질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카리나는 그것을 기피했다. 각성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이것도 안 된다 하고, 저것도 안 된다 하고! 이러다 정말 네가 죽으면 어쩌려고 이러는 것이냐!]
“그러니까 생각을 하고 있잖아. 그리고 목소리 좀 줄여. 페넬로피에게 들키겠네.”
카리나는 히론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그의 외침은 온 숲을 누빈 터였다.
쏴아아.
바람이 불어왔다.
쿵, 쿵.
지면이 꺼질 것처럼 커다란 폭발이 연이어 터져 올랐다.
……젠장.
카리나는 앉혔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쿠웅!
카리나가 기대고 있던 나무가 우지끈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부스러짐의 먼지가 보란 듯이 부유했다. 그 먼지 너머, 붉은색의 머리를 양껏 흩날리고 있는 페넬로피가 보였다.
“여기 있었네.”
그녀는 입술을 할짝이며 크게 비소했다.
“이번에는 도망치지 못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