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쥐새끼 같아.
페넬로피는 카리나의 피가 튀긴 눈가를 손등으로 닦으며 읊조렸다.
아포칼리타의 피는 독성이 있어, 맨살에 닿으면 검게 썩어 들어갔다.
이는 페넬로피 역시 마찬가지였다. 얼핏 눈가를 더듬으니 살점이 움푹 파여 있는 것이 느껴졌다.
짜증 나.
이유는 모르겠지만, 카리나 아포칼리타는 자신과의 전투에 제대로 집중을 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저가 공격을 하면 피하기만 할 뿐, 힘을 방출하지 않았다.
이러한 행동이 마치 자신을 업신여기는 것처럼 느껴져, 페넬로피는 더욱더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페넬로피는 이를 부득 갈며 사방에 정신을 집중했다.
바스락.
뒤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피융!
페넬로피를 그곳을 향해 힘을 쏘았다.
하지만 그녀의 공격은 보란 듯이 빗나갔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에. 페넬로피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바스락.
반대쪽 수풀에서 다시금 인적이 느껴졌다.
피융!
그녀는 다시 공격했지만, 역시나 빗나갔다. 텅 비어 있는 공간만 그녀를 반길 뿐이다.
“있지 않니.”
흐읍.
페넬로피는 숨을 멈췄다. 자신의 바로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네게 물어볼 게 있어서 말이야.”
귓가에 밀착돼 들려온 목소리는 소름 끼치도록 차가웠다. 목덜미에 닿은 그녀의 손 역시 섬뜩하리만큼 서늘했다.
“너는 왜 이렇게 나를 싫어하는 거니?”
카리나는 긴 손톱을 들어 페넬로피의 목을 긁었다.
“신자 백 명을 끌고 와도 나를 이길 수 없다는 걸 분명 알고 있을 텐데, 이렇게 부득불 혼자 나를 쫓아온 이유가 있을 거 아니니?”
꿀꺽.
페넬로피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 아포칼리타는 나를 가지고 노는 것이다. 이 지금 내 목을 꿰뚫어 버릴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고 있지 않은가.
대체 왜.
페넬로피는 무력한 자신을 자책하며 입술을 짓씹었다.
카리나는 페넬로피의 잘게 떨리는 어깨를 지그시 응시했다.
‘다행이네.’
페넬로피에게 거하게 얻어맞은 후, 공격할 힘이 남아 있지 않다는 걸 들키면 안 되지 않은가.
그렇기에 카리나는 페넬로피의 공격을 요리조리 피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가 제풀에 지쳐 꺾이길 바라며.
‘죽이지 않는 것도 힘들어.’
적당히 상대해 주고 도망쳐야겠어. 카리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너를 쫓아온 이유?”
페넬로피는 두 주먹을 바르쥐며 말했다.
“신을 받드는 일족의 수장인 내가, 세계의 악인 너를 처단하려는 게 이상하다 말을 하는 거야?”
그녀의 양팔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는 공포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분노.
마음에서 발화된 분노는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다. 드러난 살갗에서 붉은 기운이 올라와 넘실거렸다.
뜨거워라.
카리나는 그녀의 목을 감쌌던 손을 떼어 내며 뒤로 천천히 물러섰다.
“정말 그 이유만 있니?”
페넬로피는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근근하게 내리쬐는 달빛 사이로, 카리나 아포칼리타가 보인다.
피로 범벅이 된 새까만 머리카락과, 붉은 금이 가 있는 새하얀 얼굴과, 흐트러짐 하나 없는 고고한 자세가, 보인다.
그녀의 정체를 알지 못했더라면, 님프로 착각할 수 있을 정도의 고아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포칼리타였다.
간악한 말로 인간을 꾀어내고, 삿된 술수로 인간을 지옥으로 몰아붙이는, 괴물. 살인귀.
페넬로피는 아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우웅, 그녀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붉은 기운이 한 자루의 검으로 변모했다.
“네가 아포칼리타라는 것만으로 이유는 충분한 것 아닌가?”
“글쎄.”
카리나는 무해한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다른 이유…… 그러니까, 예컨대.”
그녀는 사붓 콧잔등을 찌푸렸다.
“내가 르네거의 옆에 있어서 싫다던가?”
“닥쳐!”
피융!
날아온 힘이 카리나의 뺨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정답이었나 보네.”
카리나는 뺨의 상처를 지그시 누르며 어깨를 으쓱 올렸다.
“그런데 이걸 어쩌니. 르네거는 날 좋아하는데.”
“닥치라고 했지!”
페넬로피는 높이 도약했다. 하지만 카리나의 비행이 먼저였다.
카리나는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가, 이내 땅과 한 뼘 사이 정도의 고공에 내려왔다.
마치 약을 올리는 것만 같아, 페넬로피는 가파른 숨을 몰아쉬었다.
“오라버니는 너한테 홀린 거야. 네 더러운 술수에 홀려 버린 거라고! 너만 사라지면 오라버니는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악을 지르는 어투에, 카리나는 이를 드러내며 조소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뭐?”
“그렇게 믿고 싶은 건 아니고?”
“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해!”
쾅!
페넬로피의 힘이 카리나의 뒤편에 서 있던 나무에 처박혔다.
“오라버니는 절대 나를 배신할 사람이 아니야! 아니라고!”
제게로 쓰러지는 나무를 가볍게 피하며, 카리나는 페넬로피를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뻔히 보이는 마음이다.
르네거가 변한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으니, 내 탓으로 돌려 르네거를 합리화하고 싶은 것이겠지.
어쩜 이렇게 인간은 똑같을까. 카리나는 사붓 인상을 찡그렸다.
“페넬로피 데이펜.”
그녀는 페넬로피의 머리 위로 몸을 띄웠다. 페넬로피를 내려다본다.
“나는 너를 참 좋아했어.”
사실이다.
원작 소설을 읽을 때, 그 누구보다 가장 응원했던 이는 페넬로피였다.
“네 신념을 좋아했고, 네 선의를 존중했지. 네가 신을 위해 행하는 모든 행동들을 응원했어.”
페넬로피의 불행한 삶을 동정했고, 그녀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지지했으며 결말을 맞이했을 때에는 아쉬운 마음이 있어도 기꺼이 박수를 쳐 주었다.
그러한 행동은 페넬로피에게 자신을 투영했기 때문이었다.
자신과, 페넬로피가 별다른 것이 없는 것 같아서.
그러나.
“지금은 아니야.”
이제는 확실히 알겠다.
자신은 페넬로피와 달랐다.
자신은 불행의 이유를 합리화하지 않는다. 타인의 탓을 하지 않는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페넬로피와, 다르다.
“인생은 멀리서 봐야 희극이라더니. 네게 딱 맞는 격언이야.”
“그게 대체 무슨 말……!”
“가까이서 보게 된 너는, 뭐랄까.”
카리나는 비죽 입술을 비틀었다.
“나쁜 인간 같아.”
페넬로피의 두 눈이 커졌다. 허망한 빛이 눈동자에 스며들었다.
“악을 처단하겠다는 핑계를 두고 제 욕심을 채우려는 그저 그런 인간처럼 보여.”
카리나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무심하게 무시했다.
“넌 신을 믿고 있는 게 아니야.”
“…….”
“믿어야만 네 행동이 합리화가 되기 때문에 믿는 척을 하는 거지.”
페넬로피의 어깨가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숨이 멈춘 것 또한 느껴졌다. 달싹이는 목이 보였다. 카리나는 예상한 양 입술을 들어 올렸다.
“내 말이 틀렸니?”
페넬로피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온전히 보인 그녀의 얼굴은 금이 가 있었다. 깨진 거울처럼, 온전한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네가…….”
그녀는 두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붉은 기운이 손가락 사이사이로 흘러나온다.
팔을 타고 몸통으로 와 다리까지 내려간 기운은 불길처럼 넘실거렸다. 땅이 달궈진다.
“네가 정말 뭘 안다고, 내게 그런 말을 해?”
쿵!
그녀가 딛고 있던 땅이 폭발했다. 무너진 지면 아래, 끓고 있는 용암이 보였다.
아, 이런. 너무 자극했나.
카리나는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처럼 부풀고 있는 페넬로피의 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히론은 멀찍이 도망치게 두었으니, 나만 어떻게 도망치면 될 것 같은데…….
“…….”
저걸 피할 수 있을까.
끄응.
카리나는 날개를 활짝 폈다. 최대한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쥐새끼처럼 어딜 도망가려고?”
쾅!
급작스레 날아온 힘은 카리나의 머리를 휘갈겼다.
쿨럭!
카리나는 핑 도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래. 맞아. 나는 오라버니 때문에 너를 더 싫어해. 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
쾅, 쾅!
페넬로피의 폭격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컥!
폭격에 등을 내준 카리나는 몸을 웅크리며 피를 토해 냈다.
“너는 이 세계의 악이고, 나는 이 세계의 선이야.”
젠장.
카리나는 더듬더듬 손을 뻗어 결계를 쳤다. 하지만 이미 힘에 부친 탓에 결계는 약하기 짝이 없었다.
“선이 악을 죽이는 건 당연한 거잖아?”
최악!
페넬로피는 카리나의 결계를 한 손으로 가볍게 찢었다. 핏빛으로 변모한 눈동자에 카리나의 모습이 담겼다.
“내가 신을 진심으로 믿건 말건 간에 말이야.”
페넬로피는 카리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우웅, 대지가 진동했다. 자연의 틈에 쌓여 있던 불의 기운이 한 곳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저걸 맞으면 죽겠는데.’
카리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렇다면…….
‘페넬로피를 죽여야 한다.’
제아무리 원작이 중요하다 해도, 내가 여기서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카리나는 눈가에 바싹 힘을 주었다. 뜨거운 열이 올라왔다.
정말 어쩔 수 없이도, 페넬로피를 죽여야 한…….
‘……잠깐만.’
카리나는 수차례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이상했다.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제껏 이런 적이 없었는데……!
-치명적일 것이다. 네 회복력도 들지 않을 수 있어.
설마, 히론이 말한 게 이 뜻이었던 건가.
카리나는 흙을 긁으며 손을 움켜쥐었다.
이대로라면 페넬로피에게 당하고 만다. 그녀는 잘게 눈을 떨었다.
“뭐야.”
그런 카리나의 변화를 알아챈 것일까. 페넬로피는 양 입술을 크게 찢었다.
“뭔진 모르겠지만 힘을 쓰지 못하나 보네.”
그녀는 짓이겨진 살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닦으며 싱긋 웃었다.
“잘됐다.”
카리나에게로 손을 뻗는다. 붉게 타오르는 기운이 그녀의 손바닥 안에 맴돌았다.
도망쳐야 한다, 는 본능적인 감각이 카리나를 일깨웠다. 하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땅에서부터 솟구친 페넬로피의 힘이 그녀의 발을 묶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죽는다.
카리나는 왼손 검지에 끼고 있던 반지를 세게 잡아 뺐다.
정말, 각성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제 그만 죽어, 아포칼리타.”
살의로 똘똘 뭉친 적의를 막아 낼 재간은 없었다. 카리나는 번뜩 눈을 올려 떴다.
어느새 몸통만큼 커진 힘은 페넬로피의 손을 벗어났다.
피슝!
제게로 날아오는 힘을 바라보며, 카리나는 몸의 오감을 발동시켰다.
이때였다.
“카리나!”
쾅! 콰앙!
폭발이 이어졌다. 검고 매캐한 연기가 사방을 가득 메웠다.
“콜록, 콜록…….”
카리나는 몸을 일으키려던 것을 중단한 채 연거푸 기침을 내뱉었다.
주변은 연기로 잠식되어 있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
카리나는 잔뜩 긴장하며 주위를 경계했다. 언제 어느 때 페넬로피가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연기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부유하던 먼지도 느리게 내려앉았다. 다소 말끔해진 시야를 확인하며, 카리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카리나.”
저를 끌어안는, 익숙한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제가 늦었습니다.”
르네거였다.
카리나를 구원하러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