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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52화 (52/135)

52화

카리나의 몸 상태는 엉망이었다.

목의 상처는 터져 있었고, 옆구리의 자상은 지독히도 깊었으며 왼쪽 다리는 절고 있었다.

회복이 되지 않고 있었던 것인가.

그렇다면 고통이 엄청났을 텐데.

“…….”

르네거는 손바닥에 자국이 날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며 숨을 가다듬었다. 필사적으로 분노를 억누른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어?”

이런 르네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리나는 사붓 웃으며 르네거를 바라보았다.

“폭발음이 들려서 왔습니다.”

“해야 한다는 일은 다 했고?”

“그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지금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지 않습니까.”

르네거는 카리나를 부축하며 말했다.

그는 카리나를 근처의 나무에 기대어 준 후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숨을 차분히 내뱉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숨 안에 담긴 분노까지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다.

화가 났다.

아포칼리타와 대적했을 때에도, 수장이 자신을 이용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도, 느닷없이 아힌이 저를 죽이려 달려들 때에도, 이 정도까지 화가 나지 않았었다.

그때에는 내가 겪는 일이었으니까. 내가 참고 해결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제가.”

르네거는 카리나의 손을 붙잡았다.

“죄송합니다.”

그는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침울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카리나는 그런 르네거를 바라보며, 왜인지 모를 기쁨을 느꼈다.

“화를 내고 싶은데, 그럴 기운도 없네.”

카리나는 르네거의 손을 톡톡 쓰다듬었다.

“네가 해결해.”

그러며 뒤통수를 나무에 기댄다. 가물가물한 시야가 천천히 침잠되기 시작했다.

“난 좀 잘 테니까.”

눈을 감는 그녀를 보며, 르네거는 그제야 으득 이를 갈았다.

* * *

르네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카리나의 주변에 결계를 친다. 혹시 모를 공격과, 소음을 막아 주는 결 계였다.

그는 느리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곧, 볼 수 있었다. 허망한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는 페넬로피를.

“오라버니.”

그녀는 르네거를 향해 띄엄띄엄 입술을 열었다.

“왜……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말대로, 르네거의 시선은 흉흉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악을 마주한 성기사의 것처럼, 그의 눈에는 어떠한 자비도 없었다.

“내가 잘못했어? 아니, 난 잘못하지 않았어. 나는 응당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야. 알잖아, 나는…….”

“그래.”

르네거는 페넬로피에게 조금씩 다가갔다.

“네 말이 맞아. 너는 해야만 하는 일을 한 것뿐이지. 너는 데이펜의 수장이니.”

페넬로피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 아포칼리타에 대한 분노가 어떤 방향이건 간에, 자신이 한 행동은 틀린 게 아니었다.

저는 데이펜 일족의 수장이었으니까.

악을 처단하고 선을 지켜야 하는 신의 사자였으니까.

그러니 저가 한 행동은 옳은 것이었다. 절대, 틀린 게 아니었다.

“하지만.”

르네거는 페넬로피와 두 뼘 거리에 마주 섰다.

“그렇다면 내게도 달려들어야지.”

그는 페넬로피를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나 역시 신을 배신한 변절자니까.”

“아니야!”

페넬로피는 르네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리쳤다.

“저 아포칼리타 때문이잖아! 저게 오라버니를 홀린 거잖아!”

“아니야.”

“저 아포칼리타가 오라버니를 망쳤어! 저것만 없었다면 오라버니는 이렇게 변하지 않았을 거야!”

“내가.”

르네거의 눈매가 사납게 경련했다.

“아니라고 말했잖아.”

페넬로피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르네거의 이러한 모습은, 정말 낯선 것이었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웃음을 잃지 않던 그가 아니었던가.

아무리 슬픈 일이 있어도, 아무리 실의에 빠질 일이 있어도, 그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되레 더 환히 웃으며 주변인들을 격려해 주던 이였다.

한데…….

대체 어쩌다.

정말 아포칼리타 때문이 아닐까? 르네거의 자의적 선택일까?

그렇다면 왜?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일평생 헌신했던 가치관을 버리고 돌아선단 말인가. 왜, 대체 왜.

“왜 신을 저버렸어?”

그녀는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왜 나를 저버렸어? 왜 우리를 배신했어? 왜?”

명확한 이유가 있노라고. 실은 라템 일족에 실망할 만한 일이 있었다고. 그래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고. 그런 나름의 합리적인 대답을 듣고 싶었다.

그렇다면 페넬로피도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회유해 자신의 일족에 편입되게 할 수 있을 테니까.

“생각해 봤어.”

그러나, 들려온 건 그녀의 기대를 배반하는 말이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악이 과연 악이 맞을까.”

“……뭐?”

“우리가 믿고 있는 선이 과연 선이 맞을까. 우리가 선인 건, 그렇다고 믿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지 않을까.”

페넬로피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녀의 벌려진 입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다. 너무 놀란 까닭이다.

“그렇다면 어쩌면.”

르네거는 눈을 느리게 내려 감으며 말했다.

“우리는 선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오라버니!”

그녀는 소리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나, 누군가가 들을까 두려워 하는 모습이다.

르네거는 설핏 조소했다. 다시 말을 잇는다.

“사람들을 결속시키기 위해서라면, 공격할 만한 외부인이 있어야만 돼.”

여기서 결속되는 쪽은 선이라 지칭되는 3대 가문이고, 외부인은 아포칼리타라고 르네거는 생각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악을 배척하는 걸 수도 있어. 그럴수록 악이 더 끔찍해지고, 더 많은 일반인들이 희생되는 걸 알면서도…… 우리를 위해 악과 싸우는 거지.”

르네거는 말을 마치며 눈을 감고 페넬로피의 기운을 느꼈다.

그녀의 몸 안에서 아주 작게 자리 잡고 있던 불의 씨앗이, 점화돼 커다래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온몸이 불로 뒤덮인다. 뜨거운 열기가 훅 밀려왔다.

“내가 잘못 생각했어.”

그녀의 오른손에서 붉은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오라버니는 저 아포칼리타에게 홀린 게 아니야.”

기다랗게 뽑힌 기운은 검의 형태로 모습을 바꿨다.

“원래부터 이런 사람이었던 거지.”

그녀의 얼굴에는 일전까지 보였던 허망함이나, 혹은 애틋함 같은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이제야 인정한 것일까.

르네거 라템은 더 이상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그녀는 검의 끝을 르네거에게 겨눴다. 르네거는 그제야 천천히 눈을 올려 떴다.

“페넬로피.”

그는 결의에 찬 페넬로피의 얼굴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너는 날 이기지 못해.”

검 끝이 흔들렸다. 발화된 기운이 작게 요동쳤다.

“나는 떠날 거야.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고. 그러니 나를 찾지 마.”

“아니. 난 쫓아갈 거야. 세계의 모든 아포칼리타를 멸족시킬 거니까.”

“……그래.”

르네거는 씁쓸한 양 조소했다.

“그렇게 돼서 우리가 다시 마주치게 된다면, 나는.”

쏴아아-

굵은 빗줄기가 쏟아졌다. 지나가는 소나기지만 흔적만큼은 남겨 두겠다는 듯, 빗방울은 지독히도 차가웠으며 매서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네거는 꼿꼿하게 서 있었다.

마치 이 비를 자신이 부른 것처럼, 조금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으며 페넬로피를 직시했다.

“나는 널 죽일 거야.”

쏟아지는 빗줄기 너머, 르네거의 검은 머리칼이 또렷하게 보였다. 페넬로피는 침음을 흘렸다.

“우리는 같은 인간이 아니게 되었으니까.”

이제는 원래대로 돌아올 수 없는 과거의 색이, 지나치게 그리웠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더 이상.

* * *

“아, 죽겠네.”

나무 상자 위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피에톤 캄바이트는 바닥에 가득한 쥐 떼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 허름한 창고에서 살고 있은 지도 벌써 삼 개월째.

이쯤이면 추격자들이 물러갈 줄 알았는데, 명백한 오산이었다.

캄바이트 일족은 기세를 죽이지 않고 더 많은 수의 마법사를 모으며 저를 찾아 나섰다.

아니, 아포칼리타와 싸우는 데에도 병력이 부족할 텐데 고작 나 한 명에 그렇게 많은 수의 마법사를 쓴다고? 싶었지만,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능한 부분이기는 했다.

피에톤은 다름 아닌 태양신의 자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캄바이트 일족을 통솔하는 수장 자리에 올라야 하는 이였다.

그러나 그는 도망쳤다.

정확히 말하면, 캄바이트 일족을 배신하고 몸을 숨겼다.

그러기까지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지금의 피에톤은 상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 막막한 현실을 탈출할 방법을 강구해 볼 뿐.

“아 씨, 진짜 어떡하지. 빨리 여기서 나가고 싶은데…….”

그는 이 쥐 떼 때문이라도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실력 있는 마법사였기에 이런 작은 쥐 같은 건 눈 깜짝할 새에 죽여 버릴 수도 있었지만…….

“죽이긴 뭘 죽여. 어떻게 생명을 죽여!”

그는 개미 한 마리조차 죽이지 못하는 생명옹호론자였다.

인간뿐 아니라 씨앗 한 톨까지도 뭉개지 못하는 그였다. 그러니 이렇게 찍찍거리는 쥐의 소리도 참아 주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돌겠네…….”

그는 좌절감을 이기지 못하고 특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때, 퍼덕거리는 날갯짓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새하얀 깃털을 뽐내고 있는 한 마리의 까마귀가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까악.

새는 낮게 울며 공중을 뱅글뱅글 돌다가, 이내 피에톤의 어깨에 착지했다.

“잘 다녀왔어, 코버?”

피에톤은 코버라 불린 새의 목덜미를 긁어 주며 말했다. 코버는 피에톤에게 머리를 기대며 쉴 새 없이 울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전령새인 코버의 말을 잠자코 경청하던 피에톤의 눈이 커졌다.

“르네거 라템이 라템을 배신했다고? 그 깐깐하고 꽉 막힌 놈이?”

코버는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거듭 소리를 냈다.

“라템에서 걔를 죽이려 했대? 갑자기 왜?”

세상에.

피에톤은 놀랍다는 양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놀랄 건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뭐? 아포칼리타와 있다고?”

그는 빽 소리쳤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르네거 라템이 라템 일족을 배신한 건, 백 번 양보해 조금은 이해해 줄 수 있었다. 그 무식하게 깐깐한 놈이 뭔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나 보지.

하지만 아포칼리타와 함께하고 있다니. 이건 조금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무식하게 꽉 막힌 놈은 아포칼리타라면 이를 바득바득 갈지 않는가.

“이게 뭔 일이래. 내가 꿈을 꾸고 있나.”

아야. 뺨을 잡아당기니 아프다. 꿈은 아니란 말이다.

“뭐, 가문마다 배신자가 한 명씩은 나왔네. 데이펜의 배신자는 죽었으니까 나와 르네거 둘뿐…….”

머리를 긁적이던 피에톤은, 이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씨익 입술을 들어 올렸다.

“그러니까, 날 도와주겠지?”

그늘진 눈가에 반짝 빛이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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