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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53화 (53/135)

53화

꿈을 꾸고 있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이와 같은 현실성 없는 광경을 맞닥뜨릴 수 없잖아.

꿈속의 공간은 아포칼리타의 탑이었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먼 과거의 탑.

이때는 대체 언제쯤일까. 기억을 더듬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끼이익 소리가 나며 문이 천천히 열렸다. 열린 문 너머로 나온 이는 다름 아닌 카리나였다.

어린 카리나.

아직 이 세계의 잔혹함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그토록 어리고 순진했던 카리나.

카리나는 울고 있었다. 엉엉 울며 어딘가를 간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의 끝에는, 아버지가 있었고 끌려가고 있는 형제들이 있었다.

아. 이날이구나.

형제들이 모두 다 죽었던 그날.

가지 않겠노라 발악하던 형제들도 있었고, 체념한 듯 얌전히 따라가던 형제들도 있다.

제각기 다른 행동을 하고 있지만, 그들이 어린 카리나를 보고 있는 시선만큼은 통일돼 있었다.

원망이 있고 분노가 있다. 분통이 있고 미움이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지배하는 감정은 단 하나.

후회.

너를 사랑한 것은 맞지만 이러한 결말을 맞이하길 원하지 않았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바랐으나 너 때문에 죽어도 된다는 건 아니었어.

이럴 줄 알았다면 나는. 우리는.

너와 함께하지 않았을 거야.

-우리를 잊지 마.

지크였던가. 아실이었던가. 아니, 누군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누군가가 내게 그렇게 말을 했다. 잊지 말라고. 영원히 기억하라고.

너 때문에 죽은 우리들을,

-잊지 마.

결코 저버려서는 안 된다고.

그 말은 나의 인생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자꾸만 흐려지려는 그들의 얼굴은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자꾸만 흐트러지는 추억은 나를 나쁘게 만들었다. 가지 마, 잊히지 마, 영원히 내 안에 남아있어.

그러려면.

결심을 했다.

나의 인생을 그들을 위한 방향으로 바꾸자. 그들을 위한 생을 살자. 그들을 기리기 위한 삶을 살자. 그러면 잊히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영원히 기억할 수 있을 테다.

그들을 위하려면.

아포칼리타가 멸망해야 돼.

멸망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위하는 게 아니야.

아포칼리타가 멸망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 뒤의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잊게 되는 걸까? 그들의 유언을 저버리게 되는 걸까? 나 때문에 죽은 그들의 말을, 잊게 되어 버리는 걸까?

그러니까 나는.

그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 나는.

아포칼리타를 내 손으로 멸망시키자.

그리고 내 손으로 나를 멸망시키자.

그들의 곁으로 가자.

나를 위해 죽은 그들의 곁으로 가자.

그게 내가 바라는 거야.

그것 말고는 바랄 게 없어.

아버지에게 끌려가는 그들의 마지막 모습을 보며,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 * *

[카리나야!]

“정신이 드십니까?”

눈을 뜨자마자 보인 건 히론과 르네거였다. 카리나는 그런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 말을 안 하는 것이냐? 너무 충격을 받아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이냐?]

“괜찮은 것입니까? 아픈 곳이 있는 겁니까?”

그들은 호들갑을 떨며 카리나의 몸 곳곳을 살폈다.

카리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저를 마음 깊이 걱정하고 있는 그들을, 이상하리만큼 물끄러미 응시한다.

“카리나. 아무 말이나 해 주십시오.”

르네거는 애걸하듯 절절한 어투로 말했다. 카리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페넬로피는?”

첫 마디가 그런 내용이라니. 르네거는 역시 카리나답다라는 생각을 하며 대답했다.

“돌아갔습니다. 쫓아오지도 않고요.”

“싸웠니?”

“몸싸움은 하지 않았습니다.”

몸싸움‘만’ 하지 않은 거겠지. 어련하겠니.

카리나는 그런 눈빛을 보내며 침대 바깥으로 발을 내디뎠다.

“여긴 어디야?”

두리번거리던 그녀를 향해, 머뭇거리던 히론이 대답했다.

[로더릭 지방이다.]

“뭐?”

카리나의 두 눈이 커졌다.

“라템의 대신전과는 끝과 끝이잖아.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거야?”

“워프석을 이용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 라템의 신자였으니까요.”

워프석. 일 년에 세 광주리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희귀한 광물이다. 아포칼리타조차 구하기 힘들어 소량만 구비해 놓는 정도였는데, 그런 걸 도망치는 데에 썼다니…….

잘했는데?

카리나는 의외라는 듯 눈썹을 올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 물론 흔적은 남기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신자 중에 아무도 모릅니다.”

더 잘했네. 카리나는 지그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분명 말을 마친 르네거인데, 이상하게 카리나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왜 저러지? 카리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저.”

그는 우물쭈물하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최대한 당신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자 노력했습니다. 부족한 부분이 있긴 하겠지만 노력을…….”

“그래, 알았어.”

“……네.”

그는 툭 고개를 떨어뜨렸다. 눈에 띄게 시무룩해진 모습이었다. 왜 저럴까, 싶던 카리나는 문득 손을 들어 올렸다. 르네거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잘했어.”

그 말에, 르네거는 환히 웃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꼬리가 달려 있었다면 사방으로 흔들리고 있었을까. 카리나는 피식 웃으며 손을 거뒀다.

“그래서, 여기는 여관인 거야?”

그런 것치고는 꽤 고급인데. 카리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제 집입니다.”

“집?”

르네거는 주억였다.

“성기사는 대륙 곳곳을 누비지요. 신분을 감추기도 하고요.”

“알아. 아포칼리타를 쫓기 위해서잖아.”

“그때에 만들어 둔 신분인데, 어쩌다 보니 상단을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뭘 어떻게 했기에 상단을 물려받아?”

“전 상단주의 목숨을 구해 줬습니다.”

“아.”

카리나는 이제야 이해가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은 목숨을 귀중히 여기니까.”

“…….”

르네거는 입을 다물었다.

마치 당신은 목숨이 귀하지 않다는 듯 말하는군요. 그리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하지 않는다. 그랬다간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게 상단을 물려준 걸 보니 그 상단주는 죽었나 보네?”

“아닙니다. 이제 나이가 들어 관리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제게 넘겨준 것입니다. 지금쯤 편히 쉬고 있을 겁니다.”

“그렇구나.”

“제가 직접 관리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름만 두고 있을 뿐입니다.”

카리나는 다소 황당함이 섞인 웃음을 뱉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되레 좋은 일이 아닌가. 그녀는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고급스러운 가구들을 보며 판단했다.

“잘됐네. 갈 곳이 없어서 걱정했었는데. 이런 좋은 집이라니.”

르네거의 어깨가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기나긴 속눈썹이 사붓 흔들렸다. 기대에 찬 얼굴이 보였다.

“그래. 잘했어.”

그는 양 입술 끝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그늘진 눈가에 빛이 돈 것처럼, 그의 얼굴은 환하게 밝혀졌다.

카리나는 피식 웃으며 다시금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당분간은 쉬는 게 좋겠어. 자일부터 시작해서 라템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으니까.”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일단 당신의 회복이 우선이니까요.”

그는 그리 말하며 카리나의 목덜미를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목의 상처를.

자신이 ‘잘’ 보살핀 덕분에 그녀의 몸에 난 상처들은 대부분 치료가 되었지만, 목의 상처는 쉽게 낫지 않았다.

이건 제 성력이 약한 탓이 아닐까. 르네거는 그리 생각하며 자책했다.

[카리나야.]

어느새 다리를 타고 올라온 히론의 말이었다.

[이곳은 레피오스가 있는 곳과 매우 가깝다.]

히론은 카리나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며 말했다.

[한번 가서 치료를 해 보는 것이……. 아니, 아니. 알았다. 화내지 말거라. 미안하다.]

카리나의 따가운 시선을 느낀 것일까. 히론은 빠르게 말을 회수했다.

하지만.

“아니야.”

카리나는 의외의 대답을 내놓았다.

“괜찮은 생각 같다고 여기고 있었어.”

툭, 투둑.

그녀는 손가락을 움직여 무릎을 툭툭 건드렸다.

“꿈을 꿨거든.”

카리나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사붓 굳어진 눈매가 돋보인다.

“죽은 형제들이 나왔어.”

르네거는 영문을 모르는 말이었지만, 히론은 의미를 알아챌 수 있었다.

그는 재빨리 카리나의 어깨로 올라왔다. 그녀를 끌어안듯 몸으로 감싼다.

“아니야. 괜찮아. 나쁜 꿈은 아니었으니까.”

카리나는 히론을 토닥였다.

하지만 히론은 알고 있었다. 무어가 됐든 죽은 형제들이 나오는 꿈은 카리나에게 있어 나쁜 꿈일 뿐이라고. 그는 카리나의 팔을 핥아 주었다.

“정말이야. 그저……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을 수 있게 돼서 말이야.”

카리나는 다시금 다짐했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나로 인해 죽은 그들을 위해서라도 내가 해야 할 일을.

아포칼리타를 멸망시키는 것.

반드시.

후우.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르네거를 바라본다.

“아포칼리타를 멸망시켜 주리라 믿고 있던 페넬로피가 완전히 내게 꽂혀 버렸잖아. 페넬로피는 내 죽음을 가장 먼저 바라겠지.”

“그렇게 두지 않을 겁니다.”

르네거는 힘을 주어 가며 말했다. 카리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페넬로피의 집중이 내게 쏠렸으니, 아포칼리타의 멸망은 늦어질 거야.”

원래라면 지금쯤 아포칼리타와 3대 가문들이 평화 협정을 맺었어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자일이 반죽음 상태로 쫓겨났기 때문이고, 자신이 페넬로피와 맞서 싸웠기 때문이다.

“나는 아포칼리타가 빠르게 무너지길 바라.”

카리나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창가 쪽으로 천천히 다가간다. 걸쇠를 풀고,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쾌청한 바람이 물밀 듯 쏟아졌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그녀는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정리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바람에 실려 이리저리 움직이는 머리칼은 마치 그녀의 앞날과도 같이 느껴졌다.

과거, 그녀는 원작 흐름에 급급해 휘둘리기만 했다.

이렇게 행동하면 안 돼, 벗어나면 안 돼, 페넬로피와 척을 지지 말아야 돼, 원작에서 어긋나면 안 돼…….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이 달라졌다.

르네거는 죽지 않았고, 덕분에 그가 성검의 주인이 되었다. 남자 주인공의 등장은 불확실하며 여자 주인공인 페넬로피는 자신에게 이를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까지 달라진 이상, 원작의 흐름을 믿고만 있을 수 없었다.

“레피오스 님을 찾아갈게.”

카리나는 목의 상처를 더듬으며 말했다.

“아포칼리타를 내가 멸망시켜야 할 테니 말이야.”

휘이잉.

다시금 바람이 밀려왔다. 카리나는 흩날리는 머리칼을 한 손에 쥐었다.

이렇게도 간단한 것을.

그녀는 작게 웃었다.

6장 사랑과 사람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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