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주인님이 돌아오셨다.
저택의 사용인들은 근 1년 만에 닥친 주인을 맞이하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 짜증을 낸다든가 하는 부정적인 감정들은 보이지 않았다.
다름 아닌 ‘그’ 주인님이기 때문이다.
그의 황금빛 머리칼을 보고 있자면 황혼 녘의 갈대가 전달하는 찬란함을 느낄 수 있었으며, 그의 푸른 눈동자를 보고 있자면 빛나는 바다의 생명력을 느낄 수 있었다.
이뿐이랴.
음영이 생길 정도로 깊고 기다란 눈매는 멍해질 정도로 유혹적이었으며 그늘진 눈가는 이유를 모를 아련함을 자아냈다.
거기에 끝이 얇고 높은 코와 두껍지만 날렵한 턱 선은 그의 남성성을 오롯이 드러내 주었다. 그리고 큰 키와 두툼한 몸까지.
그를 본 사용인들은 남녀 할 것 없이 넋을 빼고 멍하니 바라보기 일쑤였다.
그렇기에 사용인들은 기쁜 마음으로 주인을 맞이할 수 있었다.
다만 그들은 르네거가 라템의 성기사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알았다면 지금보다 더 그를 찬양했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네가 가기로 했단 말이야?”
본관의 시녀, 데이지는 볼멘소리를 내며 같은 시녀 릴리의 옆구리를 툭 쳤다.
“부럽다, 부러워. 나도 주인님을 가까이서 보고 싶었는데.”
“그러니까 너도 진즉 카드 게임에 끼지 그랬어. 그럼 네게도 기회가 갔을 수도 있는데.”
“너 아까 손 움직이는 거 보니까 지금 당장 시녀 그만두고 도박판으로 가도 될 정도던데. 됐어. 난 먼 발치에서나 볼래.”
카드게임의 승자, 릴리는 히힛 웃으며 주인님께 가져갈 트레이를 정돈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왜 식기가 두 명분이지? 음식의 양도 그렇고?
릴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두 명 분량의 식사를 올리는 거야? 손님이라도 왔어?”
“뭐야, 너 몰랐어?”
데이지는 툭 말을 던졌다.
“주인님이 이번에 어떤 여자를 데리고 왔어.”
“뭐어?”
릴리는 트레이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휙 돌렸다. 돌아본 그녀의 얼굴에는 경악이 가득했다.
“누군데? 어떤데? 왜!”
“나도 몰라. 집사님이 말씀해 주신 거거든. 그런데 너…… 너무 놀라는데?”
데이지는 의뭉스러운 시선으로 릴리를 바라보았다.
“설마, 주인님께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던 건 아니지?”
“그럴 리가!”
릴리는 빽 소리쳤다.
“내가 어떻게 감히 주인님을 올려다볼 수 있겠어! 말도 안 돼!”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이러는 건…… 모르겠어. 내가 왜 이러지?”
후우.
숨을 뱉으며 가슴에 손을 올려본다. 콩닥콩닥 뛰는 가슴이 느껴졌다.
“내가 좋아하던 오페라 가수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마음이야.”
아. 데이지는 완벽하게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라면 이해해. 나도 비슷했으니까.”
“그치? 너도 그랬지? 내가 이상한 게 아니지? 그 여자는 대체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 미치겠고, 주인님에 비해 부족하면 화가 날 것 같은 내 마음이 정상이지?”
“……거기까진 아닌데.”
아무래도 릴리는 주인님의 열성 추종자처럼 보였다. 데이지는 빠르게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됐고, 빨리 가 봐. 음식 식겠다.”
“아, 그렇지. 알았어.”
릴리는 빠르게 트레이를 갈무리했다. 그러며 생각한다.
내 주인님의 여자가 누군지 똑똑히 보겠어!
그리고 만약 별로라면…… 어울리지 않는 거 같다면…… 어…… 그러니까.
마음으로 반대할 거야!
릴리는 씩씩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 * *
하지만 그런 릴리의 마음은 주인님의 방문을 열자마자 눈 녹듯 사라졌다.
‘여신님인가.’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만큼, 눈앞의 여자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으니까.
그녀는 침대에 앉아 헤더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러며 창밖을 멀리 내다보고 있었는데, 언뜻 보이는 우수에 젖은 시선은 가슴이 아릴 정도로 아련해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 연약해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칠흑처럼 새까만 머리칼은 견고함을 상징하는 것 같았고, 위로 치켜 올라간 커다란 눈은 강인함을 드러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수수 불어오는 바람과, 가볍게 나부끼는 머리카락과, 그 아래에 언뜻언뜻 보이는 매력적인 외모는 릴리의 모든 오감을 사로잡았다.
이런 때, 주인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리나, 식사가 왔습니다.”
카리나. 이름도 어쩜 이렇게 멋있을까. 릴리는 음식을 내어야 한다는 생각조차 잊은 채 카리나를 바라보았다.
카리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침대 바깥으로 발을 디딘다.
몸에 맞지 않는 다소 큰 셔츠가 그녀의 무릎 근처에서 살랑거렸다.
“난 밥을 먹지 않아도 된다니까.”
맙소사. 목소리마저 예뻐.
릴리는 황홀할 지경이었다.
“그러해도 드셔야 합니다. 기운을 차리셔야 하니까요.”
“잔소리는.”
카리나는 짧게 혀를 찬 후 탁자 의자에 몸을 앉혔다. 다리를 꼬며 몸을 비스듬하게 등받이에 기댄다.
그 일련의 움직임을, 릴리는 조금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어쩜 사람이 이렇게 우아할 수 있지.
주인님의 여자가 누군지 똑똑히 보겠다는 다짐 따위야 잊은 지 오래였다.
주인님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의 머리가 검게 변한 것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오직 카리나, 그녀에게만 집중되어 있을 뿐.
“음?”
그런 릴리의 시선을 느낀 것일까. 카리나는 릴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안녕?”
헉!
릴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뒷걸음 질을 쳤다. 그녀는 뛰는 가슴을 애써 억누르고 억누르며 간신히 이성을 찾았다.
“아, 안녕하세요, 여신…… 아니, 카리나 님.”
“여신?”
카리나는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 그게 카리나 님께서 정말 아름다우셔서…… 아니, 멋있고…… 대단한 것 같고…….”
릴리는 빨개진 얼굴을 수습하지 못하며 횡설수설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목덜미까지 붉게 물들어 있는 게 보였다. 카리나는 작게 웃었다.
인간들이란 외양만 보고 반하기 일쑤였다. 바로 지금처럼.
하지만 이 경우에는 불쾌하지 않았다. 대상이 작고 씩씩한 소녀이기 때문일까.
카리나는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릴리의 뒷머리를 토닥거렸다.
“귀엽네.”
릴리의 어깨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감격하고 있는 것이었다.
죽는다면 지금 죽어도 좋아……. 릴리는 코를 훌쩍이며 카리나의 손길을 기꺼이 느꼈다.
“카리나.”
하지만 그런 카리나의 손을 붙잡는 이가 있었다. 바로 못된 주인, 르네거였다.
“처음 본 시녀에게는 이렇게 잘 웃어 주면서, 왜 제게는 그러지 않는 것입니까?”
르네거는 다소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카리나는 르네거를 멀뚱히 올려다보았다.
“설마 이 아이를 질투하는 거니?”
“네.”
너무도 당당한 대답이다. 카리나는 기가 찬다는 듯 하, 헛숨을 뱉었다.
“네 주인이 이렇단다. 이렇게 막무가내야.”
“그,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여신…… 아니, 아니. 카리나 님은 정말 아름다우시니까요.”
띄엄띄엄이나마 다 대답을 하는 릴리였다. 잔뜩 부끄러워하면서 말이다. 카리나는 그런 릴리를 다정히 바라보았다.
“정말 귀여워라.”
인간을 귀여워한 적은 드문데 말이야. 카리나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뺨을 툭 건드렸다.
“앞으로 이곳에 있는 동안은 네가 날 담당해 주었으면 하는데. 어떠니?”
“네, 네? 그, 그럼요! 정말 영광이에요!”
릴리는 두 손을 맞잡으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홀해하는 눈빛이었다. 누가 보아도 눈앞의 카리나에게 반한 듯한 모
르네거는 불쾌해졌다. 짜증이 나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만 나가 보십시오. 할 일은 다 한 것 같으니.”
그렇기에 이렇게 차가운 말이 튀어나가는 것이리라.
르네거는 말을 뱉고서 아차 싶었으나, 철회하지 않았다. 지금은 카리나와 단둘이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부디 평안한 저녁 보내시길…….”
릴리는 총총 뒷걸음질로 방을 빠져나갔다.
걸어가는 내내, 그녀는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카리나 님이 더 아까운 것 같다, 라고.
* * *
“너무하십니다.”
릴리가 나간 후, 찾아왔던 정적을 깨뜨린 건 르네거의 말이었다.
“내가 너무하다고?”
카리나는 황당하다는 듯 반문했다.
“내가 오늘 저 시녀에게 웃어 준 횟수보다, 너와 함께 있으면서 웃은 횟수가 더 많을 텐데 말이야.”
“하지만.”
르네거는 억울한 양 고개를 반쯤 숙였다.
“처음에는 저를 싫어하지 않으셨습니까.”
“지금도 딱히 좋아하는 건 아닌데.”
그는 휙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입을 반쯤 벌리며 죽어 버린 눈으로 카리나를 바라본다.
어떻게 말 한마디 들었다고 저렇게 변할 수 있지. 카리나는 새삼 신기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농담이야. 지금은 그때보다 낫지.”
“역시 너무하십니다.”
르네거는 입을 꾹 다물며 콧잔등을 찡그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 모습이 꽤 귀여워 보였다. 그래, 마치……. 덩치가 커다란 개를 보는 것처럼 말이다.
개 같다, 개 같다, 했더니 정말 개가 되어 버린 걸까. 카리나는 우스운 생각을 피우며 눈썹을 슬쩍 올렸다.
“어리광이 늘었어. 히론처럼.”
그녀는 지금쯤 저택을 돌아다니며 숨어 있는 그림자 마물을 잡아먹고 있을 히론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래도 적당히 해야 돼. 난 기대기만 하는 남자는 별로라서. 쓸데없이 질투하는 남자는 더 별로고.”
“자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대할게.”
카리나는 다시금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다리를 꼬아 올리며, 고개를 뒤로 젖힌다.
그 나른한 움직임에 입고 있던 셔츠가 슬쩍 위로 올라갔다. 허벅지의 끝에 머무른다. 르네거는 담요를 끌고 와 그녀의 다리에 덮어 주었다.
“옷을 사야겠습니다. 아무래도 지금 차림으로는 불편하실 테니까요.”
이 상태로 방 밖을 나가면 사용인들이 어떻게 될지 뻔히 보이는 상황이기도 했고 말이다.
카리나는 동의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래. 이런 걸 입고 레피오스 님을 만나러 갈 수는 없으니까.”
르네거는 카리나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그럼 내일 나가 볼까요? 함께 거리 구경도 하고, 돌아다녀 보는 겁니다.”
그는 기대에 찬 눈으로 말했으나, 이내 싸늘한 카리나의 시선을 받고 풀이 죽어 버렸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을 끝마친다.
“……그간 많은 일들이 있었으니까요. 기분을 전환할 겸.”
그는 두 손을 꼭 맞잡았다. 곧이어 들려올 카리나의 질책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르네거.”
역시. 그녀의 목소리는 사붓 굳어 있었다.
“어쨌든 우리는 적진 한가운데에 있는 셈이야. 지금쯤 자일은 이를 갈고 있을 거고, 라템도 눈치를 챘을 테니까. 네 마음은 이해하지만 지금은.”
“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자중해야 할 때이지요.”
르네거는 침울한 숨을 흘리며 말했다. 그러나 이 순간을 포기할 그가 아니었다.
“그럼 이렇게 하지요.”
그는 꽉 쥐고 있던 손을 풀며 말했다.
“아포칼리타와의 전투가 끝나면, 저와 함께 나가 주십시오.”
이 제안의 의미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한 가지는 카리나와 함께 나가 보고 싶다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한 가지는…….
‘전투가 끝난 후, 카리나가 살아 있어야 하니까.’
이유는 알지 못하지만, 르네거는 카리나가 사라질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건 아주 오래전부터 갖고 있던 느낌이었으나, 근래 들어 짙어졌다.
카리나는 아포칼리타가 멸망한 이후의 삶을 이야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부터 말이다.
그렇기에 이런 억지 같은 요청을 하는 것이리라.
“부탁인 거니?”
“강요라 하면, 들어주실 겁니까?”
카리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은 해 볼게.”
“생각만 하시는 겁니까?”
“그럼 뭘 더 바라니?”
카리나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하기야. 원래라면 단칼에 거절을 했을 테지. 이런 대답을 들은 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었다.
“나도 참 착해졌다니까.”
“…….”
“왜 대답을 안 하니?”
카리나는 르네거를 흘겨보며 말했다.
“당신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는 중이었습니다.”
“거짓말.”
“라템의 신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넌 이제 신자가 아니잖아?”
르네거는 꿀 먹은 것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카리나는 재차 그를 흘겨보았으나, 이 역시도 가벼운 웃음으로 흘려보냈다.
꽤나 오랜만에, 아니, 어쩌면 처음으로 맞이하는 노곤한 분위기였다.
르네거도, 카리나도, 모두 다 여유로운 분위기를 즐겼다.
“그럼 옷은 어떡하지? 다른 옷들이 있니?”
“사람을 부르겠습니다. 제작을 맡기면 되겠지요.”
“최대한 빨리 해야 해. 한번 마음 먹으니까, 레피오스 님을 빨리 보고 싶어졌거든.”
그에 또다시 욱하는 마음이 올라왔지만, 르네거는 방금 전 카리나의 말을 떠올리며 그것을 참아 냈다.
차분한 목소리로 물어본다.
“레피오스, 그분이 대체 누구입니까?”
“아, 너는 모르겠구나.”
카리나는 이해한다는 양 대답했다.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그녀는 입술을 오므리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툭, 투둑,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눈을 깜빡인다.
그러다 곧.
“그분은 아포칼리타의 중요한 인물이지.”
동경과 존경이 섞여 있는 것처럼 반짝반짝해진 눈을 하며 대답했다.
“아포칼리타를 처음으로 배신한, 변절자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