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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55화 (55/135)

55화

먼 과거, 그러니까 신이 있고 고대 마물이 있고 인간들이 막 창조되기 시작할 때.

태양의 신은 한 인간 여자와 사랑을 나누었다.

태양신은 여자를 마음 깊이 사랑하였으나, 그 여자는 간악한 술수에 휘말려 죽게 되었다.

태양신은 태양이 젖어들 만큼 슬퍼했으나, 아무리 신이라 할지언정 죽음을 거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태양신은 곧 마음을 추슬렀다. 그리고 여자가 죽기 직전 낳은 아이를 데리고 와 살뜰히 보살폈다.

아이는 태양신의 가호와 주변 신들의 보호로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러던 어느 날 주신께서 그 아이에게 묻기를,

-너는 무엇이 되고 싶으냐.

하니 아이는 놀라 무릎을 꿇고 경 배하며 대답하길,

-저는 인간을 구하고 싶습니다.

하여 주신의 허락을 받은 아이는 의술의 힘을 얻게 되었다.

그 후로 아이는 연약한 인간을 치료해 주는 데에 일생을 쏟게 된다.

* * *

“……라는 내용이 레피오스 님의 먼 과거 이야기야.”

카리나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던 르네거는, 궁금하다는 듯 조심스레 되물었다.

“하면 그분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살아남으신 겁니까?”

“그럴 리가. 그리고 그랬다면 아포칼리타와 함께하지 않았겠지.”

그녀는 가벼이 대꾸했다.

“그분은 죽었어. 신과 고대 마물간의 전쟁에 휘말려 죽었다고 하더라고.”

그렇다면 아포칼리타의 수장이 살려 냈다는 것인가. 르네거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의 생각이 맞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살려 냈지. 의술 능력이 온전해야 하니 기억을 오롯이 살려서 말이야.”

“그렇군요.”

“아버지가 살려 냈기 때문에, 그의 명령에 종속돼 버린 레피오스 님은 어쩔 수 없이 아포칼리타의 탑에 남게 돼. 그리고 나 같은 실험체들을 치료해 주었지.”

실험체. 그 단어가 괴기하게 들렸다. 동시에 마음이 아렸다. 카리나는 스스로 ‘인간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으므로.

르네거는 숨을 가다듬으며 얌전히 경청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포칼리타의 영역이 확장된 거야. 우리를 따르는 인간들이 많아진 거지. 수백, 수천 명……. 해서 레피오스 님은 그 인간들도 치료해 주길 원했어. 그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아포칼리타의 수장은 반대했군요.”

“맞아. 아버지는 인간을 벌레만도 못하게 보니까. 그런 곳에 귀한 힘을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지.”

카리나는 설핏 조소했다.

벌레로 보면 다행이지. 벌레는 죽이기만 할 뿐 그 이상의 행동을 하진 않으니까.

아버지는 인간을 가축하는 양식처럼 여겼다. 언제든 생명을 뽑아와 쓸 수 있는 재료.

아버지에게 있어 인간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왜인지, 카리나는 입안이 까끌까끌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에 격하게 분노한 레피오스 님은…….”

하지만 레피오스를 떠올리니 다시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웃음기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에게 약을 먹여 재우고, 아버지의 몸에서 마나핵 한 개를 꺼낸 후 도망쳤어.”

“마나핵이요?”

“그래. 우리 능력의 정수가 담겨 있는 마나핵.”

내 몸에도 열셋. 아니, 열다섯 개가 박혀 있지. 카리나는 자조했다.

“그림자에 숨는 능력을 가져갔어.”

아. 르네거는 감탄한 양 탄식을 뱉었다.

“그 덕분에 아버지에게 잡히지 않고 잘 살아갈 수 있게 된 거야. 지금 아버지는 죽었지만.”

일련의 이야기를 들으니, 레피오스라는 아포칼리타는 꽤 괜찮은 성정 같았다.

인간을 위해 아포칼리타를 배신하다니. 이런 경우는 듣도 보도 못하지 않았던가.

아포칼리타에는 악한 것만 남아 있는 게 아니구나.

르네거는 새삼스러운 감정을 느끼며, 카리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한데, 히론 님은 그분의 행적을 잘 알고 계시는 것 같던데요.”

“모두가 알아. 나 같은 실험체라면.”

카리나는 으쓱 어깨를 올렸다.

“레피오스 님이 말씀해 주시거든. 아플 때면 자신을 찾아오라고. 뭐, 아버지가 쫓아와도 도망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말이었겠지만.”

“대단한 분이시군요.”

“그래. 내가 좋아하는 분이야.”

존경하는 분이기도 하고. 카리나는 입속에 머무는 말을 삼키며 읊조렸다.

카리나는, 레피오스가 지독히도 부러웠다.

아버지를 배신하고 도망치는 것. 그 행위에 대한 대가가 얼마나 커다랄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피오스는 기꺼이 행동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

어쩌면 그렇게도 이타적일 수 있을까. 카리나는 레피오스를 떠올릴 때마다 경건해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나 역시도 탈출 계획을 세웠던 게 아니던가.

그가 없었다면 나 역시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을 감히 하지 못했겠지.

그러므로, 레피오스는 카리나에게 있어 중요한 인물 중 하나였다.

그녀는 매우 오랜만에 다시 만날 친우를 떠올리며, 목의 상처를 더듬어 보았다.

“그분께 가면 이 상처도 사라지겠지.”

르네거는 그녀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새하얀 목덜미가 보였다. 검은 금이 가 있는 상처도 보였고.

“나는 더 강해질 거고 말이야.”

르네거는 침묵했다.

치료가 된다.

강해진다.

카리나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받아들여야 했지만, 르네거는 묘한 답답함을 느꼈다.

그녀가 치료가 된다면, 강해진다면,

‘맹약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미 지금 맹약을 풀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풀고 있지 않고 있다. 이는 카리나의 치료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이 완전히 회복된다면,

‘더 이상 나는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르네거는 침음을 흘렸다.

그녀가 회복되는 것은 크게 기뻐해야 할 일이지만, 기쁜 동시에 착잡함도 느껴졌다.

이제 자신이 쓸모가 없는 것 같아서. 르네거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왜 그러니?”

그런 르네거를 이상하게 여긴 카리나의 말이었다. 그녀는 조금의 걱정이 담긴 눈으로 르네거를 바라보았다.

저 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살의가 짙었던 눈.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시린 한기는 그대로였으나, 그 너머에 깔려 있는 다정함이 엿보였다.

르네거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 않으셨습니다.”

뺨을 매만진다. 차가운 체온이 손바닥을 더듬듯 퍼져 나갔다.

“치료해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카리나는 피식 실소를 뱉었다. 르네거의 손목을 붙잡는다.

“가끔은 허락받지 않아도 괜찮아.”

그의 손바닥에 입을 맞춘다.

“그편도 재미있으니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르네거의 숨이 가까이 다가왔다. 벌려지는 입술 너머로 뜨겁고도 청명한 기운이 넘어왔다.

격하지만 따스한 손길을 느끼며, 카리나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역시, 나쁘지 않았다.

* * *

[드디어 레피오스를 만나게 되다니!]

히론은 기대에 찬 양 눈을 반짝이며 꼬리를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카리나가 레피오스와의 만남을 고대하는 만큼, 히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어쩌면 카리나보다 더 마음 깊이 레피오스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히론과 레피오스는 아주 오래전, 태초부터 함께 알았던 사이였으니까.

[레피오스를 만나면 라템 수장 놈의 말이 새빨간 거짓부렁이였다는 걸 알게 될 거다.]

히론은 르네거를 향해 말했다. 멀뚱히 서 있던 르네거는 놀란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이미 수장님의 말은 잊고 있었습니다만.”

[잊고 있었다 해도 안 돼! 그놈의 말에 흔들린 네가 잘못된 것이다!]

르네거는 침묵했다.

저 자신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장의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는 사실을.

자신도 모르게 히론의 말을 의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항변할 수 없었다. 묵묵히 입을 다문다.

“히론은 참 그래.”

카리나의 말이었다.

“언제는 르네거를 데리고 오자고 난리를 치더니, 지금은 르네거를 구박하고 말이야.”

[뭐, 뭐?]

“사실이지 않니? 라템에서 네가 르네거를 엄청나게 비호했었는데.”

[그, 그건……!]

그녀는 히론의 목덜미를 살살 긁었다.

“참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르네거는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히론과, 카리나를 번갈아 바라보다 이내 히론에게 시선을 집중한다.

“저를 그렇게 좋아하실 줄 몰랐습니다.”

“그래. 널 좋아한다니까.”

“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

[이, 이……! 아니다! 난 너를 싫어해!]

히론의 절박한 외침에, 르네거와 카리나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서로를 마주 보며 웃는다.

[뭐야, 왜 그렇게 웃느냐? 내 말을 믿지 않는 것이냐?]

히론은 짜증이 난 듯 꼬리를 파르르 떨며 말했다. 르네거는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아니요, 믿습니다. 히론 님은 저를 싫어하시지요. 알고 있습니다.”

그는 다소 침울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조금은 속상합니다. 저는 히론 님을 좋아하니까요.”

히론은 멋쩍어진 듯, 날름거리던 혀를 집어넣고 검은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괜찮습니다, 저는. 저를 싫어하는 분을 좋아하는 것이 한두 번도 아니고…….”

[……싫어하는 게 아니다. 안 좋아할 뿐.]

“정말이십니까?”

르네거는 눈에 띄게 밝아진 얼굴로 되물었다.

“그럼 제가 히론 님을 한 번만 안아 봐도 괜찮겠습니까?”

그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간 히론을 만져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카리나는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돌렸다. 히론은 기가 차다는 양 하, 숨을 뱉었다.

[아무래도 저놈을 잘못 데리고 온 것 같다. 저런 건방진 놈이 라템의 신자였다니. 말세다, 말세야.]

그는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돌렸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않느냐! 어서 레피오스를 만나러 가야지!]

“그래, 그래. 알았어.”

카리나는 히론을 다독이며 다시 발을 내디뎠다.

“가자. 히론은 나중에 얘가 잘 때 한번 만져 봐.”

[싫다!]

“약이라도 먹여서 재우든가.”

[카리나, 너……!]

카랑카랑하게 외치는 히론을 보며, 카리나와 르네거 모두 비슷한 웃음을 내뱉었다.

정말, 평안한 분위기였다.

이제껏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언제 끔찍한 전투가 있었냐는 듯, 언제 괴로운 일들이 있었냐는 듯, 노곤한 일상.

이 일상이 깨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르네거는 그렇게 바라고 바라며 카리나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저거 뭐야.”

카리나의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르네거는 성검의 손잡이를 쥐며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카리나가 바라보고 있는 곳을 응시한다.

그곳에는 한 사내가 있었다.

큰 키, 다부진 어깨, 은백색의 머리칼, 검게 그을려진 피부……. 저건 대체.

르네거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카리나를 보호하는 듯 앞을 막으며 두 다리를 벌렸다.

“저건 누구입니까?”

르네거의 목소리가 들려왔음에도, 카리나는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눈을 비벼 본다. 하지만 보이는 건 변함이 없다.

이마를 꾹 눌러 본다. 하지만 뇌리에 들어오는 건 변함이 없다.

저건.

저건 분명.

“카리나!”

샐러딘이었다.

아,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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