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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56화 (56/135)

56화

샐러딘 아포칼리타는 기쁨에 겨워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 카리나를 찾아 왔던가? 얼마나 고된 노력을 하며 그녀의 흔적을 쫓았는가.

그 애씀의 결실이 눈앞에 닥쳐 있다. 샐러딘은 입술이 찢어질 듯 환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카리나!”

샐러딘은 카리나를 향해 단번에 뛰어갔다. 그의 은백색 머리칼이 양껏 나부꼈다.

“보고 싶었어!”

그는 카리나의 허리를 그러안았다. 어깨를 파묻으며 그녀의 체취를 들이켠다.

꿈에 그리던 순간.

지금 이 순간을 마음껏 즐기고 싶었다. 그는 더더욱 카리나에게 파고들었다.

하지만.

“잠깐.”

카리나는 그런 샐러딘의 어깨를 잡은 후 뒤로 밀어냈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샐러딘의 면면을 훑었다.

헤어져 있던 시간은 고작 3년. 그뿐이건만, 샐러딘은 놀랄 만큼 많이 변해 있었다.

‘2차 성장을 마친 거겠지.’

내려다봐야 할 정도로 작았던 키는 훌쩍 커 버렸고, 통통했던 볼살이 사라져 코와 턱선이 날렵했다.

개중 그나마 과거와 비슷한 건 눈뿐이었다.

쌍꺼풀이 없는 커다랗고 동그란 눈. 그 안에 박힌 새끼만 눈동자.

‘……더 개 같아졌는데.’

어째 주변에 개를 닮은 것들만 모이는 것 같다. 카리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숨을 들이켰다.

“날 어떻게 찾았니? 자일에게 들었어?”

졸지에 떨어지게 된 샐러딘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토라진 어투로 대답한다.

“그놈이 나한테 말해 줬을 것 같아? 치사한 새끼. 끝까지 말 안 하더라.”

샐러딘은 혀를 차며 미간을 찌푸렸다.

“냄새를 맡았어. 라템 냄새에 월계 수향이 같이 나더라고. 그 정도의 짙은 냄새면 라템의 대신전일 거라 생각했어.”

그는 무의식중에 코를 킁킁거렸다. 코끝을 손바닥으로 쓸며, 다시 말을 잇는다.

“그래서 지켜봤지. 한참 보는데, 그때 카리나가 나왔어. 날개를 펴고.”

아, 이런. 페넬로피 때문에 짜증이 나 비행했던 걸 본 모양이다. 카리나는 이마를 짚었다.

“그러다 목의 상처를 봤고……. 언젠간 치료를 할 테니, 레피오스 님을 찾아올 거라 생각했어.”

“그래서 내가 올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리려 했어?”

“응. 난 기다리는 건 잘하니까.”

샐러딘은 대답하며 활짝 웃었다. 아이 같은 새맑은 웃음이 눈과 입에 스며들었다.

그는 양팔을 활짝 벌렸다. 그리고 카리나를 안았다. 아니, 안으려고 했다.

“왜…….”

샐러딘은 뒷걸음질로 제 포옹을 피한 카리나를 바라보았다. 침울한 시선을 내보인다.

“날 안아 주지 않는 거야?”

과거에는 곧잘 안아 주던 카리나가 아니었던가.

저가 조금만 속상한 표정을 지어도 품 안에 넣고 토닥여 주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서러운 마음이 목 끝까지 치달았다.

“이젠 내가 싫어? 응?”

그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카리나를 바라보았다.

하아.

카리나는 한숨을 길게 뱉으며 관자놀이를 지압했다.

아무래도 샐러딘은 자신이 얼마나 커진지 모르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말을 할 리 없지 않은가.

카리나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무릎 굽혀.”

샐러딘은 냉큼 무릎을 굽혔다. 그제야 카리나의 손이 머리에 닿았다.

가느다랗고, 서늘한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파고들었다.

샐러딘은 기분이 좋다는 양 그릉거리며 입술을 들어 올렸다.

“보고 싶었어, 카리나.”

“그래.”

“정말 보고 싶었어.”

“알았어.”

“카리나는?”

샐러딘은 축축한 눈망울로 되물었다.

“내가 안 보고 싶었어?”

그의 속눈썹이 파들거리는 게 보였다.

낑낑거리는 강아지처럼, 그는 온 힘을 다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는 중이었다.

카리나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머뭇거림이 머무른다.

보고 싶었다, 고 하면 거짓말일 테다. 샐러딘을 떠올린 적은 있어도 그를 그리워한 적은 없으니까.

그렇지만 보고 싶지 않았다고 대답하면 울어 버릴 것 같은데.

몇 년간 자신을 찾아 쫓아다닌 샐러딘의 열정을 생각해, 그를 서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이걸 어쩐다.

카리나는 당혹을 감추지 못했다.

“카리나. 이쪽으로 오십시오.”

이때, 르네거가 그녀를 잡아끌었다.

훅, 다가온 청량한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답답한 공기에 한 줄기 빛처럼 느껴지는 향이었기에, 카리나는 다소 풀어진 얼굴로 르네거를 대했다.

하지만 이상하다. 이유를 모르겠지만, 르네거의 얼굴은 바싹 굳어 있었다.

왜지.

카리나는 의문을 품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넌 뭐야?”

샐러딘의 정신이 르네거에게로 돌려졌다.

“네가 그 라템 새끼냐? 카리나에게 붙어 다닌다던?”

샐러딘은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노후했다.

“에이 씨, 뭔데 이렇게 커. 재수 없게.”

저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는 게 영 마뜩잖은 모양이었다.

퉤.

그는 르네거의 옆쪽에 침을 뱉으며 눈을 치켜떴다.

“인간 주제에 감히 카리나 옆에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나와 카리나의 대화를 방해해? 정말 죽고 싶은 거냐?”

샐러딘의 눈에 번뜩 이채가 돌았다. 손톱이 길어지는 게 보였다. 송곳니가 입술 바깥으로 삐져나오기 시작했다.

저 다혈질은 변하질 않네.

카리나는 르네거를 잡아끌며 앞으로 나섰다.

“샐러딘.”

그녀가 이름을 부르자, 샐러딘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녹아 버린 얼굴로 카리나를 바라보았다.

“난 카리나가 내 이름을 불러 주는 게 너무 그리웠어.”

그는 치대듯 아양을 피우며 맑게 웃었다. 카리나의 손을 붙잡는다.

“다시 불러 주면 안 돼?”

하아.

카리나는 다시금 한숨을 뱉었다.

탑에 있을 적, 샐러딘과 가까웠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탑을 탈출하기 위해서 샐러딘의 성장을 막아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에 내렸던 선택이었다.

카리나는 딱 그 정도의 마음일 뿐이었지만, 샐러딘은 아닌 모양이다. 그러니 이렇게 몇 년이 지나더라도 나를 찾아 쫓아오지.

적당한 거리를 두었어야 했다. 이 모든 건 내 불찰이다.

카리나는 들끓는 생각을 정리하며 샐러딘의 머리 위에 다시 손을 올렸다.

“그래, 샐러딘. 그러니까 그만해. 르네거는 나와 맹약으로 얽혀 있는 인간이니까.”

그 말에, 르네거가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보다 샐러딘을 신경 쓰는 게 우선이었다.

“맹약? 라템의 인간과 맹약을 맺었다고? 왜?”

“그럴 사정이 있었어.”

구구절절한 사연을 이야기할 수 없으니, 둘러대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렇기에 더 샐러딘을 자극할 수밖에 없었다.

“저 새끼가 카리나를 귀찮게 한 거지?”

“그런 거 아니야.”

“뭐가 아니야! 그렇지 않고서야 카리나가 인간 새끼를 데리고 다닐 리 없잖아!”

“샐러딘.”

“마음에 안 들어!”

그는 눈을 번뜩이며 르네거를 노려보았다. 또다시 달려들 듯한 모습.

말려야겠네. 카리나는 르네거를 더 뒤로 물러서게 하려 했다.

하지만.

“저 역시.”

르네거는 카리나의 앞으로 나섰다. 샐러딘과 마주 선다.

“딱히 그쪽이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만.”

르네거의 얼굴은 바싹 마른 밀짚처럼 건조했다. 내려다보는 시선에는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뭐?”

샐러딘은 그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다는 듯 당황함을 내비쳤다. 르네거는 피식 입술을 비틀었다.

“카리나를 오래 찾아다니셨나 봅니다. 한데 저는 카리나와 오랜 시간 함께 있으면서 그쪽의 이야기를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만.”

‘오래’, ‘단 한 번도’라는 말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것 같다면 착각일까.

카리나는 르네거와 샐러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한 번이라도 그쪽의 이야기를 들었다면 제가 경계심을 드리우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그쪽은 말로도 얼굴로도 처음이니, 당연히 카리나를 보호하려 나선 게 아니겠습니까.”

르네거는 카리나와 연결돼 있는 샐러딘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

탁, 그는 손을 내리쳤다.

“잡지 마십시오.”

샐러딘의 손은 허공을 배회했다. 그 즉시, 샐러딘의 눈에 살기가 깃들었다.

“이 새끼가 뒈지려고 환장을 했나……!”

송곳니가 길쭉하게 튀어나왔다. 뾰족해진 손톱이 금방이라도 르네거를 할퀼 듯 날을 세웠다.

“감히 인간 주제에 나를 만져?”

“그러는 그쪽도 카리나의 허락 없이 카리나를 만지지 않았습니까.”

“그쪽? 그쪼오옥?”

“그럼 뭐라 부릅니까? 저도 카리나처럼 당신의 이름을 부를까요?”

“아악! 이 미친 새끼가!”

쾅!

샐러딘의 주변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가장 높은 온도의 색, 새하얀 빛의 불꽃이 솟구쳐 주변을 가득 메웠다.

우웅.

르네거 역시 성검을 빼 들었다. 르네거의 힘이 검신에 스며들어 빛을 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하아.

카리나는 거듭해 한숨을 뱉었다.

“샐러딘.”

그녀는 샐러딘을 향해 손을 튕겼다.

“르네거.”

르네거를 향해 손을 튕겼다.

그 즉시, 그들의 몸이 땅으로 내박쳐졌다.

“크흑!”

“윽! 카리나! 아파!”

땅에 처박혀진 그들은 움직이려 애를 썼으나,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카리나가 압력으로 그들을 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너무 착했니?”

카리나는 팔짱을 끼며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좋은 말로 그만하라 할 때 했었어야지.”

후. 카리나는 입으로 바람을 불어 내려온 머리카락을 걷어 냈다.

“둘은 이러고 있어. 반성해.”

“잠깐만! 카리나!”

“풀어 주고 가십시오!”

“싫어.”

카리나는 내박쳐져 있는 그들을 뒤로하고 발을 옮겼다.

히론은 진즉 레피오스의 집으로 기어들어 갔다. 나 역시도 그가 마음 깊이 보고 싶은 바.

“내가 올 때까지 얌전히 있어.”

이 떨거지들은 두고 가야 함이 맞았다.

“안 그러면 두고 갈 테니까.”

그들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카리나는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레피오스를 만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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