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촤악-
자일은 날개를 활짝 펴 보았다. 아직 찢긴 부분은 남아 있었지만, 이 정도면 비행에는 큰 문제가 없을 터.
‘…….’
자일은 날개를 접으며 어금니를 세게 깨물었다.
라템의 인간.
르네거 라템이라 하였던가.
한낱 인간에게 패배했다. 이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으나, 또한 믿어야만 하는 사실이었다.
방심한 탓이다. 후에 같은 일이 있다면 결코 긴장을 늦추지 않으리라.
자일은 차분한 숨을 뱉으며 장발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카리나가 그 인간에게 힘을 불어 넣어 주는 것을 보았으니, 인간의 힘은 온전히 그만의 것이 아닐 터.
카리나를 빼앗고,
그 인간을 죽이리라.
자일은 새빨간 눈을 번뜩였다.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이 그의 새하얀 얼굴을 따라 흘러내렸다.
터벅, 터벅.
자일은 지하실의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지나, 두꺼운 철문이 그를 반겼다. 자일은 능숙하게 철문을 밀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퀴퀴한 냄새가 훅 풍겨졌다. 썩은 시체의 냄새, 눅눅한 곰팡이의 냄새, 피를 받아먹고 사는 마물 쥐의 냄새…….
그러나 자일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묵묵히 앞만 보며 걸어갈 뿐.
그가 걸음을 멈춘 건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지하실의 가장 끝에 와 있는 그는, 커다란 유리관 앞에 섰다.
유리관 바깥에는 굵은 호스가 가득했고, 그 안에는 연녹색의 물이 가득 차 있었다. 물, 이라기보다는 진득진득하고 무거운 느낌의 액체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팔과 다리와 반만 남아 있는 머리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
“아버지.”
아포칼리타의 아버지, 카오스가 존재했다.
“카리나를 찾았습니다.”
카오스의 남아 있는 한쪽 눈이 번뜩 떠졌다.
* * *
으음.
카리나는 야트막한 신음을 내며 뒤척였다. 그러다 팍-!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둘러본다. 이곳은 르네거의 저택이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할당된 방.
분명 자신은 레피오스를 만나러 가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를 만나 치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더 나아가 아버지 이야기를 들어 샐러딘에게 확인을 한 후…….
그 뒤로 기억나지 않는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카리나는 한숨을 뱉으며 이마를 짚었다.
이때였다.
[카리나야!]
“일어나셨습니까?”
“카리나! 괜찮은 거야?”
르네거와 샐러딘, 그리고 히론이 한꺼번에 다가왔다.
찻잔이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저들끼리 앉아 카리나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던 듯싶었다.
“내가 왜 여기에 있어? 어떻게 된 거니?”
르네거는 카리나의 당황스러움을 이해한다는 듯, 그녀를 다독이는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지셨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침울함이 섞여 있었다. 아무래도 카리나를 완전히 치료해 주지 못한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는 듯싶었다.
“곧장 레피오스 님께 진찰을 받았고, 충격을 받아 쓰러지신 것 같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그렇잖아도 몸이 많이 약해져 있는 상태라고 하시면서요.”
[그리고 나흘에 한 번씩 자기를 찾아오라 하였다. 그때마다 같이 가야 한다. 알았지?]
카리나는 침음을 흘렸다.
대체 이 몸이 얼마나 약해져 있으면 정신적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나, 싶었다가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됐다.
그래. 충격적이었지.
너무 큰 충격을 받아 쓰러질 수밖에 없었지.
-카오스는 살아 있다.
-맞아. 살아 있어.
전혀 생각도 못 했던 이야기였다.
이런 건, 원작에서도 나오지 않았던 일이었으니까.
“샐러딘. 이리 와.”
카리나는 샐러딘의 팔을 잡아끌었다.
“눈을 뜨자마자 나를 찾아 주다니……. 역시 카리나는 내가 엄청 보고 싶었던 거…….”
“어떻게 된 일이야?”
“그래. 아니구나.”
샐러딘은 서운하다는 양 고개를 떨어뜨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입을 다 물지는 않았다.
“자일이 아버지를 부활시켰어.”
그는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탑의 잔해에서, 아버지의 마지막 살점을 찾았대. 그리고 아버지가 숨겨 둔 마나핵을 찾아서…….”
“아버지가 마나핵을 숨겨 뒀다고?”
카리나는 놀라 반문했다.
아니. 그럴 리 없다.
분명 책 속에서 서술됐던 그의 마나핵은 2개.
레피오스가 가져간 그림자의 능력과, 내가 가져온 네크로맨서의 능력. 이뿐이 아니었던가.
더욱이 자신이 확인한 것도 단 2개뿐이었다. 한데 대체 어떻게……!
카리나의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나도 몰라. 마나핵을 한 개 숨겨 뒀었대. 그걸 이용한 거고.”
그녀의 낙담을 본 샐러딘은 빠르게 덧붙였다.
“하지만 아직 미완성 상태야. 레피오스 님이 보셨다고 한 건 아마도 껍데기일 거야. 자일이 만들어 놓은 껍데기. 그걸 움직이기 위해 마나핵을 넣었는데, 살점이 다 녹아 버렸어. 아버지는 원래 해골이었으니까. 그래서 지금은 실험실에 있는 상태야.”
그렇다면 불행 중 다행이다. 하지만 불안을 완전히 놓을 수는 없었다.
원작에서는, 자일이 아버지를 죽이고 탑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자일이 아포칼리타의 수장이 돼 세계를 지배하고자 한다.
자신이 한 것은 자일 대신 탑을 무너뜨린 것뿐이었다.
‘……설마.’
그래서, 자일이 마음을 바꾼 것인가.
나를 붙잡으려고 아버지를 부활시킨 거고?
이렇게 생각하니 머리가 터질 듯이 아파 왔다.
‘미친 새끼 같으니라고.’
으득.
카리나는 이를 갈았다.
이로써 원작이 완전히 비틀려 버렸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어쩌면 나 때문이 아닐까 싶었으나…….
이제 무슨 상관이 있나 싶었다.
어차피 나는 아포칼리타를 멸망시키겠다는 결심을 했고, 더 이상 수면 아래에서 숨죽이고 있지 않을 테니까.
“더 빠르게 움직여야겠네.”
카리나는 중얼거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샐러딘이 가까이 다가왔다.
“빠르게 움직이다니? 뭘 할 건데?”
그러고 보니 샐러딘은 아무것도 모르지. 카리나의 입이 열렸다. 하지만 르네거의 말이 먼저였다.
“아포칼리타를 멸망시킬 계획입니다.”
샐러딘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꿈뻑, 꿈뻑.
몇 번이고 꿈틀거리던 눈은 이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그는 소리치며 르네거의 멱살을 붙잡았다.
“너 이 새끼……! 네가 카리나를 꼬드긴 거지? 너 때문이야!”
“샐러딘.”
“미친놈이 뒤질 거면 혼자 뒈지든가 왜 엄한 카리나를 끌고 들어와서……!”
“샐러딘, 그만.”
카리나는 샐러딘의 허리춤을 잡아당겼다.
“내가 제안한 거야. 르네거는 나를 따라오는 거고.”
“하지만!”
“잘 생각해 봐. 내가 갑작스러운 선택을 내린 것 같니?”
“그, 그……!”
샐러딘은 입을 뻐끔거렸다.
놀람이 앞서 들었지만, 마냥 느닷없는 일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지 않았는가.
카리나는 탑에 있을 때에도, 그 공간이 혐오스럽다는 기색을 항상 내비쳤었으니까.
-역겨워.
형제들을 바라볼 때에, 탑을 바라볼 때에, 아버지를 바라볼 때에 그녀가 항상 해 왔던 말이 아닌가.
그런 면모를 보았을 때, 지금의 결정은 나름대로 이해가 되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래. 카리나라면 그럴 수도 있겠네.”
후우.
샐러딘은 숨을 고르며 어깨를 들어 올렸다.
“그럼 나도 함께해.”
그는 카리나의 손을 붙잡았다.
“더 이상 카리나와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 지긋지긋한 탑으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고.”
이것 봐라.
카리나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샐러딘이 합류하게 되면 좋은 전력으로 활용할 수 있을 테다.
특히 자일과 싸울 때 르네거와 합공하게 되면 더 좋을 테지.
아, 하지만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었다.
“잊고 계신 것 같은데.”
르네거와 샐러딘의 관계였다.
“이 집의 주인은 저입니다. 그러니 제게 허락을 구하셔야지요.”
르네거와 샐러딘은 도무지 협력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르네거는 삐딱한 자세를 하며 샐러딘을 내려다보았다.
“어디 한번, 제게 부탁해 보시겠습니까?”
르네거는 비식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샐러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손이 발발 떨리는 게 보였다.
“이, 익……!”
그의 손에 새하얀 털이 올라왔다. 손톱이 뾰족해지기에 이르렀다.
또 싸우려나.
카리나는 그들을 말리려 움직이려 했다.
“에이 씨, 카리나! 쟤가 나 괴롭혀!”
샐러딘은 싸우는 대신 카리나에게 매달리는 것을 선택했다.
카리나에게 밉보이지 않으려 하는 이유도 있었고, 르네거와 싸워도 승산이 없으리란 이유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알아챈 카리나는 작게 조소했다. 그래. 이 정도면 내가 통제할 수 있을 테다.
“르네거.”
카리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르네거를 불렀다.
잠시 머뭇거리던 르네거는, 이내 비웃던 입술을 돌이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샐러딘 님께는 방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와, 너는 진짜 카리나 말만 듣는구나. 미친놈.”
샐러딘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르네거는 그런 샐러딘을 가볍게 무시했다. 카리나를 바라보며 생긋 웃을 뿐.
[카리나야.]
이런 와중, 히론은 카리나의 다리를 타고 몸까지 올라왔다. 그는 느린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네게 물어야겠다.]
그는 검은 눈을 번뜩이며 혀를 날름거렸다.
[너의 계획이 무엇이냐?]
계획이라.
카리나는 히론의 말을 그대로 더듬으며 시선을 높이 던졌다.
창밖을 내다본다. 푸르른 하늘, 광활한 대지.
저곳을 멀리멀리 내다보다 보면 데이펜의 성전이 보일 것이고 캄바이트의 성이 보일 것이고 라템의 신전이 보일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다 보면 아포칼리타의 탑이 보이겠지.
아포칼리타를 멸망시킬 수 있는 건, 그보다 더 인간과 가까이에 있는 것들이다.
그것을 이용해야만 했다.
“연합군과 동맹을 맺을 거야.”
원작에서 있었던 일.
아포칼리타와 연합군의 동맹.
그 자리를 자신이 뺏어 주리라.
카리나는 그렇게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