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페넬로피.”
아힌 데이펜은 침대에 쓰러져 있는 페넬로피의 팔을 잡아당겼다.
“오늘도 약을 먹지 않았다면서. 자꾸 이럴 거야?”
카리나 아포칼리타와의 전투 이후, 망가진 페넬로피의 몸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이는 그녀가 치료에 의지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러다 더 몸이 안 좋아지면 어떡하려고 그래. 그러지 말고 일어나.”
아힌은 힘을 주어 페넬로피를 일으켰다. 하지만 페넬로피는 다시 누워 버렸다. 아힌의 팔을 뿌리친다.
“날 가만히 둬.”
“페넬로피.”
아힌은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미간을 좁힌다.
그날 이후, 페넬로피는 계속해 이런 상태였다.
르네거와 무슨 일이 있었느냐 묻는 것도 이제는 지쳤다. 답이 없는 허공에 계속해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는 건, 페넬로피는 더 이상 르네거를 전처럼 생각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잘된 일이지.’
여기서 더 나아가 분노까지 치달았으면 좋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힌의 희망 사항이었다.
아힌은 이런 생각을 까마득하게 지우며 페넬로피의 손을 붙잡았다.
“이렇게 치료를 받지 않으면, 다음 달에 있을 라템의 행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될 거야.”
“……행사?”
“그 반응을 보니 아무것도 듣지 못했나 보구나.”
아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라템의 수장이 큰일을 치렀어.”
그 늙은이가 병석에서 일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 그것은 바로,
“새로운 성검의 주인이 나타났대.”
성검의 주인을 찾는 것이었다.
르네거를 대체할 수 있는.
“뭐?”
페넬로피는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하며 아힌을 쏘아본다.
“하지만 성검은 오라버…… 아니, 르네거가 가지고 갔잖아. 그런데 어떻게?”
“라템의 모든 신관들이 힘을 불어넣은 검이 존재한대.”
“설마, 성검을 만들었다는 거야?”
“그 뜻이겠지.”
“미쳤구나.”
페넬로피는 얼굴을 굳혔다.
성검이 무엇인가? 신의 성물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신의 성물이 무엇인가? 신이 인간에게 내려 준 은혜가 아니던가?
한데 그런 것을 작위적으로 만들어 내다니…….
신께서 노하실 게 분명했다.
페넬로피는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서, 새로운 성검의 주인은 누군데?”
“세카이나의 신전에서 찾아온 아이야. 그러니까 이름이…….”
아힌의 눈에 반짝 이채가 돌았다.
“케셰트 라템.”
페넬로피의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그를 본 아힌은, 그녀의 손을 폭 감싸며 생긋 미소 지었다.
“네가 보면 분명 좋아할 거야.”
내가 만들어 놓은 인간이니까.
아힌은 반짝반짝하게 웃으며 말을 마쳤다. 그 웃음에는, 조금의 악의도 찾아볼 수 없었다.
* * *
오늘은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고 카리나는 생각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만 하더라도 하루가 이렇게 흘러갈 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샐러딘을 만나고, 레피오스를 만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까지 듣지 않았던가.
한 가지의 일만 있어도 마음이 좋지 않았을 텐데, 이렇게 갑작스레 많은 일을 겪어 버리다니.
정신이 버티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평온한 삶을 간절히 바랐으나, 그럴수록 그 삶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어쩌면 바람이란 것은 원하면 원할수록 갖지 못하게 되는 게 아닐까.
카리나는 자조하며 조소했다.
‘당분간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하지만 르네거와 샐러딘을 생각하면 절대 이루어지지 못할 바람 같았다.
둘은 저녁 내 아옹다옹 다투기만 했다. 샐러딘이 파들거리며 소리치고, 르네거는 무시하는 그림이었지만.
‘그래도, 나쁘진 않지.’
그래. 나쁘지 않았다. 더 나아가서 말하자면 이 안에서도 나름의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
북적거리는 저택, 나를 위해 주는 이들, 조금의 희망이 보이고 있는 미래…….
‘괜찮아지고 있는 거겠지.’
이곳에 태어나 처음으로 느껴 보는 만족감에, 카리나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침대에 몸을 뉠 수 있었다.
하지만 곧장 눈을 감을 수는 없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르네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카리나는 눕혔던 몸을 일으켰다.
“들어와.”
그녀의 말에, 르네거는 느리게 문을 열고 빠르게 걸어 들어왔다.
그는 잠자리를 준비한 듯 얇은 실크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덕분에 몸의 윤곽이 보다 잘 드러나 있었다.
벌어진 어깨와 두툼한 몸, 풀린 셔츠 너머로 보이는 쇄골 뼈까지.
‘……유혹하러 온 건가.’
카리나는 뺨을 긁적이며 그를 맞이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레피오스 님께서 부탁하신 일이 있습니다.”
말을 하는 그의 얼굴은 꽤 수척했다. 평소에도 그늘이 져 있는 눈가였지만, 오늘은 특히 심했다.
그래서인지 더 피폐한 느낌을 주었다. 어딘가 금욕적인 느낌을 주기도 했고.
“부탁이라니? 어떤?”
카리나는 정신을 다잡으며 물었다. 르네거는 짧은 침음을 뱉었다.
-나의 힘을 넣어 주긴 했지만, 빠른 회복을 위해서라면 너의 도움도 필요하단다.
-카리나의 몸은 많이 약해져 있으니 말이다.
레피오스의 말은, 르네거의 마음에 똬리를 잡고 있던 불안감을 커지게 만들었다.
카리나는 자신 때문에 페넬로피의 공격을 받았다. 그 결과 전보다 약해졌다. 이건 모두, 나 때문이다.
이대로 둘 수는 없다.
르네거는 바싹 마른 눈가에 힘을 주었다.
“당신이 거부하더라도, 제 힘을 전달하라는 당부가 있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런 말씀을 하셨었지.”
카리나는 주억이며 르네거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마치 그 손과 연결된 실에 묶인 것처럼, 르네거는 홀린 듯 카리나에게로 다가갔다. 그녀의 옆에 몸을 앉힌다.
“우리의 맹약도 다시 걸어야 할 텐데.”
카리나는 르네거의 손과 자신의 손에 새겨져 있는 맹약의 문양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의 맹약은 널 위한 맹세로 이루어진 거니 말이야.”
현재 맹약의 조건은 르네거가 라템의 대신전까지 무사히 가는 것.
그건 이미 이루어져 있는 상태이기에, 언제든 맹약을 풀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던 건 카리나의 치료를 위해서였고.
“이번에는 당신을 위한 맹세로 하겠습니다.”
“그래?”
카리나는 슬쩍 웃으며 몸을 앞으로 숙였다.
“어떻게 할 생각이니?”
르네거는 펼쳤던 손을 바르쥐었다. 고개를 돌려 카리나를 바라본다.
“당신이 온전한 힘을 되찾기 전까지, 저와 함께 있는 것으로요.”
흐음.
카리나는 비음을 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건 네게 더 좋은 일 아니야?”
“당신에게도 좋은 일이니 괜찮지 않겠습니까.”
르네거는 말하며 콧잔등을 사붓 찌푸렸다.
항상 이렇게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한다니까.
카리나는 생각하며 눈을 깜빡였다. 허락한다는 뜻이었다.
“지금, 다시 할까요?”
그는 카리나의 뺨을 감쌌다. 뺨과 귀가 다 덮일 정도로 커다란 손이 그녀를 자분거렸다.
털썩.
르네거는 카리나의 몸을 그대로 침대에 눕혔다. 그녀의 위로 쓰러져, 코끝을 맞댄다.
숨이 느껴졌다. 그리고 체취가 느껴졌다.
닳아 버릴 것처럼 뜨거운 숨, 쾌청할 만큼의 청량한 향.
공존할 수 없는 두 가지의 것이 르네거에게는 함께 있었다. 그렇기에, 카리나는 더욱 그를 내칠 수 없었다.
“참 재미있어.”
카리나는 그런 르네거의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너와 내가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니.”
피식, 실소를 터뜨린다.
“네가 내게 마구잡이로 덤벼들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야.”
르네거는 눈썹을 찡그렸다.
“지난 일을 이야기하라 하시면 전 더 많은 과거를 꺼낼 수 있습니다만.”
“그래. 그만하자.”
빠르게 꼬리를 마는 카리나는 귀엽기 짝이 없었다. 르네거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새삼스러운 감정을 느꼈다.
그래.
그녀의 말대로, 서로 날을 세우며 으르렁거렸던 것이 바로 전날의 일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그녀를 보기만 해도 행복하고, 기쁘고, 더 나아가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고, 기쁘게 해 주고 싶어지지 않았던가.
‘내가 가진 것을 포기할 만큼.’
카리나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지금까지도 라템에 있을 것이었다. 아니, 카리나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쿠히란에서 죽었을 것이다.
지금과 같은 행복을 느끼지 못했겠지.
르네거는 카리나의 뺨을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살결이 기꺼이 다가왔다.
“저는 어쩌면…….”
그는 카리나의 코끝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당신을 본 처음 그 순간부터, 이렇게 되길 원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입술을 아래로, 더 아래로 내려 그녀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다.
“그렇기에 당신을 거부하지 못한 것이겠죠.”
카리나의 입술이 벌어졌다. 르네거는 그 사이를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부드러운 혀가 그녀의 입속을 더듬었다. 마치 곳곳을 쓰다듬는 것처럼, 살가운 감촉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따끔한 통증이 찾아왔다. 곧이어 비린 냄새가 퍼졌다. 뜨거운 기운이 입안을 맴돌았다.
동시에 손바닥에 아릿한 고통이 느껴졌다. 하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 곧이어 새로운 문양이 새겨지는 것처럼, 차가운 기운이 손바닥을 쓰다듬었다.
르네거는 카리나의 뒷머리를 붙잡으며 귓바퀴를 더듬었다.
뜨겁기만 했던 기운이 천천히 점멸했다. 하지만 달뜬 열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르네거는 카리나의 입술을 핥으며 숨을 밀어 넣었다.
하아.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같은 숨을 내뱉었다. 르네거는 슬며시 입술을 떼어 내며 가볍게 입을 맞췄다.
“연합군과의 동맹은 위험합니다.”
카리나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나른한 시선이 그의 얼굴에 닿았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이야.”
“그들이 당신을 이용하려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럼 기꺼이 이용당해 줄 수 있어.”
카리나는 르네거의 뒷목을 그러안았다.
“어차피 내가 승리할 테니까.”
르네거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카리나를 바라본다. 그녀의 모든 것들을 눈에 담겠다는 양, 모두를 하나씩 쳐다본다.
“당신이 이렇기에 좋다는 말을 했었나요?”
그녀의 이마, 눈썹, 눈, 코, 입술, 그리고 내게 닿아 있는 손. 이 모든 것들이,
“좋아합니다.”
나의 것이다.
“저 자신보다 더.”
르네거는 다시금 그녀에게로 쓰러졌다. 일전보다 더 힘이 들어간 그의 손을 느끼며, 카리나는 더욱 세게 그를 그러안았다.
그와 맞닿은 살에서부터 퍼진 열은 손과 팔을 거쳐 가슴까지 밀려들어왔다.
두근.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