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이곳에 온 뒤, 카리나의 일과 중 하나는 햇볕을 맞으며 정원을 산책하는 것이었다.
이는 과거 쿠히란에 있었을 때와 비슷한 습관으로, 그녀는 이 행위에서 평안함과 고요함을 얻었다.
신발은 손에 들려 있다. 맨발로 맨바닥을 밟으며, 자연이 주는 싱그러움을 양껏 느끼는 그녀였다.
휘이잉.
바람이 불어왔다. 푸르른 나무를 수차례 쓸고 넘어온 바람에는 쾌청한 향기가 났다. 카리나는 숨을 크게 들이키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우두커니 놓여 있는 벤치에 몸을 앉힌다. 다리를 쭉 펴며, 몸을 뒤로 젖히고 하늘을 바라본다.
‘…….’
어제.
그러니까 르네거와 입을 맞췄던 어제의 일을 떠올린다.
별것 아닌 일이었다.
별것 아닌 행위였다.
르네거와 자신은 같은 행위를 반복했고, 반복되다 보니 익숙해져 별다른 감각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제 마음을 오롯이 드러낸 르네거는 과거보다 더 다정했으며, 더 절박했다.
그의 손은 과거보다 뜨거웠으며, 숨은 들끓었고 입술은 달아 있었다.
그렇기에 카리나도 무심하게 대할 수가 없었다. 그런 그를, 완전히 거부할 수 없게 되었다.
‘어느새 이렇게 돼 버린 건지.’
그녀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르네거가 곁에 있는 건, 필요에 의해서이다.
르네거와 입을 맞추는 건, 맹약에 의해서이다.
그 이상의 어떤 것은 없었는데…….
“불쌍하게 낑낑대니까 어쩔 수 없는 건가.”
르네거에게 일정량의 호감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시간이 흐르면서 차곡차곡 쌓인 감정이기 때문에, 쉽게 내버릴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정을 발전시켜 좋아한다든가, 하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아마도.’
카리나는 고개를 내려 손에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좋아합니다.
-저 자신보다 더.
그의 말을 떠올리니 입술 부근에 말간 열이 올라왔다. 또다시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후우.
카리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천천히 호흡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안 돼.
어차피 나는…….
‘인간이 아니니까.’
카리나는 그리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방으로 돌아가고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카리나!”
샐러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카리나는 허리의 둔탁한 통증을 느낄 수 있었다. 샐러딘이 끌어안은 것이었다.
“어디 있는지 한참 찾았잖아. 아침도 안 먹고 말이야.”
“우리는 식사를 하지 않아도 되니까.”
“하지만 맛있는걸! 원래 음식은 미식으로 먹는 거야. 카리나는 그것도 몰라?”
으쓱이며 말하는 샐러딘을 보며, 카리나는 눈을 가늘게 올려 떴다. 그의 코를 세게 꼬집는다.
“그리고 이렇게 갑자기 안지 말랬지. 네 몸이 예전에 비해 얼마나 커졌는지 몰라서 이러니?”
“하, 하지만!”
샐러딘은 붉어진 얼굴로 외쳤다.
“난 어린 애로 남고 싶어. 카리나에게는.”
그렁그렁한 눈망울이 보였다. 덩치만 컸지 귀여운 인상은 그대로인 샐러딘이었기에, 누구라도 그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하지만 카리나는 아니었다.
“안 돼. 너도 이제 컸잖아.”
단호한 말에, 샐러딘은 마치 벼락을 맞은 것처럼 충격받은 얼굴로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카리나는 정말 너무해.”
“날 이렇게 멋대로 찾아온 너도 너무해.”
“내가 말했잖아. 우린 다시 볼 거라고!”
“정말 그게 이뤄질 줄은 몰랐지.”
하아.
카리나는 한숨을 뱉으며 이마를 짚었다.
그러다 문득, 곁눈질로 샐러딘을 바라본다.
풀이 죽어 축 처진 어깨를 하고 있는 그.
그를 보자니 애잔한 마음이 올라왔다.
그래, 네가 무슨 죄가 있겠니.
카리나는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난 들어갈 건데, 너는?”
“카리나가 간다면 갈래.”
“그래.”
그들은 함께 걸음을 옮겼다.
푸르른 정원이 끝나는 지점에 새하얀 기둥이 보였다. 라템의 상징이 새겨져 있는 기둥이었다.
이 집의 주인도 라템의 신자였던 것인가. 카리나는 그 기둥을 흘러가듯 바라보다, 이내 그곳에 손을 올렸다.
파스슷!
그녀의 힘이 닿자마자 상징은 뭉개지듯 일그러졌다. 카리나는 기분 좋은 미소를 그리며 발을 옮겼다.
저택의 입구가 보였다.
오늘도 역시나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용인들.
그들은 카리나를 보자마자 밝은 얼굴로 인사를 건넸고, 뒤이어 따라오는 샐러딘을 보자마자 어두운 얼굴로 뿔뿔이 흩어졌다.
‘샐러딘의 성질머리를 알고 있어서 저러나.’
카리나는 피식 조소하며 발을 재촉했다. 이때였다.
“아!”
눈앞에 익숙한 외양의 인간이 나타났다. 어디서 봤더라, 싶었던 카리나는 이내 그녀의 잿빛 머리카락을 보며 누구인지 떠올렸다.
“안녕?”
그녀는 먼젓번 시중을 들러 찾아왔던 릴리였다.
릴리는 카리나의 인사를 받은 것이 하염없이 좋은 듯, 발개진 얼굴을 하며 푹 허리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카리나 님!”
귀여워라.
카리나는 흐뭇한 얼굴을 하며 릴리를 바라보았다.
“그, 그렇지 않아도 찾아뵈서 여쭤 볼 게 있었거든요…….”
“내게?”
“네. 다른 게 아니고…….”
슬쩍.
릴리는 샐러딘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곧 식을 올리실 계획이라면 드레스를 맞춰야 하는데 언제 디자이너를 부를지…….”
“뭐?”
역시나.
샐러딘이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는 황당한 얼굴을 하며 눈을 크게 올려 떴다.
“뭔, 뭔 식? 뭐? 뭐?”
샐러딘은 크게 노후하며 소리쳤다. 그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카리나 역시 당황스러운 건 매한가지였으니까.
“그러게.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르네거가 지시했니?”
“아, 아니요!”
릴리는 빠르게 손을 저었다.
“주인님이 이제껏 여성분을 데리고 온 적이 처음이라서요. 저희는 당연히 결혼이나 약혼을 위해 오신 줄 알고 생각했던 건데……. 죄송합니다.”
그러며 그녀는 또다시 허리를 푹 숙였다.
살펴보니 어깨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겁을 먹은 것이리라. 카리나는 릴리를 다독이려 했지만, 샐러딘의 날 선 말이 먼저였다.
“사과하면 다야? 내 기분을 이렇게 잡쳐 놓고?”
“샐러딘.”
“미친 새끼 밑에 미친 것들만 있네. 짜증 나게.”
“샐러딘, 그만.”
카리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짜증을 내고 있는 샐러딘을 붙잡았다. 그를 뒤로 잡아당기며, 릴리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괜찮으니 들어가 보렴.”
“그, 그래도 될까요?”
“그럼. 괜찮으니 얼른.”
“가, 감사합니다…….”
릴리는 다시 꾸벅 인사를 한 후 빠르게 자리를 피했다.
뛰면서도 몇 번이고 허청거리는 걸 보니 잔뜩 겁을 먹은 모양이었다.
하아.
카리나는 한숨을 뱉으며 다시 이마를 짚었다.
르네거도 이 일을 알고 있을까.
아니, 모르고 있을 테다. 그가 알았다면 진즉 중단시켰을 테니까.
그에게 말을 하면 어떤 반응이 나오려나.
분명 또 사과하겠지. 하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며 웃겠지.
뻔히 보이는 반응에, 카리나는 재차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에는 기분 좋은 미소였다.
“지, 지금 웃어?”
샐러딘의 말이었다.
“화도 안 나?”
“내가 왜 화가 나야 하니?”
“어, 어…….”
샐러딘은 할 말을 고르며 목소리를 흐렸다.
“카리나의 허락도 없이 자기들끼리 숙덕거린 거잖아! 인간들이 카리나에 대해 함부로 떠든 거잖아!”
“상황 설명을 들으면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잖니.”
“하지만!”
그는 뻐끔거리다,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더 할 말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샐쭉한 눈으로 카리나를 흘겨보았다. 그는, 지금의 카리나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카리나는 항상 인간을 좋아했어.”
“딱히.”
“아니야! 내가 인간을 죽이고 올 때면 날 보지도 않았잖아!”
그건 냄새가 나서…….
거기까지 말하고 싶지 않은 카리나는, 손을 저으며 샐러딘을 물렸다.
“난 들어갈 거야. 그리고 레피오스 님께 갈 거고. 너도 따라오지 말고 네 할 일 해.”
“카리나!”
샐러딘은 카리나의 손목을 붙잡았다.
“정말, 아포칼리타를 멸망시킬 생각이야?”
느닷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해가 되는 물음이기도 했다.
카리나는 방으로 들어가려던 몸을 비틀어 샐러딘과 마주 섰다.
“그럼?”
그녀는 팔짱을 끼며 턱을 들어 올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될 것 같아?”
녹색 눈동자에 차가운 빛이 어린다. 비췄던 다정함은 사라진 지 오래. 냉철한 살기만 남아 있을 뿐이다.
“자일에게 붙잡히겠지. 그리고 또 그 끔찍한 탑으로 끌려가겠지. 아버지가 부활했다고 하니 그에게도 수모를 당하겠지.”
“…….”
“너는 그걸 바라고 있는 거니?”
“나도 그건 싫어. 하지만.”
샐러딘은 입술을 짓씹었다.
“위험하잖아.”
그는 두 손을 세게 바르쥐었다. 띄엄띄엄, 하지만 힘이 들어간 음성으로 말한다.
“지금 병력이라 해 봤자 카리나와 나. 그리고 그 미친 인간 새끼밖에 없잖아. 이걸로 대체 어떻게 자일을 상대한다는 말이야?”
샐러딘의 걱정은, 당연히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넌 아직 르네거의 힘을 못 봤구나.”
카리나는 피식 조소했다.
성검의 힘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할 때에도 자일을 몰아붙였던 르네거가 아닌가.
지금의 르네거라면, 그리고 샐러딘이라면, 충분히 자일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너와 르네거라면 자일을 이길 수 있어.”
“……난 그놈이랑 붙어 있고 싶지 않은데.”
“그럼 가든가.”
“카리나!”
샐러딘은 너무하다는 듯 눈을 글썽거리며 눈썹을 내렸다.
“난 카리나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그렇지만 르네거와는 함께 있고 싶지 않고?”
“인간이잖아.”
샐러딘은 단호히 대답했다.
“카리나는 인간을 좋아할지 몰라도, 나는 아니야.”
인간들이 아포칼리타를 싫어하는 만큼, 아포칼리타도 인간들을 혐오했다.
이는 아버지가 주입한 까닭도 있지만, 우리가 인간들의 너무 많은면 모를 지켜보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7사도가 왜 존재하겠는가. 인간의 일곱 가지 죄악에서 비롯된 이들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샐러딘이 인간, 르네거를 싫어하는 걸 기꺼이 이해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감정일 뿐. 앞으로의 일을 위해서라면 샐러딘의 어리광을 계속 받아줄 수는 없는 노릇.
이걸 어쩐다. 카리나는 턱을 들어 올리며 침음을 흘렸다.
“그럼 이렇게 하자.”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카리나는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7사도를 찾아 와. 아니지. 네가 한 명을 죽였으니 6사도가 되었겠구나.”
“사도를 찾아오라고?”
샐러딘은 눈을 찡그렸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3년 전, 1차 신마전쟁 이후 사도들은 뿔뿔이 흩어졌으니까.
“분명 대륙의 어딘가에 숨어있을 거야. 그들을 데리고 오면, 신자들을 모으는 데에 더 유용하겠지. 내게도 당연히 좋은 일이고 말이야.”
샐러딘은 천천히 눈을 굴렸다.
카리나의 말이 맞았다.
사도를 찾아 내 그들에게 신자들을 모아 오라 명한다면 신자는 빠르게 모일 것이다.
그들을 다시 모아 카리나의 수하로 두게 된다면 연합군도 그녀를 무시하지 못하게 되리라.
더 나아가 아포칼리타와의 전투에서 그들을 활용할 수 있을 테고 말이다.
샐러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렇게 할게.”
고분고분한 대답에, 카리나는 얕게 웃으며 샐러딘을 향해 손을 뻗었다.
“넌 참 착한 아이야.”
그의 뺨을 매만지며, 부드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탑에서는 별일 없었던 것, 맞지?”
움찔.
샐러딘은 어깨를 달싹였다. 하지만 찰나의 움직임이었기에 카리나는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
“날 짜증 나게 하는 애들은 있었지, 뭐.”
“누구?”
“제이슨과 아멜.”
아. 카리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제이슨은 바다 괴물의 일종인 크라켄과 섞인 실험체였고, 아멜은 불을 뿜는 사자의 머리와 염소의 몸이 합쳐진 키메라와 섞인 실험체였다.
그 둘이면 꽤 골치가 아팠을 텐데.
카리나는 샐러딘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괜찮은 거야?”
“응. 괜찮아. 어차피 난 탑에서 나왔는걸. 그놈들이 날 쫓아올 리도 없고.”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카리나는 샐러딘의 등을 다독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그들을 가만히 둘 수는 없어. 널 거슬리게 하는 형제들이니까.”
샐러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카리나가 자신을 위해 주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들과 마주치게 된다면.”
카리나는 씨익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죽여 줄게. 널 위해서.”
이 모습이야말로, 내가 진정 사랑한 카리나다웠다.
샐러딘은 기쁨에 가득 찬 얼굴로 카리나를 그러안았다.
* * *
휙, 휙.
새벽부터 지금까지.
르네거는 조금도 쉬지 않고 성검을 휘두르고 있는 중이었다.
『그만 좀 하거라!』
성검의 전음이 들려왔음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되레 더 끈질기게 검을 휘둘렀다.
강해져야 했다.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했다.
카리나만큼은 지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해져야 했다.
‘그녀에게 짐이 될 수는 없어.’
휙, 휙.
르네거는 거듭해 검을 휘둘렀다. 뜨거운 땀방울이 이마에서부터 흘러 턱 끝에 맺혔다. 뚝, 뚝, 떨어지는 땀을 느끼며 그는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였다.
“와, 넌 무슨 괴물이냐?”
이때, 갑작스런 음성이 들려왔다. 르네거는 검을 고정하고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한 번을 안 쉬네, 한 번을.”
그곳에는 샐러딘이 서 있었다. 르네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제게로 다가오고 있는 샐러딘을 응시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에 샐러딘의 다물린 턱이 경련했다. 르네거가 건방지다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
후우.
샐러딘은 심호흡을 하며 들끓은 마음을 가라앉혔다. 르네거와 마주 선다.
“야.”
툭.
르네거의 앞으로 검 한 자루가 떨어졌다.
“나랑 한판 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