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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61화 (61/135)

61화

“나랑 한판 붙자.”

르네거는 제 앞에 떨어진 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검과, 샐러딘을 번갈아 바라본다.

“네가 가지고 있는 그 귀신 들린 검은 쓰지 말자고. 서로 공평하게 해야 할 거 아니야?”

귀신 들린?

르네거는 성검을 보다 세게 쥐었다.

『지, 지금 내게 하는 말이냐?』

“이야, 귀신이 말도 하네.”

『저, 저……! 저 발칙한 것을 보았나! 르네거! 뭣 하느냐! 저놈이 날 모욕했다! 당장 저놈을 때려 눕……!』

“좋습니다.”

르네거는 들고 있던 성검을 내던졌다. 깡! 소리가 날 정도로 성검이 세게 바닥과 부딪혔다.

『르네거!』

성검의 좌절 섞인 외침이 들려왔지만, 르네거는 그쪽에는 눈도 주지 않았다. 샐러딘이 내던진 검을 주워 들 뿐.

살펴보니 검은 평범했다. 마법도, 주술도 걸려 있지 않다. 정말 말 그대로 ‘공평하게’ 대련을 하자는 뜻이었다.

르네거는 터벅터벅 걸어 연무장 한 편에 있는 창고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날렵한 롱소드 한 자루를 꺼내 왔다.

샐러딘의 발치에 던진다.

“당신도 공평하게 검으로 싸워야지 않겠습니까.”

이것 봐라. 샐러딘은 호선을 그리며 입술을 들어 올렸다.

“음. 나는 검과는 거리가 멀어서.”

“마법을 쓰실 거잖습니까.”

“당연하지.”

“제 집에서 마법은 안 됩니다.”

샐러딘은 눈을 찡그렸다.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르네거를 바라본다.

그러나 르네거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그저 꼿꼿하고, 올곧은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볼 뿐.

‘재수 없게.’

퉤.

샐러딘은 침을 뱉으며 읊조렸다.

“그럼 난 이걸로.”

그의 손톱이 길어졌다. 흉기처럼 날카롭게 변한 손톱을 보며, 르네거는 사붓 조소했다.

“얼마든지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샐러딘이 곧장 달려들었다.

챙!

르네거는 그의 공격을 검으로 간신히 막아 냈다. 기기긱, 샐러딘의 손톱이 검을 거세게 긁었다.

누구의 힘도 부치지 않았다.

그들은 그대로 대치한 채, 서로를 향해 바득 이를 갈았다.

“건방진 새끼.”

“스스로에게 하는 말입니까?”

챙!

그들은 뒤로 물러서며 거리를 벌렸다. 르네거는 검을 다른 손으로 쥐었고, 샐러딘은 갈린 손톱을 재정비했다.

“카리나가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 너 같은 버러지 새끼를 거둬 주고 말이야.”

버러지? 르네거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러게요. 카리나가 착해서 걱정입니다. 당신처럼 무식하고 막무가내인 아포칼리타를 거둬 주니 말이죠.”

무식? 막무가내?

샐러딘은 바득 이를 갈았다.

“나는 카리나와 가족이야!”

챙!

르네거는 그런 샐러딘의 공격을 옆으로 흘리며 뒤로 한 바퀴 굴렀다.

“가족?”

그는 피식 조소했다.

“짐만 쥐여 주는 게 가족입니까? 갑자기 찾아와 카리나에게 부담을 주는 게 가족입니까?”

“이, 이……!”

샐러딘은 발을 동동 구르며 눈을 부라렸다.

“네가 뭘 안다고!”

챙! 챙!

샐러딘의 공격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르네거는 아주 조금도 곁을 내어 주지 않으며 방어했다.

“나는 카리나와 함께 자랐어. 내가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카리나와 함께 있었다고!”

챙!

샐러딘의 손톱이 르네거의 뺨을 할퀴었다. 샐러딘의 입가에 승리의 미소가 번진다. 하지만 르네거는 아무 표정 변화도 없었다.

“가족의 필요충분조건은 함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르네거는 두 손으로 검을 말아 쥐었다.

“도와주는 것이죠.”

샐러딘을 직시한다. 파리해진 낯빛을 하고 있는 그를 바라본다.

“당신은 카리나를 도운 적이 있습니까?”

샐러딘의 얼굴이 구겨지는 것이 보였다. 생각하고 있는 것이리라. 자신이 과연 카리나를 도운 적이 있는지.

아니. 절대 없을 테지.

르네거는 오만한 비소를 입가에 걸며 두 다리를 벌렸다.

“이제 공격 패턴을 알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기울이며 눈썹을 까딱였다.

“덤비십시오.”

* * *

[르네거 놈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레피오스의 집에 다다를 때쯤, 히론이 말했다. 카리나는 다소 놀란 눈을 하며 히론을 바라보았다.

“르네거를 그렇게 살뜰히 챙길 줄은 몰랐네.”

[그게 아니다! 그놈이 와야 레피오스에게 우리의 이야기를 진실성 있게 들을 것 아니냐!]

“아.”

카리나는 헛웃음을 뱉으며 손을 내저었다.

“포기해, 히론. 어차피 르네거는 관심도 없어 보이던데.”

[쯧. 말세야, 말세. 요즘 것들은 늙은이에 대한 공경이 없어.]

“정말 오늘내일하는 할아버지처럼 말한다, 너.”

히론은 흥,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 그는 카리나의 목에 있는 상처를 살피며 물었다.

[몸은 어떤 것 같으냐?]

“많이 좋아졌어.”

말대로, 정말 차도를 보이고 있었다.

과거에는 아무리 르네거가 치료를 해 줘도 다음 날이면 피가 나오고 살이 짓무르는 정도였는데, 지금은 조금씩 상처가 아물어 가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이건 모두 다 레피오스와 르네거 덕분이다. 카리나는 슬쩍 미소 지으며 생각했다.

“르네거도 날 도와주고 있으니까. 낫는 건 시간문제겠지.”

[맹약은? 다시 했느냐?]

“응.”

[조건은?]

“내가 온전한 힘을 되찾기 전까지, 나와 함께 있는 것으로.”

호오.

히론은 탄식을 흘리며 주억였다.

[나쁘지 않군.]

“솔직해지지 그래?”

카리나는 쿡 웃으며 히론의 얼굴을 건드렸다.

[르네거 놈의 머리에서 나온 것치고는 마음에 든다.]

“최고의 칭찬이네.”

그녀는 다시 한번 히론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 레피오스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얼마 가지 않아 레피오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항상 풀어 헤치고 있던 머리칼은 단정히 묶여 있다.

긍정적인 변화일까. 카리나는 생각하며 맑게 웃었다.

“왔구나. 어서 들어오렴.”

“감사해요.”

카리나는 그의 안내에 따라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너는 더 큰 집에서 살 생각은 없는 것이냐? 이런 좁아터진 곳에서 어떻게 산다고.]

“자주 거처를 옮겨야 하니 어쩔 수 없지.”

[아무리 그래도 지금은 정도가 심하다.]

“자, 앉거라.”

레피오스는 익숙하게 히론의 말을 무시하며 카리나를 앉혔다. 그에 히론이 씩씩 콧김을 뿜는 게 느껴졌지만,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차를 마실래?”

“그럼 감사하고요.”

레피오스는 곧장 차를 내왔다.

조르륵.

찻물이 따라지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며, 카리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찻잔을 움켜쥔다. 평안한 온기가 그녀의 손을 감쌌다.

“샐러딘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본 것이 카오스의 껍데기일 뿐이라고.”

“네, 맞아요.”

“자일이 부활의 의식을 하고 있다고 하던데.”

“그것도 맞아요.”

레피오스는 아포칼리타의 탑이 무너진 것도 이제야 알게 된 터였다. 그렇기에 카오스의 죽음 또한 몰랐다.

더불어 비교적 최근에 카오스의 모습을 보았으니 그가 죽었으리라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건만…….

카리나가 카오스를 죽이고, 자일이 카오스를 되살리고 있다니.

참으로 얄궂은 일이 아니던가. 레피오는 안타까운 기색을 보이며 씁쓸하게 웃었다.

“자일은 일찍부터 총명했지.”

[뱀파이어 놈들은 총명한 게 아니라 약삭빠른 거다.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어.]

“하지만 부활을 주관하는 것은 카 오스의 고유 능력일 텐데……. 자일이 그 힘을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 모르겠구나.”

그것도 카리나의 의문점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카리나는 품고 있던 깊은 의문을 꺼냈다.

“그것보다 이해가 안 되는 건 따로 있어요.”

“무엇을 말하는 거니?”

“아버지의 마나핵은 두 개로 알고 있거든요. 그림자의 능력이 담긴 마나핵. 그건 레피오스 님이 가져갔죠. 그리고 네크로맨서 능력이 담긴 마나핵. 이건 제가 가져왔어요.”

카리나는 팔뚝에 박혀 있는 검은 마나핵을 보여 주며 말을 이었다.

“한데 샐러딘의 말로는 숨겨 둔 마나핵이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 지금 부활의 의식도 가능한 거라고. 혹시 알고 계신 게 있나요?”

그녀의 말을 더듬으며, 레피오스는 긴 침음을 내뱉었다.

“글쎄…….”

그는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카오스는 일전부터 속을 알 수 없던 이였으니까.”

일전부터?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묘한 찝찝함이 카리나의 머리를 헤집었다. 그녀는 몸을 앞으로 숙이며 은근슬쩍 물었다.

“아버지를 오래 알고 계신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오래 알고 있었지. 그가 마물일 때부터 함께했으니…….”

[레피오스!]

히론이 레피오스의 말허리를 잘랐지만, 이미 카리나는 모든 걸 들어 버린 상태였다. 카리나의 눈이 튀어 나올 듯 커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마물이라니요? 히론, 너는 알고 있었어?”

[……이런.]

히론은 꼬리를 파르르 떨며 똬리를 틀었다. 레피오스를 째려본다.

[너는 왜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느냐! 그 입을 꿰매 버리든가 해야지.]

“카리나가 모르고 있었다는 게 더 놀랍구나. 의도적으로 숨긴 것이냐?”

[그것이…….]

히론은 카리나의 눈치를 살폈다. 하아아, 한숨을 터뜨리며 고개를 푹 숙인다.

[나는 모른다. 레피오스 네가 이야기하거라.]

그때까지 가만히 경청하고 있던 카리나는, 레피오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모든 걸 말하라는 듯한 눈빛이 눈 안에 담겨있다. 레피오스는 작게 웃었다.

“카오스는 고대 마물이었단다.”

“하지만 고대 마물들은 멸종했다고 알고 있는데요.”

“카오스만이 살아남았지.”

레피오스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내 아버지와 가까이 지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그를 숨겨 준 것이지.”

“레피오스 님의 아버지라면 태양신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레피오스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고대 마물이었다는 것도, 태양신이 그를 지켜 주었다는 것도, 모두 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런 카리나의 의문을 알아챈 것일까. 레피오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카리나와 보다 가까이 눈을 마주했다.

“그때에는 신과 고대 마물이 함께 지냈었지.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며 말이야.”

머나먼 과거의 이야기다. 카리나는 잠자코 경청했다.

“문제가 된 건 인간이 많아지면서부터였다.”

레피오는 자조적인 조소를 뱉었다.

자신 역시도 인간이었기 때문, 일까. 그의 웃음에는 희미한 죄책감이 묻어 있었다.

“인간들은 마물을 두려워했다. 그야 그렇겠지. 신의 형상은 자신들과 다를 게 없으나, 마물의 형상은 자신들과 다르니.”

카리나는 느리게 깜빡였다. 설마. 그녀의 눈에 불안함이 스쳤다.

“그래서…….”

“그래. 그래서 신들은 마물을 봉인하기로 결심했다.”

“인간을 위해서요.”

레피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리나는 쓰게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왜 아버지가 인간을 끔찍이도 싫어하는지 알겠네요.”

“……그래.”

“그리고 왜 고대 마물을 부활시키는지도.”

인간 때문에, 자신의 종족이 멸종당했다.

수많은 친구들을 잃고 혼자 남아 있는 것.

그 참담한 심정을 내가 감히 이해할 수 있을까.

카리나는 숨을 가다듬었다.

[그놈은 나나 레피오스처럼 마물의 기억을 살려 부활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둘 빼고는 이제껏 없잖아.”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카리나는 침묵했다. 이유를 스스로 짐작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물들은 끔찍한 학살을 당했기 때문이란다.”

레피오스가 대신 대답했다. 그는 침울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믿었던 친우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날까지만 해도 사랑했던 연인에게 죽임을 당했으니.”

[그 기억을 살린 채 부활시킨다면 모두가 다 자신처럼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을 테지.]

아.

카리나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니, 아버지가 한결 불쌍해지기도 했다.

어제의 친우가 오늘의 내 가슴을 뚫는다. 어제의 연인이 오늘의 내 목을 자른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본 그가, 미치지 않고서야 버틸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동정해 주고 싶지 않았다. 그를 이해하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는 세계의 악이에요. 이런저런 이유가 있다 한들, 아버지가 한 악행이 덮어지는 건 아니에요.”

그녀의 말을 들으며, 레피오스는 생각했다.

과거, 신들이 마물을 공격했던 때.

그때에는 과연 누가 선이었던가. 누가 악이었던가.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신이 선이었지만, 마물들의 입장에서는 신이 악이었다.

선과 악은,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가변적인 관념이었다.

“카오스는 만들어진 악이지.”

그렇기에 카오스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악에 대척하는 선이라 생각하고 있을 테니.

“카리나.”

그는 카리나의 손등에 손을 얹었다.

“선과 악. 질서와 혼돈으로 이루어진 것이 바로 세계란다.”

그의 주름진 손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 기껍지 않은 건 아니었다. 휘발되는 온기를 느끼며, 카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레피오스의 손을 붙잡았다.

“네가 아포칼리타를 멸망시킨다면 악이 사라지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세계에는 선과 질서만이 남는 것이야. 그것이 과연 옳은 세계일까? 생각해 본 적은 있니?”

레피오스는 그런 카리나의 팔을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혼돈이 없다면 질서도 없단다. 악이 있어야만 선이 있는 것이야.”

선과 악. 이 양면적인 명사는 서로가 존재해야 성립될 수 있는 결과였다.

“악의 다른 이름은…….”

“…….”

“필요선이란다.”

레피오스는 빙긋 웃으며 카리나를 토닥였다.

“부디 이 명제를 잘 기억해 주었으면 하구나.”

이 아이가 그릇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

선과 악이라는 추상적인 관념에 붙잡혀 흔들리지 않기를.

간절히 마음으로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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