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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62화 (62/135)

62화

“악의 다른 이름은 필요선이란다. 부디 이 명제를 잘 기억해 주었으면 하구나.”

레피오스의 말을 들으며, 카리나는 입술을 꾹 말았다.

“저는 그런 거 잘 몰라요.”

탁.

레피오스의 손을 뿌리친다. 사라지는 온기가 아쉽기는 했으나, 그 온 기를 거듭 붙잡고 있을 만큼 절박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어요. 저는 어찌 됐든 아포칼리타니까.”

그리고 전생의 기억을 갖고 있는 인간이기도 하지. 카리나는 말을 삼켰다.

“제가 바라는 건 복수예요. 그것만 이룬다면 더 바랄 게 없어요.”

그 말에 레피오스의 눈썹이 모였다. 미간이 좁혀진다.

“벌써 이십여 년이 지났어.”

그는 안타까움이 동반된 음성으로 말했다.

“이제 그만 놓아줄 때도 되지 않았니.”

카리나는 헛웃음을 뱉었다.

놓아주라니.

누구 마음대로?

그녀는 바득 어금니를 깨물었다.

“직접 겪은 일이 아니기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겠죠.”

“카리나.”

“아버지가 만들어진 악이라고요? 그런 끔찍한 일을 겪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악이 된 거라고요? 그래서요? 그래서 제가 동정이라도 해 줘야 하는 건가요?”

그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말다툼에서 이렇게까지 흥분한 것을 처음 보았기에, 히론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카리나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제가 당한 일은요? 그건 어떻게 되나요?”

그녀는 떠올렸다.

아버지, 카오스가 자신에게 자행했던 일을.

이제 막 세상에 눈을 떴을 때, 그는 자신에게 살인을 시켰다.

이제 막 걸음마를 내디뎠을 때, 그는 자신의 살을 가르고 마나핵을 주입했다.

이제 막 사리 분별을 하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사지를 묶어 두고 고르곤의 피를 투여했다.

이제 막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가려 할 때, 그는 자신을 지켜 주던 형제들 모두를 죽이고 그들의 힘을 주입했다.

그 엄청난 고통과 정신적 충격을, 감히 누가 이해해 줄 수 있겠는가.

“저에게 있어 악은, 아버지예요.”

“…….”

“이건 변하지 않아요.”

레피오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입을 뻐끔거린다. 차마 하지 못하는 말이 혀끝에 머물고 있는 듯싶었다.

“히론, 나가 있거라.”

[갑자기?]

“얼른.”

히론은 레피오스와 카리나를 번갈아 바라보다,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방을 나섰다.

지이익, 지익.

그가 바닥을 배로 쓰는 소리가 사라지자마자. 레피오스는 입을 열었다.

“그래서, 카리나 너는…….”

후우.

그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복수를 마친 후에, 죽을 생각이니?”

카리나의 숨이 멎었다.

그녀는 놀람을 감추지 못하며 눈을 떨었다.

그걸 대체 어떻게?

아니, 아니. 레피오스는 예지 능력이 있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하니 그의 말이 이해가 됐다. 카리나는 고개를 숙였다.

“꿈에서 보셨나요?”

“그래.”

레피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리나는 그제야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제가 성공하나요?”

질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 레피오스는 고개를 기울였다. 카리나는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자살이 성공하냐는 말이에요.”

“카리나! 그런 말은!”

“저는.”

그녀는 무릎 위에 올린 두 손을 말아 쥐었다.

“살고 싶지 않아요. 이제 끔찍해요. 이곳의 모든 것들이 너무 지옥 같아서.”

평온한 날이 이어진다고 한들, 아주 잠시뿐이다.

28년이라는 기나긴 시간 동안, 카리나는 단 한 번도 긴장을 늦춰 본 적이 없었다.

언제 어느 때 나를 공격해 올지 모른다.

언제 어느 때 내가 괴로워질지 모른다.

맹수가 가득한 초원 한복판에 던져진 작은 토끼가 된 것처럼, 세상의 모든 것들을 경계하며 살던 그녀였다.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었다.

카리나는 그렇게 판단했다.

“카리나.”

레피오스는 다시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그렇게 죽어 버리면…….”

후우.

레피오스는 짧은 한숨을 뱉었다.

“히론은 어찌 될 것 같으냐?”

“…….”

“널 사랑하는 그 인간 남자는?”

“…….”

“널 따르는 샐러딘은?”

“…….”

“모두를 버리고, 가 버리겠다는 말이냐?”

카리나의 기나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두 손을 맞잡는다. 힘이 들어간 뼈마디가 서로를 억눌렀다.

“그들이 주는 무게를 버틸 수 있었다면, 자살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겠죠.”

카리나는 차분한 숨을 뱉으며 대답했다.

“그들이 제게 주는 행복보다, 겪은 고통의 양이 더 커요.”

히론과 함께 있으면 평안하고, 르네거과 함께 있으면 즐겁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 이상의 감정으로 나아가기 힘들었다.

어차피 나의 불행은 내가 책임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아무리 노력을 한다 해도 결국은 내가 아니라 타인일 뿐.

행복은 나눌 수 있지만 고통은 나눌 수 없다.

그렇기에, 카리나는 더 이상 고통 받고 싶지 않았다.

“전 견딜 수 없어요. 그만하고 싶어요.”

레피오스는 눈썹 끝을 내리며 카리나를 바라보았다.

안타깝다.

홀로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었기에, 이런 끔찍한 생각에까지 다다르게 된 것일까.

레피오스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카리나를 보다 가까이 바라본다.

“그건 네가 아포칼리타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카리나는 조심스레 눈을 들어 올렸다. 레피오스의 잿빛 눈동자를 바라본다.

“죽지 않고, 늙지 않는. 만들어진 생명체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 그러니 시간이 지나도 과거가 잊혀지기는커녕 미래가 잡아먹히게 되는 것이고.”

레피오스는 카리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건조한 뺨을 어루만진다.

쩍쩍 갈라져 있지만, 그 속에 눅눅한 축축함이 남아 있는 눈가를 바라본다.

“카리나.”

레피오스는 지나친 다정함을 섞으며 말했다.

“인간이 될 생각은 없느냐?”

* * *

“허억, 헉…….”

샐러딘은 바닥에 드러누운 채 숨을 헐떡였다.

“이 개새…….”

그는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아 자꾸만 앞으로 고꾸라졌다. 쿨럭, 속에서부터 나오는 기침을 뱉으며 몸을 웅크린다.

“후우…….”

힘에 부쳐 있는 것은 르네거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몸은 움직일 수 있었다. 벽에 등을 기댄 채, 샐러딘을 바라본다.

“제가 이긴 겁니다.”

“이, 이……! 네가 기습을 했잖아!”

“아무리 우겨도 제가 이긴 거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억소리를 내며 입을 벌리던 샐러딘은, 이내 포기한 양 다시금 드러누웠다. 가파른 숨을 몰아쉬며 바득바득 이를 간다.

“빌어먹을 새끼.”

“압니다.”

“씹어 먹어도 모자랄 놈.”

“그건 좀.”

무슨 말을 해도 받아치는 그를 보며, 샐러딘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제껏 제게 이런 식으로 나오는 인간은 없었다.

항상 저를 보면 꼬리를 말고 도망치기 일쑤였을 뿐.

그렇기에 샐러딘은 르네거에 대한 감정이 꽤 복잡 미묘했다. 한편으로는 죽이고 싶을 정도로 밉다가도, 한편으로는 재미있어할 만큼 흥미로웠다.

‘그래서 더 짜증 나.’

퉤.

샐러딘은 피가 섞인 침을 뱉으며 고개를 위로 젖혔다. 르네거를 바라본다.

“넌 카리나 옆에 왜 있냐?”

르네거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질문은 의미가 없다는 듯 말하는 것 같았다.

“좋아하니까요.”

너무도 당연하게 나온 대답이다. 샐러딘은 헛웃음을 뱉었다.

“그럼 너는…….”

샐러딘은 간신히 허리를 세웠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르네거와 마주한다.

“카리나를 위해 뭘 해 주는데?”

“그녀가 바라는 것이라면 뭐든지 합니다.”

“바라는 것?”

샐러딘은 재차 조소했다.

이렇게 보면 자일 놈보다 이놈이 더 낫기는 했다. 자일은 카리나가 하지 말라는 짓만 쏙쏙 골라 했던 놈이니까. 적어도 이놈은 카리나의 말을 잘 듣지 않는가.

샐러딘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의 입가에 장난기가 맴돌았다.

“카리나가 만약 네가 죽길 바란다면?”

“그러지 않을 거란 걸 압니다.”

“혹시라도. 응? 그럼 어떡할 건데?”

보채는 질문에, 르네거는 잠시 침묵했다.

그녀가 만약 죽으라 명한다면.

내가 죽는 것을 바란다면.

그렇다면…….

“제 목숨은 카리나가 구해 준 겁니다.”

르네거는 다짐하듯 한 글자씩 힘을 주어 가며 말했다.

“그러니 그녀가 죽으라면, 죽을 수 있지요.”

그는 빙긋 웃었다. 무해한 웃음이었다. 짓궂은 장난을 한 샐러딘이 놀랄 만큼.

“하지만…….”

그러나 르네거는 곧 웃음을 낙화시켰다. 그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을 하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렇다면 제가 죽기 전에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겠지요.”

“해야 할 일? 뭐?”

“카리나가 행복해질 수 있도록 만드는 것.”

르네거는 재빠르게 대답했다. 이는 그가 그동안 마음에 담고 있던 생각이기에 나온 속도이기도 했다.

“그녀는 행복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까요.”

르네거의 말을 더듬던 샐러딘은, 사붓 미간을 좁혔다. 저가 들은 게 맞나, 귀를 후벼 본다.

“사람?”

샐러딘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되물었다.

“너 지금 아포칼리타에게 인간이라 한 거냐?”

“제가 보았을 때 아포칼리타와 인간은 차이가 없으니까요.”

샐러딘의 두 눈이 커졌다. 그는 숨을 내쉬는 것조차 잊은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의 눈이 갈 길을 잃고 흔들렸다.

“기쁨과 슬픔을 공유한다면, 서로 다른 종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행복과 불행을 공유한다면, 같은 종이 되는 것이고요.”

샐러딘은 그에게 쏘아 줄 말을 골랐다. 하지만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당황스러웠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아포칼리타를 인간과 같다고 말해 주지 않았으니까.

그 누구도 인간과 아포칼리타를 같은 선에 두지 않았었으니까.

한데, 라템의 성기사였던 놈이, 신의 아들이라는 놈이 저런 말을 하다니.

샐러딘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복잡한 감정이 더욱더 치달았다.

하지만 르네거는 그런 샐러딘의 변화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집중하는 것은 오직, 카리나뿐.

“저는 카리나가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그녀는 행복해야만 했다.

이제껏 겪은 고통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고통들이 상쇄될 수 있을 만큼의 커다란 행복을 겪어야만 했다.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영원히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고통받지 않는 상태에서.”

르네거는 마음속의 바람을 빌고 또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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