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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63화 (63/135)

63화

“…….”

샐러딘은 앞서 걸어가는 카리나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오늘의 카리나는 어딘가 이상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았고 어쩌다 대답을 하면 뜬금없는 말을 하기 일쑤였다.

분명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이리라. 샐러딘은 의뭉스러운 시선을 보내며 르네거의 옆구리를 툭 건드렸다.

“야. 카리나가 왜 저러는 줄 알아?”

“글쎄요.”

르네거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샐러딘은 왈칵 인상을 쓰며 목소리를 높였다.

“넌 걱정도 안 돼? 카리나가 저러는 게?”

“이유가 있으시겠지요.”

여유로운 대꾸에, 샐러딘은 더욱 심기가 어긋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짜증 나는 놈. 그를 흘겨본다.

“그렇게 모두 네, 네, 하다 보면 매력이 없는 법이야. 여자에게 인기가 없다고.”

샐러딘은 빈정거리며 말했다.

“카리나가 하는 행동 모두 다 예, 예, 거리면 카리나가 네게 매력을 느끼지 못할 거란 말야. 지금은 네 얼굴만 믿고 있는 거 같은데, 시간이 지나면 안 먹힐걸?”

그의 말을 잠자코 듣던 르네거는, 이내 씨익 웃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제가 카리나 곁에 있는 걸 싫어하시는 줄 알았습니다만.”

그는 콧잔등을 찌푸리며 푸시시 웃었다.

“절 도와주시는군요.”

샐러딘의 얼굴이 굳었다. 곧 붉으락푸르락 엉망이 된 샐러딘은 삿대질을 하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아니거든! 누가 누굴 도와줘!”

“맞습니다.”

“아니라고!”

“아무리 부정해도 맞습니다.”

“아악!”

뭐 이딴 새끼가 다 있어!

샐러딘은 머리를 꿰뜯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르네거는 가뿐히 무시했다.

카리나를 바라본다. 단 한 번을 돌아보지 않고, 꿋꿋하게 앞만 바라고 있는 그녀의 등을 주시한다.

샐러딘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는,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카리나에게 너무 복종하다 보면, 그녀가 나에 대한 흥미를 잃을 거라는 뜻이겠지.

그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 자신의 태도를 바꿀 생각은 절대 없었다.

카리나는 얼핏 보면 사나운 맹수 같지만, 그 속은 작고 소중한 새끼 동물 같은 이였다.

손을 뻗으면 깜짝 놀라 할퀴지만, 곧 그 손을 그리워하며 작게 우는 고양이처럼. 하지만 또다시 만지려 하면 할퀴어 버리겠지.

위와 같은 경험을 몇 번이고 반복한 르네거로서, 지금 그의 행동은 타당한 결과였다.

그는 카리나가 원하는 것을 모두 다 들어줄 자신이 있었다.

그래야만 카리나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녀가 바란다면 산을 깎아서라도 만들어 와야 하고, 그녀가 원한다면 바닷물을 퍼 없애서라도 가져와야 했다.

그래야,

‘카리나의 몸과 마음을 지킬 수 있을 테니.’

르네거는 그렇게 생각하며 발을 재우쳤다. 카리나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그녀의 뒤를 따라간다.

[뒤에서 또 싸우고 있다.]

카리나의 몸을 감싸고 있던 히론의 말이었다.

“알고 있어.”

[저 둘은 하루도 지치지 않고 싸우는군.]

“샐러딘이 먼저 시비를 걸던데, 뭐.”

카리나는 피식 실소를 뱉으며 말했다.

“난 르네거가 내게 복종해서 좋은 건데 말이야. 반항하는 걸 길들이는 건 너무 귀찮은 일이거든.”

히론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카리나를 바라보았다. 검은 눈동자에 희미한 백태가 끼었다.

[그러다 큰코다칠 일이 생길 거다.]

“퍽이나.”

카리나는 으쓱 어깨를 올렸다. 히론은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몸을 위로 쭉 들어 올렸다. 카리나의 눈앞에 얼굴을 가져다 댄다.

[어제 레피오스와 무슨 이야기를 한 것이냐?]

카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입매를 굳혔다.

-복수를 마친 후에, 죽을 생각이니?

죽겠다고 선언하고 나온 일을 어떻게 말을 해 줄 수 있을까. 카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딱히. 별 대화도 없었어.”

[거짓말하지 마라.]

“정말인데.”

[카리나.]

하아.

카리나는 이마를 짚었다.

그래. 레피오스와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인간이 될 생각은 없느냐?

……이걸 히론에게 말했다간 지금 당장 레피오스를 죽여 버리겠다고 쫓아가겠지.

절대 함구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 거야. 내가 감정이 격양돼 있는 것 같으니 널 내보낸 거고.”

[……거짓말이 아니지?]

“그래.”

[믿어 주는 척하겠다.]

“그럼 고맙고.”

카리나는 대꾸하며 시선을 돌렸다. 먼 산을 바라본다.

그들이 가고 있는 곳은 과거 아포칼리타의 신전이 있던 장소이다.

이미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전소됐을 테지만, 그곳으로 가야만 할 이유가 있었다.

‘신도들을 모아야 하니까.’

지금 아포칼리타의 신도들은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1차 신마전쟁에서 패배한 아포칼리타들이 몸을 숨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신전을 만들고, 나와 샐러딘을 주축으로 선전을 하면…….

‘아포칼리타가 부활했다는 것이 알려지겠지.’

그렇게 되면 신자들도 눈치를 보고 조금씩 모이기 시작할 것이다. 하면 연합군도 우리의 힘을 무시할 수 없게 될 테지.

두 군단의 아포칼리타를 상대하느니 울며 겨자 먹기로 한쪽과 손을 잡으려 할 터였다.

여기에 샐러딘이 6사도를 모아 오면 금상첨화였다. 그들에게 각각 아버지의 힘이 부여되어 있을 테니, 그것을 회수해 내 것으로 만들면 지금보다 더 강해지게 될 터였다.

‘계획대로 흘러가면 좋으련만.’

카리나는 한숨을 뱉으며 걸음을 늦췄다.

도착한 것이다.

멸망한 신전의 잔해에.

* * *

“엉망이네.”

잔해를 뒤적거리던 샐러딘이 말했다.

몇 년간 누구도 찾아온 적이 없다는 걸 방증하듯, 무너진 잔해들은 전혀 정리되지 않은 채 즐비해 있었다.

더군다나 잔해 아래에는 백골이 된 시체들이 있었다. 수십. 아니, 수백 구. 바싹 말라 버려 검게 변한 핏자국도 곳곳에 가득했다.

“이건…….”

르네거의 말이었다.

“학살이군요.”

그는 주먹을 바르쥐었다. 찌푸려진 눈살은 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곳을 알고 있다. 이 신전을 알고 있다.

라템의 기사들이 출정한 곳.

자신은 아포칼리타를 쫓는 임무 때문에 합류하지 않았지만, 저가 아는 신관들 대부분이 출정했었다.

……그들이, 이런 짓을 했다는 것인가.

르네거는 발치에 있는 자그마한 해골을 내려다보았다.

이 정도의 크기라면 작은 아이일 테다. 아직 부모의 곁을 졸졸 쫓아 다닐 아이.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해 부모의 말을 법이라 믿을 나이의 아이.

이런 아이들은 죽이지 않고 회유할 수 있었을 텐데.

그들은 죽였다.

모두 학살했다.

이런 것이 과연 신의 뜻이라 할 수 있겠는가.

르네거는 그 해골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성호를 그으며 기도를 올린다.

부디, 좋은 곳에 갔기를.

“아포칼리타의 신자들에게 라템의 기도를 하는 건 좀 웃긴데.”

카리나의 음성이었다. 그녀는 피식 피식 웃으며 르네거에게로 다가왔다.

“놀랍니?”

그녀는 르네거의 턱 선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말했다.

“앞으로 이런 광경을 더 많이 보게 될 거야.”

비죽 올라간 입꼬리는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르네거가 방금 전 느낀 동정심을 값싼 연민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 같았다. 르네거는 왈칵 마음이 부풀었다.

“신자들의 잔인함을 제게 보여 주려는 생각이십니까?”

르네거의 답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일까. 카리나의 눈이 사붓 흔들렸다.

하지만 그건 순간이었다. 그녀는 차분히 대답했다.

“그래. 그래야 네가 마음이 변하지 않을 테니까.”

“보지 않는다 해도 저는 변하지 않습니다.”

너무도 단호한 대답을 하는 르네거를 보며, 카리나는 새삼스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진심일까, 진심이 아닐까.

믿어도 될까, 믿으면 안 될까.

두 갈래의 길에서 고민하고 있기에는 여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카리나는,

“믿지 않아.”

두 번째 길을 선택하기로 결심했다.

믿은 후에 배신당해 받을 상처보다, 믿지 않은 후에 얻게 될 외로움이 더 견딜 만했으므로.

그렇게 카리나가 뒤를 돌 때에.

“카리나.”

르네거가 그녀를 붙잡았다. 그가 잡은 오른 손목에서 아릿한 열이 올라왔다.

“저는 당신께 저를 믿어 달라 한 적이 없습니다.”

그의 음성은 지극히도 성스러웠다.

멸망한 신전의 땅을 딛고 듣는 것이 죄스러워질 정도로, 신성하고 맹목적인 목소리가 귓바퀴를 더듬었다.

“저를 믿지 않아도 됩니다. 어차피, 보여 드릴 테니.”

그는 그러며 카리나의 손을 천천히 놓았다.

휘발되는 체온을 좇던 카리나는 이내 왼손으로 오른손의 손목을 잡았다. 르네거를 슬쩍 흘겨본다.

“난 정말 마음이 약하다니까.”

쯧.

카리나는 혀를 한 번 차며 다시 르네거에게로 다가갔다.

아까 전 르네거가 성호를 긋고 기도를 해 주던 해골 앞에 선다. 그 위에 손을 얹는다.

동시에 검은 기운이 치솟기 시작했다. 커다래진 기운은 순식간에 해골을 삼켰다.

우우웅.

해골을 먹어 버린 그것은 소리를 내며 몸을 작게 압축했다.

카리나의 손바닥에 올라올 때에는 엄지손톱만큼 작아져 있었다.

“무엇을 하신 겁니까?”

“아직 생명이 남아 있었거든.”

카리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 가벼이 대꾸했다.

“그걸 모아서 만드는 거야.”

그녀는 손바닥에 올라와 있는 기운을 한 번 움켜쥐더니, 이내 활짝 폈다. 그러자 검은 기운이 허공에 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천히 색이 바뀌었다. 검은색, 진회색, 회색, 연회색, 하얀색…….

하얗게 변한 기운은 꿈틀거리며 몸을 키웠다. 이내,

파앗-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온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별무리가 떨어지는 것처럼 가늘게 쏟아지는 기운 너머, 새하얀 나비 한 마리가 둥둥 떠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나비로.”

카리나는 그 나비를 바라보며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녀는 시체에 깃든 생명을 모아 나비로 만들었다. 자신이 그 시체를 보며 안타까워했기 때문에.

카리나는 저가 느끼는 것을 값싼 연민으로 치부한 게 아니었다. 공감해 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니 앞으로 이런 광경을 봐도 괜찮아야 한다고, 그리 말하려 했던 것일 테지.

오해를 했다.

르네거는 카리나를 부르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멀찍이 떠나 버린 지 오래였다.

“카리…….”

“가지 마. 지금 카리나는 의식을 준비해야 할 테니까.”

카리나를 부르려던 르네거를 막은 건 샐러딘이었다. 그는 르네거의 셔츠를 잡아당겼다.

“나비가 예쁘네.”

샐러딘은 다소 맥이 빠진 듯한 시선으로 나풀거리고 있는 나비를 바라보았다.

“내가 죽어도, 이렇게 해 줄까?”

느닷없는 말이었다. 르네거는 놀라 샐러딘을 돌아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의 커진 눈을 바라보며, 샐러딘은 피식 실소를 뱉었다.

“카리나는 항상 인간에게 관대하거든.”

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말로는 아니라고 하는데, 항상 그랬지. 죽이라는 명령을 받아도 모르는 척하거나, 죽이지 않고 돌아오거나. 그래서 자일과 사사건건 싸웠고.”

그는 이제 저만치 멀어져 버린 나비를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저것 봐. 몇 년 전에 죽은 인간이 불쌍하다고 만들어 준 거잖아. 자기 힘을 쓰면서.”

그러다 시선을 떨어뜨린다. 깊은 서러움이 섞인 감정이 그의 미간 위에 내려앉았다.

“나한테도, 과연 해 줄까?”

르네거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와 카리나와의 관계를 명확히 알지 못하는 지금. 카리나에게 샐러딘의 이야기를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지금.

그들의 관계에 대해 섣불리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르네거가 대답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았다는 듯, 샐러딘은 푸시시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부럽다, 네가.”

툭툭.

그는 르네거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인간이라서.”

그래서 카리나에게 예쁨을 받는 것 같다고. 그래서 부럽다고.

샐러딘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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