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르네거는 입술을 말며 침묵했다.
-부럽다, 네가.
-인간이라서.
그리 말을 하는 샐러딘은, 마치 주인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어린 양과 같아 보였다.
가엾은 어린 양은 가파른 산기슭을 오르내리고 드넓은 초원의 가장자리만을 밟으며 잃어버린 주인을 목 놓아 부르겠지. 주인이 자신을 버린 것도 모른 채.
‘아.’
르네거는 이마를 짚었다.
이렇게 상념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샐러딘에게 어떠한 말이라도 해 줘야 했다.
카리나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네가 인간이건 무엇이건 간에 너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고, 그러니 그런 생각은 하지 말라고.
하지만 그게 과연,
‘진실인가?’
카리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스스로를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으로 이분법하는 그녀가, 과연 샐러딘을 차별 없이 동등한 인격체로 보고 있을까?
‘그렇다면 나는.’
카리나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나는 인간이므로 다른 존재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 역시도 샐러딘과 다른 처지가 아니지 않은가.
샐러딘에 이어 자신에게까지 확장된 사고는 그의 입술을 닫히게 만들었다.
“…….”
르네거는 샐러딘에게 향했던 시선을 거뒀다. 유해가 가득한 땅을 내려다본다. 초점이 없는 눈동자가 비스듬하게 비쳤다.
샐러딘은 그런 르네거를 슬쩍 쳐다보았다.
르네거의 굳은 얼굴에 서린 기색을 읽은 것일까. 샐러딘은 피식 실소를 뱉었다.
“야, 정신 차려.”
그는 팔꿈치로 르네거의 옆구리를 툭 치며 말했다.
“곧 좋은 광경을 보게 될 테니까.”
“그게 무슨…….”
르네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진이 난 듯 땅이 흔들렸다. 중심을 잡기 힘들 정도로 거센 진동이었다. 르네거는 간신히 두 다리를 곧추세우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곧.
볼 수 있었다.
치솟은 신전 위에 서 있는 카리나를.
이 세계의 주인과도 같아 보이는 그 모습을.
* * *
쿠구궁.
본래의 신전보다 훨씬 더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새로운 신전이 땅을 가르며 치솟았다.
새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기단 위에 수십 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다. 기둥은 모두 다 까마득한 높이를 뽐내고 있었고, 지붕을 올려다보려면 목을 한참 젖혀야 할 정도였다.
바닥부터 시작해 기둥, 지붕, 측벽에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
마치 상상 속의 악마를 상징하는 것처럼, 하지만 풍요로운 암소를 의미하는 것처럼,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양이었으나 그것이 주는 의미는 확실했다.
아포칼리타.
그것은 아포칼리타의 문양이었다. 그러한 문양이 가득한 이곳은, 멀리서 보아도 아포칼리타의 신전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후우.”
카리나는 지붕 위에 올렸던 손을 움찔거렸다.
오랜만에 힘을 쓴 탓일까. 손가락 끝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다른 곳은 문제가 없었다. 그간 레피오스와 르네거에게 착실히 치료를 받은 덕분인 듯했다.
그녀는 내리깔았던 시선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리고 배회하는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신전을 복구하기 위해 만들었던 마법진은 서서히 휘발되고 있었다. 검은 재가 되어 사라지는 그림들을 보며, 카리나는 낮게 조소했다.
“이 능력을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자일 놈이 알려 준 거지?]
“알려 줬다기보다는 내가 옆에서 배운 거지.”
그녀가 쓴 능력은 아주 오래전, 자일이 먼저 익혔던 마법이었다.
자일은 언젠가 새로운 탑을 세우겠노라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마법진을 배워야 한다고.
자일을 라이벌처럼 생각하던 어린 카리나는 그런 자일의 옆에서 곁눈질로 마법진을 익혔다.
그때의 카리나는 몰랐다. 자일이 새로운 탑을 세우겠노라 결심한 이유를.
그가 마법진을 소화하고 이 층 높이의 작은 건물을 세울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는 카리나에게 엄포하듯 말했다.
-너만을 위한 탑을 세울 거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카리나가 되묻자, 자일은 비죽 웃으며 카리나의 양팔을 붙잡았다.
-네가 절대로 도망칠 수 없는 공간을 만들 것이다. 미노타우르스의 미궁처럼, 출구를 찾을 수 없는 곳에 너를 가둬 둘 것이다. 너는 햇볕 한 줌도 받지 못할 것이며, 물 한 모금도 먹지 못하겠지. 내가 오는 날만을 기대하며 나를 찾게 될 것이다. 너는 내게 피를 내줄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러며 내게 애원하게 될 것이다.
그의 벌려진 입은 백 일을 굶은 포식자의 것 같았으나, 번들거리는 눈은 천 일을 기다린 연인의 것과 같았다.
그때에 카리나는 무어라 대답했던가. 아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도망쳤다. 방으로 달려가 문과 창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옷장 속에 들어가 숨을 삼켰다.
자일이 무서웠다.
그가 비추는 감정은 식욕과 같았으나 그러며 때때로 사랑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기에 더 무서웠다. 그라면, 정녕 그라면, 자신의 피를 섭취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심장까지 쉐뜯어 갈 것 같았으므로.
그래. 그때의 카리나는 그러했다. 어린 카리나는 그러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자일이 무섭지 않았다. 이제는 그가 무슨 짓을 해도 두렵다는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공포를 느끼는 감각이 마비된 것이 아니었다. 이건,
‘르네거 덕분이지.’
크나큰 전력이 생겼다는 것. 그가 자일을 이길 수 있다는 것.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으니 안도감이 들고 더 나아가 자일이 우습게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카리나는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그녀가 걷는 걸음걸음마다 새까만 어둠이 발자국처럼 남았다.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어둠은 곧 신전 전체를 뒤덮었다. 새하얗기만 했던 외벽이 까맣게 물들고, 지붕과 기둥과 바닥 모두가 다 새까맣게 변모했다.
[그래! 이래야 아포칼리타의 신전답지 않겠느냐!]
히론은 껄껄거리며 외쳤다. 카리나는 피식 실소하며 그의 목덜미를 긁어 주었다.
“카리나!”
돌아보니 낑낑거리며 지붕 위로 올라오고 있는 샐러딘이 보였다. 그리고 어느새 훌쩍 올라와 있는 르네거도 보였고.
르네거는 카리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시선으로, 올곧은 걸음을 하며 그녀를 향해 똑바로 다가왔다.
“이렇게 갑자기 힘을 쓰시다니요. 몸은 괜찮으십니까?”
그는 사붓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 이 짧은 말에서도 자신에 대한 걱정이 느껴져, 카리나는 다시금 조소했다.
“안 괜찮아도 상관없어. 이룬 게 있으니까.”
카리나는 양팔을 활짝 펼쳤다. 등 뒤에 솟아 있는 날개도 활짝 펼쳤다. 펄럭, 날개가 바람을 맞아 흔들렸다.
“어떠니? 내가 만든 나의 신전이.”
그녀는 이 새까만 신전과 조금의 이질감도 없었다. 태초부터 그녀의 것이었던 것처럼, 어긋남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르네거는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제가 감히 평을 할 수 있겠냐만은.”
그는 카리나의 손등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당신답네요.”
“최고의 칭찬이네.”
손등에 퍼지는 온기를 느끼며, 카리나는 사붓 미소 지었다. 안온한 분위기가 흘러갔다.
“……뭐야.”
샐러딘의 말이었다.
신전 위로 올라온 그는 사방을 둘러보며 기함 섞인 목소리를 냈다.
“이 정도의 힘을 쓸 수 있었던 거야?”
카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침묵은 긍정과도 같아, 샐러딘은 두 주먹을 말며 고개를 푹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더 강해진 줄 알았는데.”
웅얼거리는 목소리였지만 뜻은 명확했다. 카리나는 미간을 좁혔다.
샐러딘은 강하다. 원작에서도 거의 끝까지 살아남았던 이가 아닌가.
샐러딘은 후에 자일에 비견할 정도로 강해지는 이였다. 그렇기에 지금 그의 시무룩함이 퍽 안쓰럽게 느껴졌다.
위로를 해 줘야 할까, 아니면 기운을 북돋아 줘야 할까. 카리나는 양갈래의 길에서 잠시 고민했다.
[애초에 카리나의 모체가 훨씬 더 강한 마물이니 어쩔 수 없지 않겠느냐.]
놀랍게도, 히론의 말이었다.
히론은 분명 샐러딘을 탐탁지 않아 하지 않던가.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샐러딘과 히론을 바라보았다.
“지옥의 문지기도 충분히 강해.”
[그래 봤자 개새끼인 것을.]
“야!”
[야라니. 히론 님이라 부르거라.]
히론은 휙 고개를 돌리며 샐러딘을 약 올렸다. 샐러딘은 씩씩거리며 히론을 노려보았다.
[네가 3차 각성까지 하면 카리나보다 강해질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샐러딘은 입을 뻐끔거렸다.
“그건…… 정말 괴물처럼 변해 버리잖아.”
[괴물이라니. 마물이다.]
“그거나 그거나.”
3차 각성.
카리나가 그토록 각성을 거부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 있었다.
2차 각성 때까지는 인간의 형상이 보다 우세하나, 3차 각성을 하게 되면 피에 담긴 마물의 힘이 더 크게 발현돼 외양이 변하게 된다.
샐러딘은 케르베로스와 섞인 실험체니 지옥의 개처럼 변하게 될 것이고, 카리나는…….
‘뱀이 되겠지.’
그녀는 이 세계에서 처음 눈을 뜨던 날, 살갖에 가득했던 비늘을 떠올리며 팔을 쓰다듬었다.
그런 꼴로는, 살아가고 싶지 않아.
[각성하지 않는다면 너는 평생 카리나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약해 빠진 놈으로 살겠지.]
“난 안 약해.”
[자일 놈에게 지지 않느냐?]
“그건 그놈이 무식하게 센 거고!”
샐러딘은 씩씩거리며 다시 소리쳤다. 히론의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샐러딘을 놀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아.
카리나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뱉었다. 샐러딘에게 다가간다.
“넌 이제 6사도를 모아 오렴.”
카리나의 명령을 받아들이는 게 기쁜 것일까. 샐러딘은 환히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옆에 서 있는 르네거는 미세하게 얼굴을 굳혔다.
“알았어.”
“다른 아포칼리타들에게는 절대 들키면 안 돼.”
움찔.
샐러딘은 어깨를 잘게 떨었다.
“하지만 이미 신전을 세웠잖아. 탑에서는 눈치를 채게 될 거야.”
“자일은 아버지의 부활로 정신이 없다 하지 않았니?”
“그건 그렇지만…….”
“그럼 된 거지, 무얼.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
가볍게 넘기는 카리나와는 다르게, 샐러딘은 눈을 굴리며 걱정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다른 놈들이 걱정돼서 그렇지…….”
“뭐라 했니?”
“……아니야. 아무것도.”
그의 태도가 어딘가 이상했지만, 지금 그것에 과도하게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현재 중요한 것은 그녀가 새로운 시작점에 서 있다는 것뿐.
카리나는 샐러딘과 히론, 그리고 르네거를 뒤로하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번듯한 승리감이 그녀의 양어깨를 활짝 펼쳐지게 만들었다.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아포칼리타는 두렵지 않았다.
자일은 두렵지 않았다.
정작 두려운 것은 따로 있었다.
원작이 어긋난 만큼, 아포칼리타가 멸망하지 않을까 두려웠다.
자신이 행하는 일의 결과가 최악으로 치달을까 두려웠다.
한 치 앞도 모르는 미래가 두려웠다.
“…….”
지붕의 끝에 다다른 그녀는 시선을 먼 곳, 지평선 너머로 던졌다.
일몰이 찾아온 대지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일몰은 순간일 뿐이다. 화마와도 같은 저 태양의 기운은 아주 찰나일 뿐이다.
검은 그림자는 밤을 데리고 오겠지. 그리고 시간을 지배할 것이다. 오랜 시간, 어둠을 붙들고 대지를 잠에 들게 하리라.
“이제는.”
카리나는 목을 감싸고 있는 히론을 쓰다듬었다.
“모두가 내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거야.”
카리나의 입술이 보란 듯이 치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