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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65화 (65/135)

65화

호기롭게 계획을 세웠건만, 카리나는 곧장 움직일 수가 없었다.

카리나는 아직 완전히 몸이 회복된 상태가 아니었으며, 신자를 모으기 전에 6사도를 찾아야 함이 옳았다.

그 일은 샐러딘이 맡고 있었다.

샐러딘은 새벽 일찍 나가 밤늦게 들어오는 일과를 계속했다. 일단은 이 지역과 근접한 남대륙부터 탐색해 보겠다고, 그러며 사막을 헤치고 다니는 듯했다.

르네거는 검술 수련을 계속했다. 그 역시 새벽 일찍 연무장에 나가 밤늦게 카리나의 방으로 와 치료를 해 주고 돌아가는 일과를 지속했다.

성검이 다시금 말을 하고 있다고, 성검의 말에 따라 훈련을 하고 있다고, 그러며 스스로를 단련하고 있는 듯했다.

히론은 카리나가 레피오스에게 가지 않는 날에도 그를 찾아갔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그리도 반가운지, 무엇이 그리 할 말이 많은지 그는 카리나의 곁에 붙어 있는 때가 없었다.

이러한 덕분에 카리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맘껏 만끽할 수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바람이 좋네.

카리나는 양 뺨을 간지럽히는 여름 바람을 느끼며 미소 지었다.

평온한 흐름이었다. 느린 시간이었고, 다정한 풍경이었다.

이 모든 것들이 폭풍 전의 고요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카리나는 구태여 시간을 헤쳐 나가지 않았다.

현재에 머무르며 안정을 찾았다. 이것이야말로 그녀가 그토록 바라던, 평화였으니까.

‘하지만 얼마 가지 않겠지.’

셀러딘이 한 명의 사도만을 찾아 와도, 일은 진전될 것이다.

사도에게 부여했던 능력을 거두고, 그를 이용해 포고 활동을 해야 했다. 들이닥치는 신자들을 관리해야 했고, 또한 그를 이용해 연합군과 동맹을 맺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아포칼리타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분명 나를 찾아올 텐데.

“후우.”

카리나는 나지막한 한숨을 뱉으며 눈을 들어 올렸다.

찾아오면, 싸우면 된다.

또다시 찾아오면, 싸우면 된다.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우고.

그렇게 싸우다 보면 언젠가는…….

‘끝이 나겠지.’

그녀는 손을 말아 쥐며 생각했다.

고개를 젖힌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본다. 간지러운 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흩날리게 만들었다.

이때였다.

“카리나 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리나는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릴리구나.”

이곳에 왔을 때부터 친근감을 보이던 시녀, 릴리였다.

카리나는 그녀를 향해 비스듬한 미소를 내보였다. 릴리는 얼굴이 빨개진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아까부터 이곳에 계신 것 같아서요. 식사도 거르시고……. 그래서 별 건 아닌데, 제가 만든 과자거든요. 드셔 보시라고 가져왔어요.”

릴리는 작은 상자를 불쑥 내밀었다. 카리나는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 들었다.

음, 나는 밥을 먹지 않는데.

과자 같은 건 더더욱 먹지 않고.

그리 답을 하려 했지만, 눈을 반짝이고 있는 릴리를 보고 있자니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 정말 착해졌는데.’

카리나는 피식 헛웃음을 뱉으며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색색의 고운 쿠키가 가득 들어 있었다.

릴리가 직접 만들었다고 하기에 질이 꽤 좋은 것들이었다.

카리나는 개중 보라색을 띠는 쿠키를 잡아 들었다.

아삭.

그녀의 입안에서 부드러운 쿠키가 부서졌다.

너무 달지 않은 맛이 그녀의 혀를 휘감았다. 촉촉한 부스러기가 입안에서 사르르 녹았다.

꽤 맛있는데? 카리나는 남은 쿠키를 입안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실력이 좋네.”

“정말요? 감사합니다!”

릴리는 환히 웃으며 다시금 허리를 푹 숙였다. 카리나는 상자를 옆으로 두며, 그런 릴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곳은 신분제 사회이다.

왕은 존재하지 않는다. 왕처럼 군림하는 것은 3대 가문의 수장들이다.

귀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귀족처럼 피라미드의 상단에 있는 이들은 3대 가문의 신관들이다.

그렇기에 일반인들은 기를 써서라도 3대 가문에 들어가 말단 신관으로라도 살길 원했다.

신을 믿건, 믿지 않건 간에.

그렇기에 아포칼리타의 존재가 이들에게 더 크게 다가왔으리라.

아포칼리타는 신자와 비신자 사이의 차별이 없었으니까. 아포칼리타는 그저 인간의 생명만을 받았으니까.

생명을 가져온다, 는 행위가 비윤리적이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아포칼리타의 신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이 힘들어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두려워하는 것은 삶의 끝이 아니었다.

그들은 차별적인 시선을 두려워했으며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평생 아래에 머물러야 하는 스스로의 처지를 힘들어했다.

‘이렇게 생각하면 신자들을 더 빠르게 모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카리나는 생각하며 눈썹을 까딱였다. 아직도 멍하니 서 있는 릴리에게로 손짓한다.

“이리 오렴.”

“네, 네?”

“이리 와서 같이 먹자꾸나. 나 혼자 이 많은 걸 다 먹을 수는 없으니.”

“하, 하지만……!”

릴리는 새하얘진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이건 제가 카리나 님을 위해 만든 선물이에요. 제가 어떻게 같이 먹을 수 있겠어요.”

카리나는 당황하는 릴리의 얼굴과, 정갈하게 담겨 있는 쿠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런 선물을 받아 본 적이 언제였던가.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으며, 그녀는 릴리의 팔을 잡아끌었다.

“선물이니 너의 정성이 들어갔을 것이고, 너의 시간이 들어갔을 테지. 그 정성과 시간을 나만 가지고 있을 순 없지. 마음을 쏟은 너와 함께해야 더 기쁠 것 같구나.”

릴리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카리나의 말에 감동한 것일까? 잘 알 수 없었지만, 붉어진 얼굴로 보아 그녀가 꽤 기분이 좋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가…… 감사해요.”

릴리는 고개를 푹 숙이며 카리나의 옆에 몸을 앉혔다.

카리나는 그런 그녀에게 쿠키 한 조각을 쥐여 주었다. 릴리는 또다시 감사하게 쿠키를 받아 들며, 아삭아삭 먹기 시작했다.

“저는요.”

세 개의 쿠키를 다 먹어갈 때쯤 나온 말이었다.

“나중에 디저트 샵을 열고 싶어요.”

“그렇구나.”

“도심 한복판에 짓는 거예요! 1층은 제가 디저트를 만드는 과정을 볼 수 있게 만들고, 2층에는 편히 앉을 수 있는 의자와 소파를 두는 거죠. 1층에서 과자와 음료를 구매하고 2층에 가서 쉴 수 있게 할 거예요.”

응, 응.

카리나는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니까…….”

릴리는 그런 카리나의 옆얼굴을 힐끗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되면, 놀러 오시겠어요?”

카리나는 눈을 여러 차례 깜빡였다. 그러다 이제야 말뜻을 이해한 양, 낮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래 걸리겠구나. 도심 한복판은 값이 나갈 테니.”

“그건 그렇지만…….”

릴리는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그 모습이 작은 토끼처럼 보여, 카리나는 재차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생각은 해 보겠다.”

“정말요?”

릴리는 마치 카리나가 승낙이라도 한 것처럼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직 허락하지 않았는데.”

“고민해 주신다는 거잖아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죠, 뭘.”

그녀는 대답하며 자꾸만 웃었다. 거짓이 아니라, 정말 기뻐하는 듯싶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카리나는 생각했다.

평온이라는 건 함께 있어야 더 커지는 것이구나, 하고.

* * *

탁, 탁.

페넬로피는 발끝으로 땅을 치며 다리를 떨고 있었다. 이는 불안함에서 나온 행동으로, 그녀가 초조해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손톱을 자근자근 물어뜯는다. 이런 행동이 옳지 않은 것이라는 걸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의 페넬로피는.

이때, 바쁜 발걸음 소리가 문밖에서부터 들려왔다. 페넬로피는 마주 앉아 있는 남자를 무시하며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아힌!”

그녀는 문이 열리기도 전에 소리쳤다. 소리가 사라질 때쯤 아힌 데이펜이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왜 아직도 기다리고 있었어. 내가 간다고 했잖…….”

“어떻게 됐어? 정말 아포칼리타의 신전이 맞아?”

그녀가 이렇게도 초조해하는 이유는 단 하나.

엘리후 지방에 갑작스레 나타난 건물 때문이었다.

그곳은 과거, 아포칼리타의 신전이 존재했던 곳이다.

하지만 1차 신마전쟁 이후, 아포칼리타들이 모습을 감춘 틈을 타 라템 일족들이 몰살시킨 곳이기도 했다.

그렇게 연합군들이 무너뜨린 신전은 셀 수 없이 많았다. 덕분에 아포칼리타의 신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지금까지 그들은 숨죽인 채 살고 있었다.

한데 바로 어제.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엘리후 지방에 새로운 건물이 세워졌다고.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나타난 건물은 신전의 모양새를 띠고 있었으며 ‘그’ 문양을 품고 있었다고.

페넬로피는 믿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아포칼리타들은 탑에서 나오지 않고 있는바, 그들이 느닷없이 신전을 세울 것이라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 아포칼리타의 신전이 맞아.”

아힌의 말은 페넬로피의 마음을 와르르 무너뜨렸다.

“그리고 뱀의 여자가 세운 것이 맞고.”

뱀의 여자. 카리나 아포칼리타.

그녀가 무언가 일을 할 것이라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빠르게 움직일 것이란 건 미처 예측하지 못했다. 페넬로피는 두 주먹을 바르쥐었다.

“그 빌어먹을 아포칼리타가……!”

씩씩거리며 분을 표하던 그녀는, 이내 어깨를 떨어뜨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다시 신자들을 모을 계획일까?”

“짐작건대, 맞아.”

“그렇게 세력을 확장하고?”

“그렇겠지.”

아득.

페넬로피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전쟁을 하자.”

아힌과 남자의 눈이 동시에 돌아갔다. 하지만 페넬로피는 개의치 않았다.

“그들이 더 힘을 모으기 전에 쳐야 돼. 신자들이 없는 그들은 수세에서 밀릴 테니까. 지금 당장 전쟁을……!”

“페넬로피. 진정해.”

아힌은 그런 페넬로피의 팔을 붙잡았다.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 역시 몸을 일으켜 페넬로피에게 다가왔다.

“아힌 경의 말이 맞습니다. 진정하시지요, 수장님.”

페넬로피는 대답 대신 형형한 눈빛을 내보였다. 남자는 으쓱 어깨를 올렸다. 금발의 머리를 쓸어 넘기며, 푸른 눈을 반짝인다.

“왜 그렇게 겁을 먹고 계십니까? 고작 해야 한 채의 신전이 세워진 것뿐인데.”

“한 채의 신전? 그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고서 그런 말을 하시는 겁니까?”

페넬로피는 부득부득 이를 갈며 말했다.

아포칼리타의 신전.

그것은 아포칼리타가 돌아왔다는 신호탄과 같은 것이라, 뿔뿔이 흩어져 있는 신자들이 한곳에 모이리라는 것을 의미했다.

수천, 수만 명의 신자들.

그 신자들 때문에, 3대 가문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던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감내했던가.

가만히 둘 수 없었다. 페넬로피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뱀의 여자는 아포칼리타를 배신했다 하지 않았습니까. 하면 그것은 그녀의 독단적인 행동일 터.”

남자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 듯했다.

“그녀만 죽이면 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는 이제 막 신관이 된 철없는 아이의 치기일 수도 있었고, 근거 있는 자신감이기도 했다.

페넬로피는 주먹 쥔 손을 바르르 떨었다.

“당신은 카리나 아포칼리타를 만나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래.”

“그렇다 한들 달라지는 게 있습니까?”

남자는 피식 헛웃음을 뱉었다.

“저는 성검의 주인.”

그의 이름은 케셰트 라템.

“추악한 아포칼리타는 제 앞에서 온전하지 않을 텐데요.”

성검의 주인이자 라템을 이끄는 수장이 된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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