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휙! 휙!
다가오던 새벽 여명이 천천히 물러가고, 모습을 드러낸 태양이 하늘의 위쪽으로 올라갈 때까지.
르네거는 쉼 없이 검을 휘두르는 중이었다.
『각성을 하더니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이냐? 그만 좀 하거라!』
성검의 질려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러해도 르네거는 멈추지 않았다.
휘두른다. 벤다. 다시 휘두른다. 벤다.
이 반복적인 작업을 그는 결코 힘들어하거나 지겨워하지 않았다.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목표. 목적. 삶의 종착지.
과거에는 추종하는 신을 위하여, 신의 말씀을 받들기 위하여, 신의 곁으로 가기 위하여 검을 휘둘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그저,
강해지고 싶었다.
강해져야만 했다. 그 누구보다도 자신은 강해야만 했다.
카리나의 곁에 당당히 서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를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생명의 종말을 고하듯 새까맣기만 한 신전에 서 있던 그녀는 얼마나 고귀해 보였던가. 어찌나 찬란해 보였던가.
죽음을 말하는 아포칼리타의 땅을 딛고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뿜어내는 빛은 생명의 것보다 맑았으며 탄생의 것보다 화려했다.
그때에 르네거는 생각했다.
그녀의 곁에서,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고.
하지만 자신은 인간이었다.
쉽게 죽어 버리는 인간.
죽지 않는 존재의 곁을 지키는 죽는 존재라니. 이보다 더 우스운 관계가 어디 있겠는가.
그렇기에 르네거는 결심했다.
나를 죽일 수 있는 건, 오직 카리나밖에 없도록 만들겠다고.
휙! 휙!
그렇기에 이렇게 매일매일 오랜 시간 검술 연습에 매진하고 있는 것이었다. 근육이 찢어지고 관절이 억 소리를 내고 있더라도 말이다.
『너는 정말 미친놈이다.』
성검의 재잘거림은 쉼 없이 들려왔다.
『이렇게 강해져 놓고 고작 하는 일이 아포칼리타를 지키는 것이라니! 정신 차리거라! 네 아비가 알면 식음을 전폐할 것이야!』
우뚝.
르네거의 팔이 그대로 멈췄다. 그는 들고 있던 성검을 세로로 세웠다.
“바다신께서 고작 이런 이유로 식음을 전폐한단 말입니까? 그분은 참으로 여린 성정을 지니고 있나 봅니다.”
르네거는 검신을 노려보며 빈정거렸다.
“이러다 제가 죽으면 바닷물이 넘치도록 엉엉 울겠군요.”
『너!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닥치십시오, 좀.”
르네거는 성검을 붕붕 휘두르며 말했다. 좁혀진 미간은 그가 불쾌해하고 있음을 확연히 드러내 주고 있었다.
“당신은 절 죽이고자 한 이입니다. 이건 불변하는 사실이며, 저는 그렇기에 용서할 수 없습니다.”
검신이 부르르 떨렸다. 빛을 발광한다.
과거였다면 희뿌연 빛이 나왔을 테지만 지금은 새까만 어둠뿐이다. 르네거는 검신을 지배하고 있는 검은 기운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렇게 내가 밉다면 나를 버리는 게 맞지 않느냐! 지금이라도 나를 버려다오. 응?』
픽.
르네거는 실소를 뱉었다.
“제가 당신을 버린다면 라템으로 갈 것 아닙니까. 누구 좋은 일을 합니까.”
『이익……!』
성검은 더욱 더 격하게 몸을 떨었다. 하지만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성검은 단순한 검일 뿐이다. 이제는 자신에게 지배당하는.
이렇게 생각하니 꽤 기분이 좋아졌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성검에 지배당하던 자신이 아니던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자신은 진정한 성검의 주인이 되었고, 성검은 더 이상 자신을 거역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게…….’
카리나 덕분이지.
그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크나큰 저택을 한 바퀴 둘러본다. 카리나가 있을 방을 찾아본다.
이때였다.
“야, 인간.”
샐러딘이 불쑥 튀어나왔다. 르네거는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섰지만, 이내 익숙한 얼굴을 하며 샐러딘을 바라보았다.
“르네거입니다.”
“그래, 인간.”
르네거는 사붓 눈을 찡그렸다. 샐러딘은 그런 르네거를 보며 씨익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아니, 인간을 인간이라 하지 그럼 뭐라 해? 토끼나 고양이 같은 걸로 불러 주길 원하는 거야?”
빈정거림을 가득 담아 말하는 그를 보며, 르네거는 후우 한숨을 내뱉었다.
“상대를 골리는 걸 좋아하는 부분은 참 카리나를 닮았습니다.”
그의 말에, 샐러딘은 양 입술을 찢어 올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나와 카리나가 닮은 구석이 있기는 하지.”
“그것만 닮았습니다.”
르네거는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카리나는 당신처럼 얄밉지 않으니까요.”
“……나 열받으라 하는 소리인가?”
“눈치채지 못했다면 멍청한 것이겠죠.”
이익.
샐러딘은 눈을 가늘게 뜨며 르네거를 노려보았다.
“넌 정말 재수 없어.”
“압니다.”
“짜증이 날 정도야.”
“일부러 이런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습니까?”
샐러딘의 눈가가 부들부들 떨렸다.
이 건방진 인간은 정말 재수 없기 짝이 없었다. 한 번이라도 저 콧대를 눌러 주고 싶은데. 으득. 샐러딘은 이를 갈았다.
“한판 붙자.”
그는 들고 왔던 검을 르네거의 발치로 내던졌다. 르네거는 익숙한 몸짓으로 검을 주워 들었다.
“당신은 어제도, 그제도 제게 패배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이나 내일은 이길 수 있는 거 아니겠어? 잔말 말고 덤벼.”
호승심이 가득한 부분도 영락없이 카리나를 닮았다. 르네거는 피식 헛웃음을 뱉었다.
“쉽지 않을 겁니다.”
챙!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샐러딘이 달려들었다.
르네거는 그의 검을 모로 세워 그의 손톱을 막으며 몸을 뒤로 젖혔다. 옆구리의 빈틈을 타 팔꿈치로 그곳을 내리찍었다. 윽, 샐러딘의 신음을 느끼며 그는 한 바퀴 몸을 돌려 자세를 정돈했다.
“카리나는요?”
“레피오스 님을 만나러 갔어.”
“당신도 나가야지 않습니까?”
“해가 진 후에. 그때가 돌아다니기 편하니까.”
챙!
다시 한번 맞부딪혔다.
이번에는 샐러딘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그는 르네거의 발을 공격했다. 그의 발목을 노리며 달려든다. 르네거는 발을 굴러 그의 공격을 피했지만 찰나에 자세가 휘청거렸다. 샐러딘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윽.
르네거는 샐러딘의 손톱이 스친 왼쪽 팔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검을 바르쥔다.
“사도를 찾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맞아. 그런데 이놈들이 워낙 꼭꼭 숨어 버린 탓에 쉽지가 않네.”
챙, 챙, 챙!
그들은 몇 번이고 더 맞부딪혔다.
샐러딘의 공격은 일전보다 훨씬 더 정교해져 있었다. 르네거가 좋은 대련 상대가 된 덕분이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르네거를 이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르네거는 두 다리에 바싹 힘을 주었다. 샐러딘이 숨을 고르는 사이, 도약해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챙!
샐러딘은 제 어깨로 향해진 검을 간신히 막아 냈다. 그러나 르네거의 공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까득, 그는 검을 비틀어 그의 손톱을 갉아 냈다. 으드득, 잘 벼려진 것들이 얽혀 갉히는 소리가 났다. 샐러딘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르네거의 눈이 반짝였다.
콰앙!
르네거의 검이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그 옆에, 간신히 공격을 피한 샐러딘이 널브러진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와, 날 죽일 생각이었냐?”
“피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르네거는 검을 거두며 가볍게 대꾸했다. 샐러딘의 눈이 가늘어졌다.
“괴물 같은 새끼.”
“아포칼리타에게 들은 말이라 기분이 좋군요. 앞으로도 그런 칭찬을 많이 해 주시길.”
“칭찬 아니거든!”
왈칵 성을 내는 샐러딘을 보며, 르네거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에게로 손을 내민다. 잡고 일어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샐러딘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홀로 일어섰다.
르네거는 멋쩍어진 손을 되돌렸다. 그러나 민망하진 않았다. 그가 제 손을 잡지 않는 건 익숙했기 때문에.
“그런데 사도라는 게 대체 무엇입니까?”
르네거는 옷에 묻은 먼지를 툴툴 털고 있는 샐러딘을 향해 물었다. 샐러딘은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며 대답했다.
“하긴. 인간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을 테지. 특히 너 같은 신관에게는.”
“저는 지금 신관이 아닙니다만.”
“출신은 지워지지 않는 법이지.”
그는 피식 조소했다.
“내가 발악해도 아포칼리타인 것처럼 말이야.”
르네거는 대답하지 않았다. 샐러딘의 말은 그저 자조적인 중얼거림일 뿐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생각이 맞은 듯, 샐러딘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교만, 인색, 시기, 분노, 음욕, 탐욕, 나태. 이건 모두 신이 버린 본능이야. 너도 알고 있지?”
샐러딘이 말한 것들은 주신이 금기하고 있는 죄악이었다. 르네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포칼리타는 7명의 사도를 뽑아 그 죄악의 힘을 부여했어. 각각의 사도들은 자신이 지닌 본능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르네거는 잠자코 경청했다.
“그렇기에 신자들은 사도를 만나면 그 사도가 지닌 죄악을 맛볼 수 있게 돼.”
샐러딘은 양팔을 벌렸다.
그의 입에서 전과는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아포칼리타의 성전을 읊었다.
-교만의 사도를 만나면 자만이라는 드높은 자긍을 느낄 수 있게 되며 인색의 사도를 만나면 이기심이 주는 안정을 느끼게 되리라.
-시기의 사도를 만나면 타인을 비방하는 데에 자유를 느끼게 되며 분노의 사도를 만나면 절제의 해악을 깨닫게 되고 음욕의 사도를 만나면 성이 주는 쾌락을 느끼게 되리라.
-탐욕의 사도를 만나면 재화가 주는 풍요로움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며 나태의 사도를 만나면 게으름이 주는 평안을 즐길 수 있게 되리라.
“물론 내가 인색의 사도를 죽여 한 자리가 비긴 하지만, 어찌 되었든.”
르네거는 두 손을 모았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생각을 정리한다.
주신은 인간의 근본적인 본능을 거세했다.
교만하지 말며 인색하게 굴지 말고, 시기하지 말며 분노하지 말고 음욕하지 말며 탐욕하지 말고 나태해지지 말아라.
신관이었을 때는 그 말씀을 높이 받들며 살았다. 르네거뿐만 아니라 모든 신관이 그러했으며 모든 신자 들이 그러했다.
절제하고, 숨을 죽이며 살았다. 인간이나 인간의 본능을 따르지 않고 살았다.
그렇다면 왜 신은 인간에게 그러한 본능을 주었는가, 의문이 생겼으나,
-주신은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죄악을 이겨 낸다면 주신은 기꺼이 우리를 맞이하리라.
이와 같은 내용이 성서에 함께 적혀 있었기 때문에 모두가 수긍하며 말씀을 따랐다.
하지만 아포칼리타는 아니었다.
아포칼리타는 그러한 본능을 인정해 주었고, 부추겼다.
더 이상 참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설파하며 닳을 만큼 참아 온 인간들을 다독였다.
그때에는 그들이 인간을 꾀어내는 악마와도 같다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애초에 주신이 바라는 인간상이 너무도 무결하다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포칼리타의 신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데에 사도들의 영향도 있었겠군요.”
“당연하지. 인간은 원래 본능을 좇는 본능이 있으니까.”
피식 웃는 샐러딘을 보며, 르네거는 다시금 생각에 빠졌다.
어쩌면 인간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있는 건 신이 아닐 수도 있다고.
신은 인간을 창조했으나, 인간을 이해하지는 못한다고.
정작 인간의 본능을 알고 이해하는 존재는…….
‘아포칼리타.’
그들일 수도 있다고.
르네거는 본능적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신을 저버린 지 오래지만, 그를 배반하는 생각을 할 때마다 몸은 자동적으로 반응을 했다.
하지만 이런 것도 시간이 지나면 흐려질 테지. 르네거는 쥐었던 손을 펴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샐러딘은 외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 주변으로 쾌청한 바람이 부드럽게 흘러갔다.
“아, 평화롭네.”
그는 고개를 위로 젖히며 중얼거렸다.
말대로, 풍경은 평화로웠다.
햇살은 따스했으며 바람은 정겨웠고 근근이 들려오는 새들의 울음은 아름다웠다. 사각사각, 풀이 뉘여져 내는 소리는 지극히도 풍요로웠다.
“마음에 드십니까?”
“나름.”
대답에, 르네거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제 집입니다.”
샐러딘은 미간을 좁혔다. 르네거를 올려다본다.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어?”
“아마도요.”
“싫은데. 너에게는 절대 안 할 건데.”
피식.
르네거는 실소하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어느새 눈을 가릴 정도로 길어 버린 머리카락이 그의 손가락을 따라 흘러내렸다.
“카리나가 말한 평화가 이런 거겠지.”
샐러딘은 그때까지도 하늘을 올려다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새파란 하늘, 새하얀 구름, 시원한 바람.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완벽한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아, 젠장.”
샐러딘은 몸을 튕기듯 일으켰다. 갑자기 왜? 르네거는 의아해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야. 난 아무래도 행복을 느끼면 안 되나 보다.”
샐러딘의 두 눈에는 경악과 공포, 혼돈이 가득했다.
“행복하다 생각하자마자 저런 미친놈들이 나타나니 말이야.”
그게 무슨.
뜻을 알 수 없는 말에 르네거는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곧 샐러딘이 말한 의미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콰앙!
멀지 않은 곳에서 폭발이 이어졌다. 뿌옇게 올라오는 먼지 너머,
새까만 존재가 보였다.
아포칼리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