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처음 왔을 때보다는 많이 좋아졌구나.”
카리나의 상처를 살피던 레피오스의 말이었다.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 레피오스 님 덕분이에요.”
“라템의 인간 덕분이기도 할 테다.”
“그런가요?”
카리나는 후후, 웃으며 턱을 당겼다.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여 본다. 살갗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이 없었다. 상처가 아물고 있기 때문이었다.
근 3년의 시간 동안 매일 달고 살던 상처였기에, 카리나는 통증이 없는 목덜미가 낯설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좋았다. 이제야 고통 없는 하루를 보낼 수 있게 된 것이었으니까.
“그러해도 무리하면 안 된다. 아직까지는 완치가 된 게 아니니.”
“알아요.”
“적어도 두어 달은 자중해야 해.”
“알겠어요.”
“마음이 놓이지 않으니, 원.”
핀잔 섞인 말이었지만, 카리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또다시 후후, 하고 낮게 웃을 뿐.
이곳에 오면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최근 들어 웃음이 늘었다.
평온한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일까. 위태롭기만 했던 지면을 단단히 다지기 위한 결심이 바로 섰기 때문일까.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그녀는 매우 안정되어 있었다.
“끈질긴 상처야. 치료가 되지 않으려 발악을 하고 있으니.”
[카오스 놈의 힘이 그렇지, 뭐.]
카리나가 가져왔던 릴리의 쿠키를 모두 다 먹어 치운 히론이 혀를 날름거리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물어봐야지 생각했는데.”
카리나는 그런 히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왜 아버지가 고대 마물이었다는 걸 숨긴 거야? 너와도 알고 지냈던 사이일 거 아니야?”
윽.
히론은 고개를 뒤로 빼며 침음을 흘렸다.
레피오스를 바라본다. 도와 달라는 시선을 보냈지만, 레피오스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모르는 척할 뿐이었다.
하아아.
히론은 한숨을 터뜨렸다. 파리를 틀고 고개를 빳빳하게 세운다.
[나는 카오스 놈을 알았지만 그놈은 날 몰랐다. 그러니 내 기억이 남아 있건 말건 그놈은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지.]
“그리고?”
[……그놈이 마물인 걸 숨긴 건, 네가 그놈의 사정을 알게 된 후가 걱정되어 그랬다.]
히론은 카리나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네가 동정할 것 같았으니.]
“동정?”
[그래. 동정. 네가 카오스 놈을 안타까이 여겨 아포칼리타를 탈출하는 계획을 철회할까 걱정되었다.]
히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리나는 조소를 터뜨렸다.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히론을 내려다본다.
“그때 내가 했던 말을 안 들은 거야?”
그녀의 두 눈은 아득하게도 번들거렸다.
기만, 멸시, 부정.
부정적인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흘러 지나갔다.
“아버지를 이해하지만, 그를 받아 들일 수는 없어. 이해와 공감은 전혀 다른 영역이니까.”
그가 아무리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한들, 내가 당한 고통들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니까.
카리나는 고개를 떨어뜨리는 히론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레피오스를 바라본다.
“레피오스 님은 아버지를 동정하시나요?”
“그렇게 보이니?”
레피오스는 제게 화제가 돌려질 줄 몰랐다는 듯, 다소 눈을 크게 뜨며 반문했다.
“아버지가 필요악이라고 하셨잖아요. 질서를 위해서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게 악이라고.”
레피오스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기억을 더듬던 그는, 이내 야트막한 미소를 입가에 걸어 올렸다.
“그래. 네 말대로 나는 카오스를 동정했던 걸지도 모른다.”
“레피오스 님을 멋대로 살려 냈는데도요?”
“그래.”
“인간들을 죽이고, 실험했는데도요?”
“그때에는 화가 났지. 너도 기억하고 있을 게다. 나와 카오스가 싸우던 모습을.”
당연히 기억하고 있다. 레피오스가 화를 낸 적은 드물었으니까.
“하지만 그 감정은 화일 뿐이었다. 화는 순간에 치솟고, 순간에 가라앉지. 만약 화를 잡고 끌면 그때부터 오기가 되고 미움이 되는 것이지만, 그러하지 않았다. 나는 카오스의 행동에 화가 났던 것뿐이야. 카오스를 미워하지 않았다.”
레피오스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태양은 만물을 비춘단다. 모든 생명을 하나씩 어루만져 싹이 트게 만드는 것이 바로 태양이지. 그래서 태양의 다른 말은 자애란다.”
카리나의 인상이 와락 찌푸려졌다.
누가 태양신의 아들이자 고대의 존재가 아니랄까 봐, 하는 말이 꼭 성서에 기록된 말씀들 같았다.
“정말 신 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카리나는 빈정거렸다. 레피오스는 빙그레 웃으며 가볍게 대꾸했다.
“나는 모든 존재를 사랑하니 말이야.”
“전 아니에요.”
“그래?”
레피오는 사붓 입매를 굳혔다.
“그럼 네가 사랑하는 존재는 무엇이더냐?”
“그건…….”
느닷없는 질문에, 카리나는 갈 길을 잃고 입을 뻐끔거렸다.
[왜 말이 없느냐? 날 사랑하지 않는 것이냐?]
히론이 툭툭 꼬리를 흔들었지만, 카리나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못했다.
사랑…….
인간을 구성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것. 살아가기 위해 가장 무게감이 있는 감정.
하지만.
카리나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감정의 흐름을 믿지 않았다.
사랑은 불행 앞에서 작아지는 것이니까.
감정 같은 건,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니까.
그렇기에 정의를 내릴 수 없었다. 사랑에 대해서도, 저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도.
“카리나.”
레피오스의 말이었다.
“히론에게 들었다. 라템의 인간이 결계를 찢고 도망쳤을 때, 네가 혼비백산하며 히론을 찾았다는 것을.”
그 얘기를 왜 레피오스 님에게. 카리나는 히론을 슬쩍 째려보았지만, 어쩐지 삐져 있는 히론은 그런 카리나를 무시했다.
“그때에 너는 왜 그러했느냐?”
“…….”
“히론을 잃을까 두려웠기 때문이 아니더냐?”
카리나는 두 손을 맞잡았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린다.
결계가 찢어진 것을 알았을 때부터, 카리나는 온몸에 도는 떨림을 멈출 수가 없었었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사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두려움.
그래. 두려웠다. 히론을 잃을까 두려웠다. 혼자 남게 될까 무서웠었다.
“그게 사랑이 아니라면 대관절 무엇이겠느냐. 잃을까 두려운 것, 떠날까 두려운 것, 사라져 버릴까 두려운 것. 이것들은 모두 다 사랑이라는 감정에서 기반된 공포란다.”
레피오스의 말을 귀담아 듬으며, 카리나는 느리게 시선을 내렸다. 히론을 바라본다.
“그래도 저는 잘 모르겠어요.”
레피오스는 미소 지었다. 히론과 눈을 마주친다. 섞인 시선 속, 카리나에 대한 연민을 주고받는 듯했다.
“인간 남자가 너를 사랑하고 있지.”
르네거를 뜻하는 것일 테다. 카리나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그게 과연 사랑일까요?”
이게 바로 지금껏 카리나가 르네거를 밀어내 온 이유였다.
르네거의 감정이 사랑인지, 자신은 확신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저 아기 새가 어미 새를 보자마자 각인되는 것처럼, 손을 잡아 준 내게 홀려 버린 게 아닐까. 그리고 사랑이라 착각하는 것이다.
카리나는 이러한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사랑이 아니라면 왜 신을 배신했겠느냐?”
“그건 상황이 그렇게 맞춰져서.”
“그럴 리 없다.”
그러나 레피오스는 단호했다. 그는 오랜 시간 르네거와 함께한 카리나보다, 르네거의 감정을 더 확신하고 있었다.
“깊이 고심해 보거라.”
레피오스는 카리나의 손등 위에 손을 얹었다.
“네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
“또한 네가 진정으로 사랑할 때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따스한 체온이 느껴졌다.
“곧 알게 될 것이다.”
실험체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것.
오직, 인간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것.
그렇기에 카리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감정은 인간들에게만 허용되는 게 아닐까.
나 같은 존재는 감히 사랑할 수 없는 게 아닐까.
그녀는 눈을 내려 감았다. 손에 닿는 온기가 소름 끼치도록 무서웠다.
* * *
“행복하다 생각하자마자 저런 미친 놈들이 나타나니 말이야.”
콰앙!
샐러딘의 말이 끝나자마자, 멀지 않은 곳에서 폭발이 발생했다.
쿵, 쿵, 쿠웅!
폭음이 연달아서 들려왔다. 르네거는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아포칼리타의 공격입니까?”
“그래.”
샐러딘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까득 이를 깨물었다.
“냄새가 나, 아주 엿 같은 냄새가.”
코를 찌르는 듯한 비린내. 더러운 털 뭉치에서 나는 썩은 내. 이런 고약한 악취는 분명.
“제이슨과 아멜이겠지.”
바다 괴물인 크라켄과 섞인 제이슨. 그리고 키메라와 섞인 아멜.
탑에 있을 때부터 사사건건 샐러딘과 부딪혔던 놈들이었다. 그렇기에 불안함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는데, 역시나 이렇게 쫓아온 터였다.
더불어 그들의 냄새에 다른 불순물이 섞여 있는 게 느껴졌다.
자일.
그 고유의 끈적한 피 냄새가 함께 풍겨졌다. 그렇다면 자일이 저들에게 힘을 나눠 주었다는 이야기겠지.
빌어먹을.
샐러딘은 손톱을 길게 잡아 뺐다. 그의 발끝에 하얀 불꽃이 머물렀다.
“두 마리야.”
“예?”
“아포칼리타. 두 마리라고.”
르네거는 사붓 인상을 찌푸렸다. 스스로를 짐승처럼 여기고 있는 샐러딘의 태도가 기껍지 않은 것일까. 그는 다소 굳은 시선으로 샐러딘을 바라보았다.
“하나는 바다 괴물, 하나는 섞인 놈. 누굴 상대할래?”
하지만 지금 그에게 지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르네거는 샐러딘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눈을 돌렸다. 그곳에는 두 명의 아포칼리타가 서 있었다.
개중 갈색 머리를 하고 있는 자는 몸집이 작았는데, 웃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덕분에 온몸이 다 흰색 털로 뒤덮여 있는 게 보였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털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더 날카롭고 잘 벼려진. 바늘처럼 가늘고 뾰족한 것들이었다.
그 옆에 서 있는 이는 르네거가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큰 신체의 남자였다. 그는 옆의 아포칼리타와는 달리 긴 소매의 상의와 긴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소매의 끝과 바지의 끝자락에서 미끄덩한 무언가가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
르네거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저들은 낯설지 않은 아포칼리타였다. 과거에도 본 적이 있는 이들.
“그렇지 않아도 한 번은 만나 보고 싶었던 아포칼리타였는데.”
르네거는 피식 비소하며 중얼거렸다.
“잘되었네요.”
과거, 저들에게 당한 신자들만 해도 수천 명은 될 것이리라. 저들에게 당한 신관만 하여도 수백은 될 것이리라.
자신 역시도 저들 때문에 사지를 오간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의 상황은 마치 복수를 위해 만들어진 판 같았다.
“전 크라켄 쪽을 맡겠습니다.”
“누가 바다신의 아들 아니랄까 봐.”
“딱히 지금 할 말은 아닌 듯합니다만.”
샐러딘은 으쓱 어깨를 올렸다.
“자일의 힘도 나눠 받았을 거야.”
그자의 힘이라면 돌로 변하는 능력을 뜻하는 것인가. 르네거는 고개를 끄덕이며 성검을 바르쥐었다.
“조심해라.”
르네거는 곧장 발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샐러딘 역시 그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