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68화 (68/135)

68화

“카리나가 안 보여. 넌?”

제이슨의 목에 목마를 타고 있는 아멜이 말했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고 기운을 감지해 보아도 카리나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기껏해야 느껴지는 건 건방진 개새끼의 기운뿐.

“안 보인다. 없는 것으로 파악. 이곳에.”

제이슨은 아멜을 바닥에 내려 주며 말했다. 거구의 몸과는 다르게 말과 행동은 굼뜨기 짝이 없었다.

“에이씨, 잔챙이들만 상대하다 가겠네.”

아멜은 퉤, 침을 뱉으며 말했다. 하지만 제이슨은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니다, 잔챙이. 강하다, 저 인간.”

제이슨은 아멜의 양 겨드랑이를 잡고 높이 들어 올렸다. 아멜은 훅 높아진 시야를 느끼며 제이슨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래 봤자 인간인……. 뭐야, 저거?”

아멜의 몸에 가득한 털이 바싹 곤두섰다.

“성검의 주인이잖아?”

저놈을 알고 있다. 모를 리 없지 않은가.

라템의 성기사.

성검의 주인.

저 인간에게 당한 형제들만 해도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였다. 아멜의 인상이 와락 찌푸려졌다.

“에이씨, 대체 어떻게 구워삶았기에 저놈이 여기 있는 거야?”

“말한 인간. 자일이.”

“그렇겠지.”

쯧.

아멜은 혀를 차며 발버둥을 쳤다. 이제 그만 내려 달라는 뜻이었다.

제이슨은 익숙한 양 아멜을 다시 내려 주었다. 아멜은 구겨진 털을 탈탈 펴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성검의 주인까지 꾀어내다니. 하여간 카리나답다니까.”

아멜은 피식 조소하며 중얼거렸다.

카리나 아포칼리타.

같은 탑에 살았고, 비슷한 시기에 창조된 그들이었지만 카리나는 그들과 가까이 지내지 않았다. 아니, 그녀는 탑의 그 누구와도 가까이 지내지 않았다. 그나마 친분이 있었던 건 샐러딘 정도랄까.

하지만 탑의 형제 모두는 카리나를 주시했었다.

카리나가 내비치는 특유의 고고함을, 그렇기에 드러나는 이질감을 모두가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쩐지 아포칼리타 같지 않다, 고 생각했었는데.

“못된 여자. 원수. 아버지의.”

아버지를 죽이고 도망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에, 형제들은 좌절했으며 또한 분노했다.

아버지가 되살아나고 있다 한들, 일전과는 같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의 복수를 해야만 했다. 모두가 그렇게 칼을 갈고 있었다.

“그래, 그래. 용서할 수 없지.”

아멜은 제이슨의 허리를 툭툭 치며 대꾸했다.

“넌 저 인간을 맡아라. 난 개새끼 좀 상대하고 올게.”

제이슨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아, 하는 소리를 내며 아멜에게로 허리를 굽혔다.

“해도 되나? 죽이는 것?”

아멜은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한 거 아니야?”

그는 아멜의 허리를 팡팡 치며 비죽 비소했다.

“인간이잖아.”

제이슨은 꾸벅 고개를 끄덕인 후, 능숙한 걸음으로 수풀을 헤치고 나아갔다. 성검의 냄새, 신의 냄새가 나는 인간을 향하여.

* * *

“이야, 이게 누구야.”

아멜은 눈앞에 나타난 샐러딘을 보며 보란 듯이 비소했다.

“도망친 개새끼가 여기 있었네.”

그의 몸을 뒤덮고 있는 털이 바싹 곤두섰다. 벌려진 입 너머로 사자의 송곳니가 보였다. 샐러딘은 와락 눈살을 찌푸렸다.

“야, 냄새나니까 아가리 닫아. 어우, 너는 씻지도 않냐. 저 멀리서부터 네 썩은 내가 나는데 아주……!”

“닥쳐!”

쾅!

아멜은 순식간에 샐러딘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의 움직임은 르네거의 것보다 훨씬 더 느렸다. 그렇기에 샐러딘은 가뿐히 그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촤악!

아멜이 달려들었던 땅은 깊게 파여 있었다.

무식하게 힘만 센 놈 같으니라고.

샐러딘은 아멜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며 뒤로 물러섰다.

“냄새난다는 말이 싫으면 좀 씻고 다니던가. 씻지도 않으면서 이렇게 질색하면 뭐라 해야 하냐?”

아멜은 뜨거운 숨을 씩씩 내뱉었다. 곤두선 털이 파르르 떨렸다.

“너 같은 개새끼보다는 내가 낫지. 고작해야 대가리 세 개 달린 개밖에 더 되냐?”

하.

샐러딘은 여유로운 비소를 내보였다.

“그렇지. 난 어둠의 신이 키우던 개였지만 너는 애초부터 근본도 모르는 실험체에서 비롯된 찌꺼기니까. 나보다 네가 낫지. 훨씬 나아서 배 아파 죽겠다, 야.”

“이 미친 새끼가……!”

쾅!

아멜은 다시금 달려들었으나 샐러딘은 여유롭게 그를 피했다.

느려.

너무 느려서 재미가 없을 정도야.

탑에 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아멜과 대등하게 싸웠었는데.

자신이 보다 강해진 것일까. 샐러딘은 입술을 찢으며 양껏 웃었다.

“자일이 보냈냐?”

“내가 찾아왔다.”

“지랄.”

샐러딘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새하얀 불꽃이 그의 손바닥을 뒤덮었다.

“자일 놈의 냄새가 이렇게 나는데.”

이번에는 샐러딘의 차례였다. 그는 바닥을 향해 불꽃을 내리꽂았다.

쩌저적!

갈라진 땅은 순식간에 아멜에게로 나아갔다.

쿠웅!

아멜이 딛고 있는 지반이 무너졌다.

“미친……!”

아멜은 몸을 굴려 간신히 낙사를 피했다.

샐러딘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뭘 받았냐? 가고일의 피? 뱀파이어의 피?”

카리나가 돌로 굳히는 능력이 있으니, 가고일의 피를 받지 않았을까. 샐러딘은 그렇게 생각했다.

“궁금하냐?”

아멜은 퉤, 침을 뱉으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자일이 아버지를 어떻게 살려 냈는지 너는 모르지.”

자일이 준 힘을 사용하고 싶지 않았던 그였다. 같은 형제인 자일의 도움을 받는다는 자체가 고까웠으므로.

하지만 지금 샐러딘을 보고 있으니, 저놈을 죽이지 않고 돌아가면 저가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으득.

아멜은 이를 갈며 눈을 부라렸다.

“자일이 힘을 얻었거든.”

힘?

샐러딘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때,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우웅, 우우웅, 하는 진동 소리. 샐러딘은 귀를 쫑긋 세웠다.

“나도 나눠 받았고.”

촤악!

높디높은 나무 너머, 뼈밖에 남지 않은 거대한 동물들이 물밀 듯 밀려왔다.

“넌 오늘 뒈질 거다, 개새끼야.”

자일은 생명을 창조하는 힘을 얻었다.

그 힘을 나눠 받은 아멜은, 시체에 생명을 부여할 수 있게 되었다.

샐러딘은 이 자리에서 죽게 될 것이다.

자신이 만들어 낸 것들은 절대 죽지 않는 존재이니까.

아멜의 입술이 번듯하게 치켜 올라갔다. 샐러딘의 얼굴이 빳빳하게 굳어 들어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 * *

쿠궁!

거친 폭음에, 르네거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소리가 난 쪽은 저택의 부근. 분명 샐러딘이 있는 곳일 텐데.

혹시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르네거는 걱정이 섞인 시선으로 내다보았다.

이때였다.

“금지. 방심.”

쿠웅!

기다란 촉수가 르네거를 후려쳤다.

쿨럭!

르네거는 거친 숨을 토해 내며 황급히 몸을 비틀었다.

다행히도 촉수에 붙잡히지 않았지만, 그에게 얻어맞은 곳이 홧홧했다.

독이 묻어 있는 것일까. 르네거는 굶고 있는 살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이유. 궁금. 왜 카리나와? 같이?”

제이슨은 르네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새까만 눈동자는 어떠한 악의도 품고 있지 않았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깨끗해 보였다.

하지만 순수하다 해서 꼭 선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순수함이 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니까.

“말해 주나? 고문하면?”

바로 지금처럼.

르네거는 검을 바르쥐었다.

“그건 절 쓰러뜨리고 나서야 할 말인 듯합니다.”

제이슨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않는다. 죽이지는. 듣는다. 살려 둬서. 죽인다. 그리고.”

그의 소매를 통해 튀어나온 촉수가 번들거리며 움직였다.

* * *

[카리나야.]

집으로 돌아가는 길.

카리나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히론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쭉 내밀었다.

[카리나야.]

거듭 그녀를 부르는 그였지만, 카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소 멍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할 뿐.

히론은 왈칵 짜증이 났다.

[카리나야!]

그는 꼬리로 찰싹, 카리나를 때리며 외쳤다. 카리나는 그제야 고개를 내렸다.

“응. 듣고 있어.”

[왜 그렇게 넋이 나가 있는 것이냐? 아까 레피오스의 말 때문이더냐?]

카리나는 대답 대신 히론을 빤히 쳐다보았다. 히론은 으으, 신음을 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랑이건 뭐건 네게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다. 그런 걸로 네 심기가 어지러워져서는 안 돼!]

지금 중요한 건 고작 그런 감정들이 아니라는 말을 하는 걸 테지.

집중해야 할 건 당장에 닥친 현실, 곧 찾아올 미래라고.

히론이 할 법한 말이기는 했다. 카리나는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알아. 하지만 그것 때문이 아니었어.”

[그럼? 그럼 왜 넋을 놓고 있던 것이냐?]

“생각할 게 좀 많거든. 그러니까 예컨대.”

[예컨대?]

카리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레피오스의 말을 고민하고 있었다 하면 분명 화를 낼 테니, 다른 방향으로 둘러대야 했다. 그녀는 빠르지 않게 말을 덧붙였다.

“……자일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내가 신전을 세웠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하는 생각.”

끄응.

히론은 침음을 흘리며 몸을 뒤틀었다. 혀를 날름거린다.

[그놈이야 기회를 보고 있을 테지.]

“기회?”

[그래. 너를 급습할 계획.]

타당한 추측이었다. 카리나는 슬쩍 웃으며 히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부활 의식 때문에 쉽게 자리를 비우지는 못할 것 같은데.”

[아포칼리타의 형제가 어디 그놈 한 명뿐이더냐?]

“그건 그렇지.”

아포칼리타의 형제들은 수백 명에 다다랐다. 개중 강한 존재는 소수이기는 했지만, 어찌 됐든 다수의 힘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언제 쳐들어올지 모른다라……. 정말 가만히 두질 않네.”

[위험 상황이 오면 내가 돕겠다.]

“됐어. 그랬다 폭주하면 어떡하려고.”

[조절할 수 있다.]

“됐다고 말했어.”

단호한 말에, 히론은 혀를 끙 소리를 내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하지만 카리나의 태도는 이해가 되었다.

본래의 몸으로 진화하게 되면 한순간이나마 이지가 사라지니까. 정말 잘못된다면 카리나조차 적으로 인식하고 공격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히론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연합군과 동맹을 맺는다 하였지?]

“맞아.”

[하면 그 뒤에는? 어떻게 할 생각이더냐?]

그러고 보니 그 뒤의 계획을 히론에게 말하지 않았구나. 카리나는 턱을 당기며 입술을 열었다.

“그건…….”

그렇게 말을 이으려 할 때였다.

카리나의 눈에 경악이 스쳐 지나갔다.

“저게 뭐야.”

휘잉!

그녀는 재빠르게 날개를 펼쳤다. 인간들이 오가는 길이라는 건 지금 고려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저,

무너져 있는 저택만이 그녀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건 분명.

아포칼리타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