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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69화 (69/135)

69화

촤악!

빠르게 밀려온 제이슨의 촉수는 르네거의 다리를 휘감았다.

하지만 같은 공격에 두 번 당할 르네거가 아니었다. 그는 힘을 주어 촉수를 잘라 냈다.

쿵.

잘린 촉수의 끝은 꼬물거리며 바닥을 기어 다녔다.

“젠장.”

르네거는 욕을 읊조렸다.

촉수는 잘려 나갔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마치 도마뱀의 꼬리처럼 촉수는 계속해 돋아나고 있었다.

아무리 자르고 잘라도 사라지지 않는다. 몸체를 베어 내기 전까지는.

이런 경우는 검을 사용하는 자신보다 마법을 이용하는 샐러딘의 공격이 더 유용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르네거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빠 르게 저택 쪽으로 몸을 틀었다.

“서, 거기!”

제이슨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르네거는 무시하며 달려 나갔다. 어차피 그가 쫓아올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샐러딘과 합공을 하는 게 더 나을 테다. 더불어 아까의 폭음으로 샐러딘이 걱정되기도 하였고.

저택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무너진 잔해가 확연히 보였다.

사람들은 모두 도망쳤을까. 도망쳤어야 할 텐데…….

르네거는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샐러딘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스스슷!

르네거의 발자취를 따라 촉수가 밀려왔다. 르네거는 그것을 쉼 없이 베어 내며 전진했다.

그리고.

샐러딘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수많은 짐승 뼈에게 둘러싸인 상태의 그를.

언데드를 부릴 수 있는 건 카리나뿐이 아니었던 것인가, 싶었으나 자세히 살펴보니 카리나가 부리는 언데드와는 느낌이 달랐다.

카리나의 언데드는 그녀의 명령을 따르는 존재였다면, 저것들은 이지가 없이 본능만 남아 있는 존재들 같았다.

그들은 마치 샐러딘을 잡아먹을 것처럼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뼈밖에 남지 않아 아무것도 섭취를 할 수 없을 텐데도 불구하고.

샐러딘은 쉼 없이 그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쿵, 쿠웅.

폭발은 연이어 이어졌다. 아까 전 들었던 폭발은 샐러딘이 낸 폭음 같았다.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했던 거도 잠시.

“조심하십시오!”

르네거는 튕기듯 달려 나갔다. 샐러딘의 등 뒤에서 공격하려는 아포칼리타가 보였기 때문이다.

챙!

르네거는 검을 들어 아멜의 팔을 막았다. 그의 손톱이 아슬아슬하게 르네거의 눈가를 스쳤다. 따끔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야이씨, 비켜! 넌 저놈이랑 맞닥뜨리면 안 돼!”

“그게 무슨 말입니까?”

“비키라고!”

퍽!

샐러딘은 르네거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무방비였던 르네거는 그대로 굴러떨어졌다.

“뭐야, 개새끼 주제에 인간을 위하고 있어? 너도 카리나를 닮아 가냐?”

카리나의 이름이 입에 올라오자, 샐러딘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물론 르네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사나운 기운을 거두지 않으며 아멜을 노려보았다.

“좀 닥쳐. 자일의 힘이 없었으면 진즉 내게 뒈졌을 놈이.”

샐러딘은 피가 섞인 침을 뱉으며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아멜은 그런 그를 보며 비스듬하게 조소했다.

“말에 비해서 힘에 부쳐 보이는데?”

말대로, 샐러딘의 두 다리는 후들거리고 있었다. 거듭 폭발을 만들어 낸 터라 일전보다 힘이 약해져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퉤.

샐러딘은 다시 한번 침을 뱉으며 르네거를 올려다보았다.

“야. 눈은 보이냐?”

르네거는 눈을 깜빡여 보았다. 말을 듣고 나니 전보다 앞이 막혀있는 느낌이 들기는 했다.

“살짝 시야가 흐리긴 하네요.”

“저 새끼 독이 독해서 그래. 전투 끝나면 레피오스 님에게 가라. 지금은 저만치 꺼져 있……. 야!”

르네거는 샐러딘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저 그의 발을 노리는 크라켄의 촉수를 잘라 버릴 뿐.

“야이씨, 눈도 안 보이는 새끼가 뭐 하는 거야?”

“안 보인다 해서 못 느끼는 건 아닙니다만.”

비록 흐려진 시야였지만, 기감은 느낄 수 있었다. 본디 전투에서도 기를 느끼며 검을 휘둘렀던 르네거였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는 다시금 밀려오는 촉수는 발로 짓이기며 고개를 들었다.

“지금 제가 없었으면 당신은 발목이 잘려 나갔을 겁니다.”

그건 맞는 말이다. 샐러딘은 코로 숨을 크게 들이켰다. 르네거를 노려본다.

“건방진 놈.”

“압니다.”

피식, 웃던 르네거는 다시금 검을 세게 쥐었다. 그리고 꾸물꾸물 재생산되고 있는 제이슨의 다리를 세로로 찢어 버렸다.

쿠웩!

제이슨은 기이한 소리를 내며 몸을 뒤틀었다. 역시, 잘려 나간 몸이 다시 생산된다 해도 고통은 느끼는 모양이었다.

“제이슨!”

아멜은 재빨리 제이슨에게로 뛰어갔다. 허청거리는 그의 몸을 받치며 눈을 부라린다.

“저런 미친놈들이……!”

이쯤이면 이길 줄 알았다. 혼자 온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자일의 힘까지 사용했으니까.

하지만 저들은 힘에 부쳐 보이기만 할 뿐, 패배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돌아갈 순 없어.

아멜은 입술을 짓씹었다. 제이슨의 허리를 잡아당긴다.

“제이슨. 현신해.”

제이슨의 두 눈이 커졌다.

“하지만. 인간들이. 여기는.”

“언제 그런 걸 따지고 있었다고 그래! 자일한테는 내가 말해! 현신하라고! 지금 당장!”

끄응.

제이슨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아멜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그를 거부하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그는 얌전히 수긍했다.

그는 주저앉아 등을 동그랗게 말았다.

느닷없는 행동이었기에, 샐러딘과 르네거는 동시에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저거 뭐 하는 거야?”

“제게 물으시는 겁니까? 제가 어떻게 압니까.”

“혼잣말이야, 미친놈아.”

이때, 지면이 거세게 흔들렸다.

쿠구궁.

저택의 외벽이 와르르 무너졌다. 이는 지진 같은 것이 아니었다.

제이슨의 몸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집채만큼. 아니, 그보다 더 거대해진 제이슨의 몸이 흔들렸기 때문에 대지가 요동치는 것이었다.

쿠궁!

제이슨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눈과 코와 입에서 검푸른 연기가 흘러나왔다. 연기는 곧 그의 거대해진 몸을 다 뒤덮었다.

그리고.

촤악!

“피해!”

거대한 고목나무처럼 커진 촉수가 르네거와 샐러딘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몸집이 커진 만큼 정확도는 떨어졌기에 르네거와 샐러딘은 가뿐히 그를 피할 수 있었다.

“야, 겨우 저거냐? 몸만 커졌지 하는 짓은 멍청한 그대론데?”

“그렇게 웃는 것도 지금이 마지막일걸?”

아멜은 낄낄거리며 제이슨의 손 위로 올라탔다. 제이슨의 목덜미에 손을 얹는다. 검은 기운이 한층 짙어지기 시작했다. 그 동시에, 제이슨의 팔과 다리에서 촉수 수십 개가 뽑아져 나왔다.

촉수가 닿는 곳곳이 시꺼멓게 물들었다. 아멜의 독을 이어받은 듯했다.

“아, 미친…….”

샐러딘은 경악하며 몸을 날렸다. 그러나 제이슨의 공격이 먼저였다. 날렵하게 날아온 촉수는 샐러딘의 코앞에 다다랐다.

맞는다.

샐러딘은 두 눈을 질끈 감아 내렸다. 하지만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무슨.

샐러딘은 눈을 떴고, 제 눈앞에 서 있는 르네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뒤로 물러서십시오.”

“미친놈아! 이건 아포칼리타의 독이라고! 네가 못 당해!”

인간은 아포칼리타의 독을 이기지 못한다. 성력을 품고 있는 라템의 인간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르네거는 개의치 않았다. 지금은 그저, 저 아포칼리타들을 물 리치는 것에 집중할 뿐.

챙!

르네거는 촉수를 반으로 잘라 냈다. 잘려진 단면에서 검은 독이 울컥울컥 쏟아졌다.

르네거는 몸을 뒤로 틀어 그것을 피했으나, 튀기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치이익.

살이 녹아들었다. 젠장. 르네거는 눈을 찡그리며 자세를 정비했다.

“일단 저 인간 새끼부터 죽이자. 응?”

“하지만. 알아야 된다. 카리나와. 있는 이유.”

“그건 됐어. 어차피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니까.”

아멜의 말을 들은 제이슨은, 이내 르네거에게로 정신을 집중했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샐러딘은 도망치는 데에 익숙하지 않았으니까.

“죽여!”

아멜의 외침을 시작으로, 수십 개의 촉수가 하늘로 치솟았다. 그리고 르네거에게로 쏟아졌다.

저걸 다 막을 수 있을까. 르네거는 자조했지만, 해 보는 데까지 해 봐야만 했다.

그는 날아오는 촉수를 쉼 없이 베어 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목을 노려야 했으니까.

챙, 챙!

그의 검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잘린 촉수가 꿈틀거렸다.

검은 피가 솟구쳤다. 그에 닿은 르네거의 몸은 점점 썩어 들어가고 있었지만, 어차피 이쯤은 괜찮았다.

카리나와의 맹약이 있으니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을 테고 회복도 되리라.

문제는 이게 아니었다.

체력이 자꾸만 떨어지고 있었다. 독에 중독되고 있었기 때문인 듯싶었다. 거기에 눈까지 제대로 보이지 않으니 온전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젠장.

르네거는 코앞에 다가온 촉수를 베어 내며 숨을 몰아쉬었다.

이때였다.

콰앙!

바닥을 내리치고 올라온 촉수가 르네거의 몸을 가격했다.

“큭!”

르네거는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그는 검은 피를 쏟으며 몸을 들썩였다.

“야, 야!”

샐러딘은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르네거에게 닿지는 못했다. 곧이어 날아온 촉수가 그를 후려쳤기 때문이다.

“컥, 야이씨…….”

샐러딘은 얻어맞은 배를 부여잡으며 몸을 웅크렸다. 고통은 거대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

아포칼리타인 자신이 이 정도인데 르네거 놈은 어떨까. 싶어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르네거는 두 다리를 곧추세우고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괴물 같은 새끼…….”

“또 칭찬을 해 주시는군요.”

르네거는 입가에 맺힌 피를 닦으며 대답했다.

사붓 웃고 있는 그였지만, 르네거 역시도 속은 죽을 맛이었다. 움직일 때마다 내장이 뒤틀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는 정신력으로 간신히 버텨 냈다.

“난 못 움직여.”

“압니다.”

“네가 알아서 해.”

“그럴 겁니다.”

한마디도 지지 않지.

샐러딘은 그대로 드러누우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새파란 하늘, 새하얀 구름.

직전에 봤던 풍경과 변함이 없지만, 그러해도 느끼는 것은 달랐다.

더 이상 평화롭지 않아.

아포칼리타 때문에.

……그러는 나도 아포칼리타인걸.

이제는 지겹다.

샐러딘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아니, 눈을 감으려 했다.

하늘에, 작은 점이 있었다.

그 점은 점점 몸집을 키웠다. 마치 이곳으로 날아오는 것처럼.

뭐?

샐러딘은 튕기듯 허리를 일으켰다.

“카리나?”

그는 반색하며 카리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그녀가 왔으니 저들 모두는 죽은 목숨이리라.

샐러딘은 간신히 다리를 세워 몸을 일으켰다. 카리나를 바라본다.

언제나 그렇듯, 카리나의 얼굴은 여유로운 표정을 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녀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특유의 고고함을 잃지 않았으니까. 항상 느긋한 얼굴이었으니까.

그러나 카리나는 표정부터 달랐다.

“정말…….”

그녀의 얼굴에는 넘실거리는 화기가 존재했다. 찢어진 눈 안에는 새까만 분노가 가득했다.

“화가 나네.”

그녀의 눈 안에는 샐러딘과 르네거가 담겨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그들의 모습이.

“얌전히 죽이는 걸로는 모자라겠어.”

카리나는 손을 뻗었다.

쿠구궁!

땅을 파헤치고 나온 언데드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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