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이제 와 말하건대, 카리나는 최근의 나날들이 참으로 소중했다.
저를 기꺼이 반겨 주던 인간들, 가족의 우애를 말하며 옆에 있던 샐러딘과 어린아이 다루듯 저를 다독여 주던 레피오스, 그리고 저를 지키겠노라 매일같이 맹세하는 르네거.
이들 사이에 있다 보니 카리나는 평온했다. 평온했으며 고요했다. 고요했으며 행복했다. 이런 하루라면 어쩌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고. 뭐가 괜찮은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괜찮을 것 같다고. 그렇게 오만한 생각을 품었었다.
그래서 이런 벌이 내려진 걸까.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무너진 저택과 난잡한 잔해의 아래에 깔려 있는 인간들, 나뒹굴고 있는 샐러딘과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르네거.
이렇듯 무자비한 상황은 마치 카리나에게 말을 걸고 있는 듯싶었다.
너는 어차피 아포칼리타란다.
너는 이렇게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악한 존재일 뿐.
그러니,
-우리에게 평화 따위는 없단다. 카리나. 이 아비의 말을 믿어. 아포칼리타는 그 존재만으로도 전쟁을 뜻하는 것.
끝까지.
-싸워야 한단다.
왜.
의문이 치달았다.
왜 싸움이 끝나지 않지.
내가 왜 이렇게 괴로워야 하지.
어째서 조금의 행복도 누릴 수 없는 거지.
왜, 왜, 대체 왜.
[카리나야! 조심하거라!]
히론의 외침이 들려왔다. 카리나는 제게로 날아오는 아멜의 독을 가볍게 피했다.
“넌 여기 있어.”
히론을 수풀 속에 내려 준 카리나는 날개를 활짝 펴며 하늘 높이 비상했다.
지면을 딛고 있는 아포칼리타는 둘.
아멜과 제이슨.
자일의 ‘개’들이지.
지겹다.
모든 것이 다 지겨웠다. 모두를 다 죽여 버리고 자신조차 죽여 없애 버리고만 싶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불가했다.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형제들의 죽음을 이고 사는 존재였으니까.
-우리를 잊지 마.
나는 그들의 복수를 하기 전까지 끊겨서는 안 되는 목숨.
나의 생은 나의 것이 아니다.
카리나는 제이슨과 아멜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마치 실에 걸린 마리오네트처럼, 카리나가 부른 언데드 모두가 한곳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콰앙!
언데드들은 절벽을 기어오르는 산양처럼 제이슨의 거대한 몸에 달라붙었다.
제이슨의 다리가 허청거렸다. 제이슨의 목에 매달려 있던 아멜이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추락했다.
그들의 외침이 들려온다.
폭음과도 비슷한 굉음이 연달아 터졌다. 그들은 안간힘을 다해 언데드를 쓰러뜨리고 목숨을 구제했다.
궁금해졌다.
저들은 왜 저렇게도 간절히 싸우고 있는가?
왜 저렇게도 발악을 하는 거지?
그리 생각하며 아래를 내려다본 순간, 카리나를 볼 수 있었다. 그들의 눈 안에 담겨 있는 삶에 대한 열망을.
아.
살고 싶어서 저러는 것이구나.
아무리 자비 없는 괴물이라 한들 제 목숨은 귀한 줄 아니까.
그렇다면 나는?
나는.
내 목숨도 아닌 것을 억지로 달고 있는 나는.
“……정말.”
어쩌면 저들보다 더한 괴물이 아닐까.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지.”
쿠궁!
카리나의 뒤편으로 새까만 기운이 만개하며 퍼져 나왔다.
죽음의 힘을 품고 있는 기운은 제이슨과 아멜을 향해 날아갔다.
* * *
“야이씨, 정말 우리를 죽이려고 환장했어?”
아멜은 카리나의 공격을 간신히 피하며 외쳤다.
방금 전 제이슨의 몸에서 낙하한 탓에 뼈마디가 욱신거렸다. 하지만 조금도 쉴 수 없었다. 카리나의 공격은 쉴 틈이 없었으니까.
“야!”
아멜의 손에서 독이 뿜어져 나왔다. 분사된 독은 카리나에게로 흩뿌려졌다.
그러나 카리나는 피하지 않았다.
되레 마음껏 그것을 맞을 뿐이다.
살이 녹아내리고 끊긴 머리카락이 우수수 쏟아졌다. 그녀는 짓무른 살을 손등으로 눌렀다.
“이게 끝이니?”
그녀는 피식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카리나의 반쪽 얼굴은 검은 거품이 가득했다. 꿀렁거리는 거품은 그녀의 뭉개진 살을 원래대로 돌려 주었다.
“이 미친 괴물 같은……!”
“왜? 너희도 이 정도는 하잖아.”
아니. 카리나의 말은 틀렸다.
회복 능력이 있는 아포칼리타였지만 카리나 정도는 아니었다.
적어도 자신들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몸을 회복할 시간. 피가 돌게 만들 시간.
하지만 카리나에게는 그런 시간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팔이 잘리면 그 즉시 다시 자라고 머리 반쪽이 날아가도 다시 회복된다.
저런 엄청난 능력은 아버지가 카리나의 몸에 박아 넣은 형제들의 마나핵 덕분이리라.
아멜은 으득 이를 깨물었다.
“형제 열셋을 죽여 놓고 이제 우리까지 없애려 하는 거냐?”
우뚝.
다가오던 카리나의 발이 멈췄다.
그녀는 비스듬하게 턱을 들어 올렸다.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는 공허한 눈으로 아멜을 내려다본다.
“그들을 내가 죽였니?”
“네가 죽인 거야.”
“아니. 아버지가 죽였어.”
“네가 그들과 가까이 지내지만 않았어도 안 죽었어!”
아멜은 어깨를 파르르 떨며 소리쳤다.
“아버지는 항상 말했지. 네가 마음이 여린 것 같다고. 인간만이 가지는 정에 이끌려 사는 것 같다고. 그래서 그들이 죽은 거야! 널 정신 차리게 만들기 위해서 !”
카리나의 손이 반발하듯 쥐어졌다. 하지만 힘은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카리나는 여전한 시선으로 아멜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죽은 게 왜 내 탓이냐는 거야.”
“뭐?”
“그들을 죽여야겠다 생각한 건 아버지고, 죽인 것도 아버지야. 왜 그 모든 게 내 탓이라고 생각해?”
“너만 없었다면 그들은!”
“내가 없었다면 다른 이들이 죽었겠지. 그게 네가 되었을 수도 있고.”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어떠한 생각도 짐작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아멜의 눈가가 부르르 떨렸다.
그는 흙바닥을 긁으며 주먹을 쥐었다.
“너는…… 너는 정말.”
하고 싶은 말이야 많지만 뱉을 수 없다. 혀를 더듬던 말은 이내 숨과 함께 흘러나와 풍화되었다. 사라져 버렸다.
카리나는 그런 아멜에게로 다시금 다가갔다.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자일이 보냈니?”
하.
아멜은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그랬다면 어쩔 건데?”
“어쩔까.”
주저앉아 있는 아멜의 앞에 선 카리나는 허리를 반쯤 숙였다. 아멜의 연갈색 눈을 바라본다.
“일단 네 손가락을 하나씩 잘라 줄까. 다리를 부러뜨려 줄까. 그도 아니면 라템의 피를 먹여 몸이 녹게 만들어 줄까.”
끔찍한 말이건만, 카리나의 표정은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텅 빈 눈동자로 아멜을 응시했다.
“어떻게 할까.”
딱. 딱.
어디에서 나는 소리인지 몰라 두리번거리던 아멜은, 그 소리가 자신의 입에서 나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턱이 떨리고 있었다. 어찌나 발발 떨리는지 이가 부딪히고 있었다.
공포.
이제껏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그의 전신을 지배했다.
턱이 떨렸다. 아니, 몸 전체가 떨렸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크나큰 떨림이 그를 지배했다.
카리나는 그런 아멜을 향해 손을 뻗었다. 새까만 기운이 그녀의 손바닥 안에 들이찼다.
우웅, 웅.
진동이 울리며 검은 기운이 동그랗게 뭉쳐졌다.
저걸 맞으면 죽는다.
하지만 도망칠 수 없었다.
압도적인 무력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으므로.
이때였다.
“우어어어!”
콰광!
카리나의 몸이 날아갔다. 언데드의 주술에서 풀린 제이슨이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그만. 죽는다, 아멘. 안 되는 것.”
제이슨은 아멜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그의 눈은 반쯤 감겨 있었다. 이마에서부터 흐르는 피가 그의 눈꺼풀을 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뚝, 뚜욱.
턱을 따라 흐르는 핏방울은 새빨갛기 그지없다. 아멜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잘못했다. 우리가. 돌아갈 것. 이제 그만.”
“제이슨.”
카리나는 허청거리던 두 다리에 힘을 주며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입가에 묻은 피를 손바닥으로 닦아 낸다.
“난 네 멍청한 대가리를 동정해. 그러니까.”
그녀는 제이슨을 향해 달려들었다.
“크헉!”
“제이슨!”
제이슨은 두 다리를 감싸며 뒹굴었다. 카리나는 동요 없이 그의 고통을 지켜보았다.
“조잡한 괴물 새끼답게 얌전히 처박혀 있어.”
고통에 찬 고함을 내지르는 제이슨을 뒤로 하고, 카리나는 아멜에게로 다시 다가갔다.
으으.
아멜은 몸을 바르르 떨며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도망칠 곳은 마땅치 않았다.
“자일이 뭐라 했니?”
카리나는 피가 묻어 더욱 붉어진 입술을 비틀며 말했다.
“뭐라 하며 날 찾아오라 했니?”
그녀의 눈은 정말 뱀의 것과 같았다. 끔찍한 독을 품고 있는 독사의 것. 죽음과도 밀접하다.
“내 목숨을 끊고 싶다니? 내 피를 받아 가고 싶다니? 내 생을 저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니? 대체 뭐라 했기에.”
카리나는 숨을 들이켰다.
“이런 상황을 만들어. 왜.”
아주 찰나에, 그녀의 표정이 무너졌다. 흐느껴 울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울지 않았다.
카리나니까. 카리나 아포칼리타는 단 한 번도 슬퍼한 적이 없었으니까.
“이런 상황은 네가 만들어 낸 거잖아.”
그 대신에 아멜이 눈물을 흘렸다. 주르륵 쏟아지는 눈물은 막을 수가 없었다.
슬픈 것인가?
아니. 분노한 것이다.
화가 나는 것인가?
아니. 슬픈 것이다.
명료하게 떨어지지 않는 마음은 그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다. 얼굴이 부풀어 올랐다. 아멜은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쏟아 냈다.
“네가 아버지를 죽이지만 않았어도! 네가 자일의 마음을 받아 주기만 했었어도! 이런 일은 없잖아!”
아멜은 악을 지르며 소리쳤다.
“자일은 너를 사랑해!”
카리나의 눈이 흔들렸다. 하지만 아멜은 그 흔들림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너와 함께 있고 싶다고 했어. 너를 곁에 두고 싶다고. 자일뿐일까? 아버지도 너를 사랑해. 널, 널 얼마나 아꼈는데. 아니, 아버지뿐만이 아니야. 탑의 모든 형제들이 너를 좋아했어. 널 존경하고 널 따랐어. 그런데 네가 어떻게 우리에게!”
아멜은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차오른 울음이 와락 쏟아졌기 때문이다. 그는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 냈다.
카리나는 그런 아멜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사랑, 사랑.
여기서도 그 엿 같은 사랑 타령이다.
그게 대체 뭐라고. 그런 알량한 감정 따위 내게 무슨 상관이나 있다고.
“정말 구역질이 나와.”
카리나는 무자비한 음성으로 말을 뱉었다.
“죽어. 짜증 나니까.”
손을 뻗는다. 새까만 구체가 그녀의 손끝에 머물렀다. 이것은 곧이어 아멜에게 날아가 그의 몸을 폭파시키리라. 카리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크흑!”
아멜의 몸이, 천천히 허물어졌다.
아멜의 가슴을 뚫고 나온 검의 끝이 보였다. 새까만 검. 저건 분명.
“르네거.”
아멜의 쓰러진 몸 뒤로, 르네거의 모습이 보였다. 카리나는 그런 그를 표정 없이 주시했다.
“내가 끼어들라 허락하지 않았을 텐데.”
카리나는 아직 손에 맺힌 힘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손가락을 까딱하면 이 힘이 르네거에게 나아가 그를 죽이리라.
이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르네거는 개의치 않았다. 카리나와 마주하며 천천히 입을 연다.
“당신이.”
르네거는 쓰러진 아멜을 넘어 카리나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슬퍼하고 있어서.”
그는 카리나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저자를 정말 죽이게 되면 더 슬퍼할 것 같아서.”
그리고 카리나의 뺨을 쓰다듬었다. 핏자국이 얼룩진 얼굴을, 건조하기만 한 살갗을 어루만진다.
“그래서 제가 했습니다.”
체온이 따뜻했다.
그리고 다정했다.
그렇기에 서글펐다.
카리나는 웃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꺽꺽거리는 웃음이 연이어 흘러나왔다.
정말, 웃긴 일이다.
그리고 슬픈 일이야.
카리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피곤했다. 모든 것이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