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72화 (72/135)

72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서 있다.

앞도, 뒤도, 그 어느 곳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어둠뿐.

이곳은 어디인가?

나의 무의식이다.

왜 이곳에 들어왔는가?

이성을 놓아 버렸기 때문이다.

왜 그러했는가?

르네거와 샐러딘이 다쳐서. 인간들이 죽어 버려서.

그들의 피해가 네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 슬픔? 분노? 좌절? 왜 그러한 감정을 느꼈는가?

모른다.

왜 슬퍼했는가?

모른다.

왜 분노했는가? 왜 좌절했는가?

……나는.

몰라. 아무것도 몰라.

아니. 너는 알고 있어야 해. 왜 슬퍼했는가? 왜 분노했는가? 왜 좌절했는가?

나는.

카리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마치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린 것 같았던 감정들이 모이고 모여 그녀에게 흘러들었다.

그녀는 버석해진 얼굴을 감싸 안으며 몸을 웅크렸다.

건조한 낙엽처럼 나뒹굴던 마음이 못내 축축해졌다. 그러나 오래 가지 못했다.

-우리를 잊지 마.

형제들이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이 불씨가 되었다.

어둠 한가운데에 떨어진 불꽃은 이내 모든 것을 삼켜 버릴 것처럼 몸집을 키우며 열기를 뿜어냈다.

폭발하는 화산의 아래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위는 불꽃이 튀고 있고, 아래는 용암이 흐른다. 흐르고 흘러 다가온 새빨간 용암은 그녀의 두 발을 붙들었다.

저 용암 속에 떨어져 버린 형제들을 기억한다. 아주 작은 마나핵 한 개만을 남기고 세상에서 지워져 버린 형제들을, 기억하고 있다.

-우리를 잊지 마.

카리나는 멍하니 불길을 응시했다.

무의식중에도 튀어나오는 과거의 파편들이다. 수십 년을 함께한 기억들이다. 그래서 나는.

뭘 더 해야 하는 걸까.

내가 뭘 더.

카리나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가슴을 퍽퍽 내리쳤다. 뜨겁게 차오른 마음은 막을 새 없이 쏟아졌다.

너희를 위해서 나를 포기했어. 살아가는 걸 포기하고 죽어 가는 걸 선택했어. 너희를 잊지 않기 위해서. 너희의 마지막 말을 들어주기 위해서 나는!

-우리를.

잊지 않아. 잊지 못해.

잊지 않으려고 이렇게 발버둥을 치고 있는 나를 생각해 주면 안 되니. 이제 그만 나를 놓아줄 수는 없니.

아버지를 죽였어.

나를 지독하게 괴롭히고 너희를 죽이게 한, 그러나 나를 존재하게 만들어 준, 어쩌면 나를 사랑한지도 모르는 아버지를 죽였어.

형제를 죽이려 했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실험체일지언정 함께 나고 자란 형제를 죽이려 했어. 그의 목을 잘라 버리려 했어.

이런데도 부족한 거니?

내가 여기서 뭘 더 해야 하니. 말을 좀 해 봐. 내가 뭘 더 해야 너희를.

-잊지 마.

잊지 말라 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니.

나의 기억은 모두 다 너희의 것이 되는 거니. 켜켜이 쌓이는 새로운 추억들은 아무 상관이 없는 거니. 나는 일평생 과거에 묶여 살아야 하는 거니.

사실 나는.

더 많은 걸 기억하고 싶어.

르네거의 애정 어린 입맞춤을, 히론과 샐러딘의 목적 없는 포옹을, 레피오스의 토닥임을, 인간의 친절을, 그들과 나누었던 대화를, 바람에 흘러가 버린 웃음을, 기약 없는 약속을, 모두 다.

기억하고 싶어.

그러니까 나는.

왜 슬퍼했는가? 왜 분노했는가? 왜 좌절했는가?

나는.

왜?

나는 그들을.

왜?

사랑해서.

나는 그들을 사랑해서.

콰앙!

불길이 치솟았다.

치솟은 불은 사방을 막고 있던 어둠을 산산조각 깨뜨렸다. 어둠 너머로 명멸하는 빛이 눈꺼풀을 찔렀다.

그리고 보게 되었다.

사랑하는, 이들을.

* * *

“카리나!”

[카리나야!]

카리나가 눈을 뜨자마자 보게 된 건 샐러딘과 히론의 얼굴이었다.

샐러딘은 얼굴 절반을 붕대로 감싸고 있었고, 히론 역시 폭발에 휘말렸던 양 몸 곳곳에 생채기가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상처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처럼,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카리나를 살폈다.

“쓰러진 걸 내가 본 것만 해도 벌써 두 번째야. 거기다 이번에는 일주일이나 누워 있었고! 이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

[분명 레피오스가 말하지 않았느냐? 아무리 나아졌다 한들 쉬어야 한다고! 너는 대체 왜 말을 듣지 않는 것이냐! 이까짓 놈들은 죽어도 상관없다! 네 몸부터 생각해!]

움찔.

카리나의 손끝이 달싹였다. 하지만 아무도 그 움직임을 보지 못했다.

“맞아.”

샐러딘은 침대에 걸터앉아 카리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카리나가 더 소중하니까.”

깜빡, 깜빡.

카리나는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이런 상황은 네가 만들어 낸 거잖아.

-네가 아버지를 죽이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잖아!

아멜은 그렇게 말했다.

너만 탑을 도망치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네가 얌전히 아버지의 말만 따랐어도 이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카리나는 일정 부분 그 말에 동의했다.

애초에 이 모든 건 내가 인간인 채 이곳에 태어났기 때문, 내가 도망치려 했기 때문. 그래서 소중한 이들이 다치고 죽게 되었다.

그러니 내 탓을 해도 받아들일 수 있는데.

“아픈 데가 있는 건 아니지? 레피오스 님이 와 계시니까 치료를 받아.”

[그래. 내가 가서 끌고 왔다.]

이들은 왜 이렇게도 나를 아껴 주는 것인지.

“……하.”

카리나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마치 숨소리처럼 작았던 웃음은 점점 커져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카리나?”

[……정신을 놓아 버린 건가.]

그들은 걱정스러움을 더 만연히 띠며 카리나를 바라보았다. 카리나는 웃음을 그대로 입가에 머금으며 그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바보 같아.

그래. 정말 저들은 바보 같았다.

내가 해 준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이렇게 나를 아껴 준다. 나를 버리지 않는다. 내 곁에 있는다.

‘……아니.’

정말 바보 같은 건 내가 아닐까.

-그들이 제게 주는 행복보다, 겪은 고통의 양이 더 커요.

-전 견딜 수 없어요. 그만하고 싶어요.

이런 그들을 뒤로하고 죽어 버리려 했다. 목숨을 끊으려 했다.

나의 고통을 이들에게 내버리고 도망치려 했던 게 아니던가.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자책이 마음을 뒤덮었다.

바보 같은 건 나라고, 눈앞의 것을 보지 않고 과거에 매달려 있던 등신이 바로 나라고.

카리나는 불현듯 손을 뻗었다. 그리고 기대앉아 있는 샐러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몸은 어떠니.”

샐러딘은 커다란 눈을 수차례 깜빡였다.

별것 아닌 말이었지만, 그렇기에 놀라웠다. 카리나는 이제껏 자신에게 염려 섞인 말을 해 준 적이 없었으니까.

샐러딘은 잔뜩 부풀어진 마음을 하며 고개를 세게 내저었다.

“난 괜찮아. 어차피 이런 상처들도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테니까.”

“그래도 아팠을 텐데.”

“……지금 카리나가 더 아픈 거 아니야?”

샐러딘은 카리나의 행동에 의문을 품으며 슬그머니 눈을 올렸다.

카리나는 피식 웃으며 그의 머리를 한 번 헝클어 주었다. 히론을 바라본다.

“너는 왜 다친 거야?”

흥.

히론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

[누가 멋대로 지진을 일으켜서 말이다.]

“피했어야지.”

[네 공격을 피할 재주가 있었다면 애초에 봉인도 당하지 않았을 테지.]

“그건 그래.”

카리나는 피식 웃으며 히론의 목덜미를 긁었다.

언제 무자비한 전투가 일어났냐는 듯, 다시금 평온한 분위기가 찾아왔다. 이는 일전보다 훨씬 더 고요하고 안온한 기운이었다.

어쩌면 내 마음의 변화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카리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두 손을 맞잡았다.

“그건 그렇고.”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긴 어디야?”

그녀가 머물던 방과는 확실히 다른 공간이었다. 훨씬 더 좁고, 낡은 건물.

샐러딘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별관이야. 본관은 다 무너지고 여기만 남았다. 그래서 살아남은 인간들이 이곳에 모여 있는 중.”

[인간 냄새가 짜증 난다. 내가 왜 이렇게 인간들과 붙어 있어야 하는 건지.]

그들의 말을 귀담아들으며, 카리나는 고개를 주억였다. 그리고 계속해 품고 있던 의문을 내비쳤다.

“아멜과 제이슨은?”

순간, 샐러딘과 히론의 얼굴이 바싹 굳었다.

“죽었니?”

샐러딘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히론은 반쯤 몸을 돌려 카리나를 외면하고 있다.

아멜에 이어 제이슨까지 죽어 버렸다니. 카리나는 쓰게 웃었다.

“샐러딘. 네가 제이슨을 죽였어?”

샐러딘의 눈이 커졌다. 그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르네거가.”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던 손을 꽉 바르쥔다.

“그놈이 죽였어. 대신.”

그랬구나. 카리나는 시선을 떨어뜨리며 읊조렸다.

르네거가 아멜을 죽인 건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아멜의 마나핵을 박살 내며, 그는 무어라 했던가.

-당신이 슬퍼하고 있어서.

-그리고 저자를 정말 죽이게 되면 더 슬퍼할 것 같아서.

-그래서 제가 했습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만약 내 손으로 아멜을 죽였다면, 나는 지금보다 더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으리라. 어쩌면 이렇게 평소와 같은 대화를 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고.

르네거가 대신 해 준 덕분이다. 그래. 덕분…….

르네거를 봐야 했다. 카리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제야 이상함을 깨달았다.

“르네거는?”

원래라면 가장 먼저 달려올 이가 르네거였을 테다. 하지만 방 안에는 그가 없다.

카리나는 사붓 눈매를 굳혔다. 샐러딘과 히론의 우물쭈물한 태도가 보였다.

“뭐야. 말해.”

서로의 눈치를 보며 입술을 씰룩이던 그들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툭 떨어뜨리며 대답했다.

“상태가 많이 안 좋아서, 레피오스 님이 진찰을 보고 있어.”

[가 보지 말거라. 어차피 두면 나을 놈이니까.]

카리나는 곧장 몸을 일으켰다. 느닷없이 일어난 탓에 다리가 허청거렸지만, 개의치 않는다. 앞으로 나아간다.

“잠깐, 잠깐!”

[몸을 생각하거라! 함부로 움직이면 안 돼!]

샐러딘의 말대로, 자신이 일주일이나 누워 있었다면 르네거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주일이나 지났음에도 일어나지 못한 것이라면…….

‘심각한 상태일 수도.’

쿵, 쿵.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피 칠갑을 하고 있던 르네거의 모습이 떠오른다.

기억 속의 그는 타인의 피를 묻히고 있지만, 상상 속의 그는 자신의 피를 묻히고 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숨이 가팔라졌다.

“비켜.”

“카리나, 제발.”

[갑자기 움직이면……!]

“비키라고 했잖아.”

카리나는 샐러딘의 어깨를 붙잡았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은 그대로 미끄러져 떨어졌다.

“난.”

카리나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그를 더 이상 밀어낼 수 없다는 걸.

“르네거가 죽는 걸 원하지 않아.”

카리나는 곧장 방을 빠져나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