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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73화 (73/135)

73화

모두를 뿌리치고 복도로 뛰어나간 카리나는 정신을 집중했다.

르네거와 자신은 피의 맹약으로 엮여 있는 관계. 조금만 집중을 하면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

‘왼쪽.’

그녀는 곧장 몸을 틀었다.

넓지 않은 별관이었기에 복도에는 인간들이 꽉 차 있었지만, 카리나는 그들 사이를 헤치며 빠르게 걸어 나갔다.

르네거의 흔적이 느껴지는 곳은 3층 복도 끝에 위치한 방이었다.

그쪽은 다행히도 사람들이 없었다. 걸음이 더 빨라진다.

생각한다. 르네거를.

처음에는 귀찮기만 한 인간이었다.

어쩔 수 없이 떠맡게 된 인간. 여주인공에게 죽지 않으려고 끌어안은 인간.

거기에 맹약까지 걸려 버리니 얄미워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런 생각이 사라졌다.

성검의 힘을 모조리 흡수했던 때부터였던가. 그때부터 바로 서게 된 르네거는 굳건히 카리나의 옆을 지켰다. 자일과의 전투에서도, 페넬로피와의 다툼에서도, 모두 다.

그런 그를 외면했었다. 그의 도움을 받되 마음은 받지 않겠노라 다짐했었다.

왜?

나는…….

-어쩌면 사랑이라는 건 불행 앞에 서면 작아지는 걸지도 몰라.

앞으로의 길은 끝없는 불행의 연속일 텐데, 그 과정에서 그의 마음이 사그라지는 걸 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행동이 바뀌고 눈빛이 변하는 걸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어쩌면 히론의 말대로,

-두려운 것이냐?

겁을 먹고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르네거가 변할까 봐. 그가 저버린 신처럼, 나조차도 저버릴까 봐.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자일, 페넬로피, 라템, 아포칼리타. 숱한 불행에도 그는 꿋꿋이 옆을 지켰다. 슬픔을 막아 주고 기쁨을 더해 주며 손을 붙들었다.

이런 그를,

내가 어떻게,

밀어낼 수 있을까.

“후우.”

문 앞에 다다른 카리나는 가팔라진 숨을 몰아쉬었다.

샐러딘과 히론의 말대로 갑자기 움직인 몸은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으나, 이 정도는 참을 만했다.

문고리를 잡았다. 하지만 문이 열리는 게 먼저였다.

“카리나?”

문을 열고 나온 건 레피오스였다.

아, 그러고 보니 레피오스 님이 르네거를 치료하고 있다 하였지. 카리나는 당황을 애써 지우며 레피오스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돌아다니면 안 된단다. 아직 네 몸은 정상이 아니야. 상처가 다 터져서는……. 어서 돌아가자꾸나. 치료를 해야지.”

“잠시만요. 르네거를 봐야 할 것 같아서요.”

“이제 막 잠에 들었는데?”

“보기만 할게요.”

레피오스는 잠시 침묵하며 카리나를 응시했다.

그러다 불현듯 미소를 머금는다. 둥그런 웃음이 그의 입가에 자리 잡았다.

저 웃음을 알고 있다.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미소.

카리나는 순간적으로 손을 움켜쥐었다.

“알고 계셨죠?”

그녀는 저를 지나쳐 가려는 레피오스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아포칼리타가 공격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죠?”

레피오스는 조금씩 고개를 돌렸다. 카리나를 바라본다.

“왜 알려 주지 않으셨나요?”

그의 입술에 걸려 있는 웃음이 한층 짙어졌다.

얼핏 보면 다정함처럼 보이나, 얼핏 보면 오만함처럼 보이는 웃음. 카리나는 그 곡선을 가만히 관찰했다.

“예지란 건 말이다.”

그는 여전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한편으로 축복일 수 있으나, 다른 한편으론 독과 같은 것이란다.”

“…….”

“앞날을 알게 되면 그 과정에서 깨달을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놓쳐 버리지.”

레피오스는 몸을 완전히 돌렸다. 카리나와 마주 선다.

“덕분에 많은 것을 알게 되지 않았느냐?”

카리나는 쥐었던 손에 바싹 힘을 주었다.

덕분, 이라니.

그 덕분에 샐러딘과 히론과 르네거가 다쳤다.

그 덕분에 형제 두 명이 죽었다. 그 덕분에 인간들이 죽었다.

한데 어찌 덕분, 이라 할 수 있는가.

입술이 바싹 말랐다. 마른침이 성겨 붙어 입안을 텁텁하게 만들었다.

“만약에.”

그녀는 레피오스의 두 눈을 주시하며 말했다.

“이들이 모두 죽는 미래를 보셨다 해도, 제게 알려 주지 않았을 건가요?”

레피오스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하얗고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우수수 쏟아졌다. 그의 깊은 주름에 몇 가닥의 머리칼이 붙는다. 레피오스는 손을 들어 가볍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 그는 뒤를 돌아 걸어갔다.

대답은 없었다. 아니, 어쩌면 대답은 이미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 그는 내게 미래에 대한 어떤 것도 알려 주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에 대해 말하던 레피오스가 떠올랐다.

-카오스는 필요악이란다.

그렇다면 레피오스는,

진정한 선인가?

해갈되지 않는 의문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 * *

아프다.

르네거는 힘겨운 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여기가 어디지, 살아 있나, 꽉 감긴 어둠 속에서 생각한다.

멀어졌던 정신이 돌아오자, 육체는 곧장 고통을 호소했다.

짓이겨진 살과 부러진 다리, 아린 피부와 끼익거리는 소리가 나는 귀까지.

모든 것이 고통스러웠으나 개중 가장 힘이 드는 것은 지독한 갈증이었다.

물을 마시고 싶다.

하지만 눈꺼풀이 뜨거운 탓에 눈도 뜰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고 싶은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생각해야 했다.

여기는 어디지. 나는 왜 쓰러져 있는 걸까.

아.

아포칼리타들과 싸웠다.

그들 두 명을 내 손으로 죽였고, 독에 의한 후유증으로 쓰러져 버렸다.

그렇다면 카리나는?

카리나는 정신을 차렸을까. 다친 곳은 없을까. 괜찮은 걸까.

팔에 힘을 주어 본다. 그러나 팔은커녕 손가락조차 움직일 수가 없다.

이대로 누군가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가. 르네거는 한숨을 뱉으며 생각했다.

이때였다.

치이익, 거리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타는 듯한 냄새가 풍겨졌다. 팔뚝에서 홧홧한 기운이 느껴졌다.

“아파도 참아.”

카리나의 목소리였다. 번뜩 눈을 뜨려 했으나, 허사였다. 그는 미간을 깊게 좁히며 팔에 힘을 주었다.

“힘 풀어. 내 피로 정화하고 있는 거니까.”

피? 그녀가 자신의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인가. 르네거의 팔뚝이 움찔거렸다.

“쉬. 가만히 있으래도.”

카리나는 그런 르네거의 팔을 토닥이며 말했다.

그리고 길어진 손톱으로 자신의 손바닥 중앙을 갈랐다.

주륵 피가 흘렀다. 카리나는 동요 없이 손바닥으로 르네거의 눈가를 지그시 눌렀다.

르네거는 또다시 통증을 느꼈다.

하지만 일전처럼 타는 듯한 느낌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약한, 그러니까 따뜻하고 부드러운.

얼마나 지났을까. 젖은 수건의 감촉이 느껴졌다. 르네거는 그제야 눈을 올려 뜰 수 있게 되었다.

깜빡, 깜빡.

그는 흐린 초점을 맞추며 카리나를 찾았다.

“잘 보이니?”

불쑥 나타난 카리나의 얼굴은 양호해 보였다. 다친 곳은 크게 보이지 않는다.

다행이다. 르네거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시간이 지나면……. 쿨럭.”

르네거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목이 너무 아파 소리가 제대로 흘러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목이 마르겠구나.”

카리나는 물 잔을 들었다. 하지만 르네거는 몸을 일으킬 수 없는 상태였다.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카리나는, 이내 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그리고 그에게 입을 맞췄다.

벌려진 입술 너머로 차가운 물이 넘어온다. 얽히는 숨의 온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라서, 르네거는 그대로 굳어 버린 채 그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르네거는 멀어지는 그녀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 부족하니?”

“네. 매우.”

그는 곧장 대답했다. 카리나는 한쪽 눈을 찡그리며 기댔던 몸을 일으켰다.

“거짓말하지 마.”

“들켰군요.”

“그래.”

르네거는 헛헛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좋네요, 이런 것.”

“좋기는 뭐가 좋니.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못하고 누워 있는 주제에.”

“당신이 간호해 주지 않습니까.”

“두 번은 없어.”

“두 번이나 이렇게 다칠 일은 없을 겁니다.”

사실, 그가 이렇게 다친 이유는 전적으로 샐러딘 때문이었다.

그에게 향하던 공격을 막기 위해 몸을 내던진 게 두어 번은 되던가.

그때에 맞은 아포칼리타의 독 때문에 몸이 이 지경이 된 것이리라. 르네거는 그렇게 생각했다.

“너는.”

카리나의 말이었다. 그녀는 누워 있는 르네거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잖아.”

시야가 또렷하지 않아, 카리나의 얼굴이 흐리게 보였다.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어떤 눈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명확한 건 귀에 꽂히는 목소리뿐.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숨을 씹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허물어지듯 거친 한숨이 쏟아졌다.

“그러면 싸우지 말고 사람들을 피신시키거나 숨어 있었어야지. 어차피 내가 오면 다 끝날 일이었을 텐데 뭣 하러 구태여.”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할 말을 입속에서 고르는 듯싶었다.

마음을 더듬고, 더듬어서. 내뱉어야 할 말을 골라 본다.

“싸워서 이렇게 다쳐 버리니.”

그녀의 말끝에는 축축한 숨이 묻어 있었다.

울고 있는 것인가. 아니, 그렇게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슬퍼하고 있었다.

르네거는 불현듯 손을 뻗었다. 카리나의 손목을 붙잡는다.

“제가 다친 게 싫습니까?”

그는 그녀의 손목에서부터 팔까지 손을 올렸다. 차가운 체온을 뜨겁게 물들인다.

“대답해 주십시오. 제가 다친 게 싫습니까?”

그의 눈은 흐리기 짝이 없었으나 머금고 있는 빛만큼은 명료했다. 그렇기에 카리나는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저토록 깨끗한 바다 앞에서 내가 감히,

“……그래.”

거짓을 말할 수 없었다.

“네가 다치는 게 싫어.”

카리나의 팔을 붙들고 있던 르네거의 손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는 널브러진 손을 거둘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카리나를 바라보았다.

“아.”

그리고, 입술이 올라간다.

환하게 벌어지는 입은 그 어느 때보다 환했으며, 그렇기에 새맑았다.

“기쁘네요.”

그 웃음은 기쁨이었다. 완연한 행복이 묻어나는 얼굴은 조금의 빈틈도 없었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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