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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74화 (74/135)

74화

카리나의 피가 독을 정화시켜 준 덕분에 르네거는 어느 정도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온전히 자유롭지는 못했기에, 침대 헤더에 간신히 몸을 기대고 있었다.

힐끗.

카리나는 르네거를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그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지우지 않고 있었다. 저렇게 웃으면 턱이 당기지 않으려나. 카리나는 괜히 멋쩍어져 짧게 혀를 찼다.

“그만 좀 웃어.”

르네거는 더 크게 웃었다. 고개를 기울인다. 반쯤 접혀 고운 곡선을 그리고 있는 눈매는 아름답기 짝이 없었다.

“제가 어떻게 그만 웃을 수 있습니까. 당신이 저를 걱정한다는 말을 들었는데요.”

“걱정이 아니라 네가 다치는 게 싫다는 거였어.”

“그게 그 뜻이지요.”

재차 웃는 그의 모습을 보며, 카리나는 휙 고개를 돌렸다. 왜인지 낯간지러움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왜 피하십니까. 저를 계속 봐 주세요.”

“싫어.”

“일주일 만에 보는 얼굴인데, 못 본 만큼 봐야지 않겠습니까.”

르네거는 손을 뻗어 카리나의 뒷목을 간지럽혔다.

으, 카리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몸을 기울였다. 그의 어깨에 기댄다.

고개를 뒤로 젖혀 그를 바라본다. 새하얀 얼굴을, 강인한 턱을, 높은 코를, 싸늘해 보이지만 다정함이 듬뿍 담겨 있는 눈을.

“좋니?”

느닷없이 나온 질문이었다. 무엇이 좋냐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좋습니다.”

르네거는 대답했다. 좋았으니까. 지금의 이 상황이 그 무엇보다 좋았으니까.

“왜?”

“당신을 좋아하니까요.”

“그러니까 왜?”

르네거는 잠시 멍해졌다.

그저 그녀가 좋기 때문에 좋다고 말을 하는 것인데 이유를 묻는다면,

“……좋아서요?”

달리 할 말이 없지 않은가. 애초에 좋음이라는 것은 이유가 없는 감정이었으니까.

카리나는 그런 르네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기댔던 몸을 떼어 냈다. 그리고 몸을 돌려 르네거와 마주 앉았다.

“혹시 말이야.”

카리나는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나와 아멜의 대화를 들었니?”

그들이 싸울 때의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르네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멀리 있어 듣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때에 고막이 터져 귀가 잘 들리지 않았기 때문도 있지만 그는 구태여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녀에게 시름을 얹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르네거의 말을 믿는 듯, 카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멜에게…….”

그녀는 잠시 말끝을 흐렸다.

이미 죽어 버린 아멜과의 대화를 떠올리는 게 꽤나 고통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할 수만은 없었다.

후우.

숨을 길게 들이쉬며 말을 시작한다.

“왜 나를 데리고 가려 하냐고 물었어. 이미 나는 아포칼리타를 나와 있는데, 대체 왜 나를 쫓고 있는 거냐고. 자일은 대체 왜 그러고 너희는 왜 그런 명령을 따르는 거냐고. 그러니까.”

카리나는 침대보를 움켜쥐었다.

“나를 사랑한대.”

시선을 떨어뜨린다. 감정을 품은 눈이 내려가 버렸으므로, 르네거는 그녀의 마음을 짐작하지 못하고 더듬어 볼 뿐이었다.

“자일도 나를 사랑하고, 아버지도 나를 사랑한대. 형제들도 나를 사랑했던 것 같대. 그래서 내가. 도망치는 내가 너무 원망스럽다고 하는데.”

카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르네거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턱을 잡아당겼다.

“……피가 납니다.”

“알아.”

르네거는 그녀의 입술에 묻은 피를 손으로 닦아 주었다. 그러며 관찰한다. 카리나의 얼굴 전체를 잠식하고 있는 감정의 흐름을.

“그래서 생각해 봤어. 그들은 정말 나를 사랑한 걸까? 사랑하기 때문에 나를 원하는 걸까?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뭘. 아니,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카리나.”

명료하지 않은 말처럼, 그녀의 얼굴 역시도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쏟아지는 바람에 몸을 뉘고 흔들리는 갈대처럼, 그녀는 거듭해 요동치고 있었다.

“그들이 정말 당신을 사랑한 것 같습니까?”

질문에, 카리나는 멍하니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러했나.

정말 아버지는 나를 사랑했나. 자일은 나를 사랑했나. 형제들은 나를 사랑했나.

잘 모르겠다. 그들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건 어쩌면 소유욕의 개념이 아니었을까 싶을 뿐. 그러니 지금도 내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것이지 않겠는가.

“잘 모르겠어.”

“그럼 저는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습니까?”

턱을 잡은 르네거의 손에 다소 힘이 들어갔다. 카리나는 눈을 천천히 들어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르네거는 나를 사랑하나.

사랑하고 있나. 그토록 깊은 감정을 저도 함께 느끼고 있는 걸까.

머리가 지끈거렸다. 정신이 혼잡했다.

스스로도 사랑이라는 게 무엇인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누군가의 감정을 재단하는 건 어렵기 짝이 없는 일이었으므로.

“네가 나를 좋아한다는 건 알아.”

“그건.”

르네거는 사붓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다 후우 숨을 터뜨리며 손을 놓는다. 찌푸려진 미간에 깊은 시름이 얹어졌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고, 사랑을 느끼는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겠고,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과거 제게 사랑이라는 건 신을 향한 성애밖에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저는……. 애초에 내 안에 그런 감정이 존재하기는 하나, 타인을 사랑할 수나 있을까, 답이 없는 질문을 거듭해 던지곤 했습니다.”

카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하고 있는 고민은 자신과 같은 것이었으니까.

“그런 의문이 지금도 여전합니다만……. 하지만 저는 그저.”

그는 카리나의 손등 위에 손을 얹었다.

“당신과 함께 있고 싶습니다.”

그는 카리나의 손을 꽉 맞잡았다. 깍지를 끼며 그녀를 붙든다.

“그리고 기억을 쌓고 싶습니다. 좋은 기억들을. 설사 나쁜 기억이 있더라도 그걸 흐려지게 할 만큼의 좋고 행복한 기억들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기억을 추억으로 바꿔 당신과 제 사이의 다리를 놓고 싶습니다.”

식지 않는 열기가 전달돼 왔다. 카리나는 그 이어진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손이었지.

나는 그에게 손을 뻗었고, 그는 내 손을 잡았고, 맞잡은 손에서부터 맹약이 이어졌고, 그리고 지금도 붙잡고 있다.

떨어지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런 게 사랑입니까? 제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게 사랑입니까?”

카리나는 손에 두었던 시선을 천천히 올렸다. 르네거를 바라본다. 그의 깊고 그늘진 눈을, 푸르른 눈동자를.

그가 한 말은 카리나의 마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기억하고 싶었으며, 간직하고 싶었다. 과거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미래에 대해 기대를 품고 싶었다. 혼자의 미래가 아닌, 모두의 미래로.

그렇기에.

“아마도.”

카리나는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사랑이겠지.”

그녀의 번져 가는 웃음을 보며 르네거 역시 굳혔던 얼굴을 풀었다.

눈을 곱게 접으며 해사한 미소를 보인다. 언제 보아도 마음이 맑아질 정도로 쾌청한 웃음이었다.

“그럼 저는.”

그는 카리나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녀의 손등에 조심스레 입을 맞춘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네요.”

비스듬하게 치켜뜬 눈은 뇌쇄적이기 짝이 없었다. 나른하지만 빛은 명료한. 절대 흐려지지 않는.

“당신은요?”

카리나는 움찔거렸다. 르네거를 관찰하던 눈을 돌려 버린다.

“내가 대답해 줄 것 같아?”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르네거는 피식 웃으며 손을 내렸다. 그리고 카리나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모아 주었다.

“모든 전쟁이 끝나면, 저와 함께 나가 주십시오.”

모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며, 그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기울였다. 코끝이 맞부딪힐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 카리나는 그의 새파란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밖으로 나가 거리를 거니는 겁니다. 당신에게 어울릴 법한 옷도 입어 보고, 맛있어 보이는 것들도 먹고, 길거리 공연도 보면서 그렇게.”

“…….”

“그렇게 즐겁게.”

“…….”

“전쟁이 끝난 뒤에도. 함께해 주십시오.”

계속 생각해 왔던 것일까. 내가 나가자는 말을 거절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와 함께하기를 원하고 있었던 것인가.

카리나는 목이 뜨거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숨을 크게 들이쉰다. 천천히 끄덕인다.

“그래.”

르네거의 입술이 둥그렇게 올라갔다. 그는 카리나의 뒷머리를 감싸며 뺨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죽지 않는 겁니다.”

“알았어.”

“죽으려 하지 않는 겁니다.”

움찔.

카리나의 어깨가 들썩였다. 르네거는 어깨와 등을 감싸 안으며 재차 속삭였다.

“약속해 주십시오.”

귓바퀴를 더듬어 들어오는 음성은 지극히도 따스했다. 그리고 다정했다. 카리나는 낮게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그렇게 할게.”

르네거는 카리나의 몸을 끌어안았다. 가녀린 등을 토닥이고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며, 못내 품고 있던 마음을 내뱉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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