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탁.
르네거의 방문을 닫은 카리나는 문고리를 잡은 채 그대로 한숨을 내쉬었다.
무언가 많은 대화가 오고 간 것 같은데, 머릿속에 남는 건 단 한 마디밖에 없었다.
-사랑합니다.
카리나는 어깨를 잘게 떨었다. 간질간질한 느낌이 어깨부터 시작해 몸으로 내려와 가슴 한가운데를 매만졌다.
그는 대답을 종용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마음만을 고백할 뿐. 카리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오롯한 행복을 느낄 뿐.
카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더듬었다.
일전에도 숱하게 했던 입맞춤이다. 아니, 그때는 오늘보다 훨씬 더 결이 짙었으며 깊었다. 오늘은 아주 가벼운 입맞춤일 뿐인데.
‘왜 이렇게도.’
뜨거운 건지.
그녀는 입술을 매만지던 손을 내리며 차분하게 숨을 내쉬었다.
르네거와의 시간을 조금 더 음미하고 싶었지만, 기실 그럴 때는 아니었다.
아포칼리타가 공격을 해 왔고, 인간들이 죽었다. 일주일이나 지났으니 연합군에게도 소식이 알려졌을 것이다.
‘빠르게 움직여야 돼.’
카리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소 급하게 발을 재우쳤다.
본관에 있는 사용인들이 별관에 다 모여든 탓에 인파가 빼곡했다.
그들은 카리나를 보고 길을 비켜 주었지만 복도가 좁은 탓에 별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자연스레 늦춰진 걸음으로 사람들 사이를 지나쳤다.
낯선 인간들.
아는 얼굴은 없다.
그동안 저택을 오가며 보았던 사용인들 중 그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본관은 다 무너지고 여기만 남았대. 그래서 살아남은 인간들이 이곳에 모여 있는 중.
모두 죽은 걸까.
그렇다면 릴리는?
카리나는 우뚝 몸을 세웠다. 한층 예민해진 시야로 주변을 둘러본다. 적어도 이 층에는 릴리가 없었다.
그녀는 빠르게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계단에서 만난 인간들도, 홀에 당도해 보이는 인간들도, 대문 밖으로 보이는 인간들도 그 누구도 아는 얼굴이 아니었다.
릴리는커녕 그녀의 갈색 머리칼과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죽은 걸까.
카리나는 벽에 손을 대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속이 메스껍다. 가슴에 들어앉은 무언가가 와르르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저는요. 나중에 디저트 샵을 차리고 싶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놀러 오시겠어요?
그때에 무어라 대답했던가.
생각해 보겠다고, 아직 허락한 것은 아니라고. 그렇게 매정하게 답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릴리는 그것만이라도 감사하다며 웃었다. 환히 웃었다. 그 웃음이 바로 직전처럼 선연한데.
카리나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나는 언제나 내 삶을 대수롭지 않은 걸로 여겨 왔다.
어차피 나는 이곳의 사람이 아니라 생각했고, 살아가는 이유는 복수 하나뿐이라고 생각했고, 언젠가 내 손으로 내 목숨을 끊을 테니 이 삶에서 남겨야 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들이 오만이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는데.
아멜이 죽고 제이슨이 죽었다. 그리고 꽤 어여뻐했던 인간마저 죽어 버렸다.
왜 나는.
모든 걸 잃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카리나 님?”
귀에 익은 목소리. 카리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릴리?”
“어머, 어머. 이렇게 나와 계시면 어떡해요! 일주일이나 누워 계셨던 분이! 당장 들어가셔야죠! 제가 부축해 드릴까요? 네?”
과할 정도로 호들갑을 떠는 걸 보니 릴리가 맞았다.
다행이다.
죽은 게 아니었어.
그녀는 안도의 숨을 토하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축축해진 손바닥이 느껴졌다.
“어디에 있었니? 별관을 찾아봐도 없던데.”
“앗. 절 찾으신 거예요?”
“그래.”
“와아!”
릴리는 두 손을 모으며 감탄했다. 환한 웃음이 얼굴을 가득 채웠다.
“저는 잠시 본관에 다녀왔어요. 옷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도망쳐 버린 거라, 입을 수 있는 옷이 있나 싶어 갔던 건데. 뭐, 아예 폭삭 무너져 버렸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그냥 돌아왔어요.”
카리나는 릴리의 두 손을 바라보았다. 검은 재가 볼썽사납게 묻어있다. 카리나는 그런 릴리의 전신을 훑었다.
“안 다쳤구나.”
“네. 저는 본관에 없었거든요. 저보다 카리나 님이 더 걱정이에요. 이것 봐. 얼굴에 상처가 났잖아요. 흉터에 좋은 연고가 있는데, 드릴게요. 바르셔야 할 거 같아요.”
릴리는 걱정을 머금으며 길게 말했다. 저 얼굴은 샐러딘과 비슷한 것. 르네거와 닮아 있는 것.
나를 아끼고 있구나.
이리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가슴의 빈자리에 기쁨이 들어앉는 듯했다.
“르네거에게 말을 해 주겠다.”
“네?”
느닷없는 말에, 릴리는 고개를 갸 웃하며 반문했다.
“네 주인에게 말을 해 주겠다는 말이다.”
“예에? 무, 무엇을요?”
당황해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카리나는 키득 웃었다. 그러곤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손에 묻은 검은 재를 닦아 주었다.
“네게 퇴직금을 쥐여 주라 해야지. 수도 한복판에 건물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말이야.”
“……예?”
릴리는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듯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반문했다. 카리나는 그녀의 머리를 헝클 듯이 쓰다듬었다.
평온했다.
그리고 행복했다.
수많은 인간들을 이제껏 죽여 놓고, 형제들을 죽여 놓고 이런 말을 하는 건 너무도 이기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난 네가 만들어 준 쿠키가 먹고 싶단다.”
적어도 내가 소중히 여기는 이들만큼은 살아 있어야 했다.
“언제든 가서 먹고 싶어.”
더 이상 내 삶은 대수롭지 않은 게 아니니까.
* * *
“왜 이렇게 늦었어?”
방문을 열자마자 튀어나온 샐러딘의 말이었다. 그는 양 볼을 다소 부풀리며 카리나에게로 다가왔다.
“걱정했잖아. 또 쓰러졌나 해서.”
“난 그렇게 약하지 않아.”
“내 눈앞에서 쓰러진 것만 해도 벌써 두 번째야.”
“세 번은 없어.”
“저번에는 두 번 없다고 했어.”
샐러딘의 연이은 핀잔에, 카리나는 미간을 좁혔다. 이마를 꾹 누르며 그를 흘겨본다.
“르네거를 닮아 가니. 잔소리가 늘어 가지곤.”
샐러딘이 왈칵 짜증을 낼 걸 예상하고 한 말이다.
한데 이상한 일이다.
샐러딘은 화를 내지 않았다. 되레 들쑥날쑥해진 입술을 가다듬고 있을 뿐.
……왜 저래?
카리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와 멀어졌다.
“또 혼자 이상한 생각하고 있는 거면 그만두길 바라. 난 받아 주지 않을 거니까.”
“또 이상한 생각이라니.”
샐러딘은 입을 비죽 내밀며 말했다.
“카리나는 정말 너무해.”
너무해?
카리나는 그런 샐러딘을 향해 시선을 쏘았다.
“너무한 건 너희지.”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으며 턱을 들어 올렸다.
“아포칼리타가 공격해 오면 내가 어떻게 하라고 했니? 숨어 있으라고 했지. 싸움을 크게 벌이지 말라고 했지. 그런데 왜.”
“싫어.”
샐러딘은 그녀의 말허리를 잘랐다. 성큼성큼 다가온다.
“르네거가 그랬어. 카리나는 강하지만 항상 강할 수는 없는 거라고. 도움을 받을 게 아니라 도와줘야 한 다고. 아니, 아니. 그렇다고 해서 내가 걔 말을 듣는 건 아니야! 난 카리나를 걱정하는 마음에!”
카리나의 손이 살짝 움찔거렸다.
르네거는 항상 앞과 뒤가 같구나. 앞에서도 내 걱정, 뒤에서도 내 걱정뿐이라.
카리나는 잠들어 있을 르네거를 떠올리며 작게 웃었다.
샐러딘은 그런 카리나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다 불쑥 말했다.
“그래서, 걔는 좀 어때?”
샐러딘이 나를 제외한 다른 이의 안부를 묻다니. 놀라운 발전이었다. 카리나는 씨익 웃으며 눈썹을 까딱였다.
“많이 나아졌어.”
“흥. 당연히 그래야지. 레피오스 님의 치료를 받았는데.”
그는 콧방귀를 뀌며 으스댔다. 말은 저렇게 해도 기분은 꽤 좋아 보였다.
르네거를 좋아하게 된 건가. 카리나는 앙숙처럼 싸웠던 그들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아, 그러고 보니 히론은?”
“레피오스 님을 데려다준다고 나갔어.”
“데려다준다고? 레피오스 님은 가신 거야?”
“응. 이미 치료할 건 다 했으니까, 쉬기만 하면 될 거래.”
“그래…….”
카리나는 말끝을 흐리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르네거를 만나기 전, 레피오스와 마주쳤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예지 능력으로 이번의 사건을 알고 있었다고.
왜 미리 말을 해 주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는 깨달은 것이 있었으니 괜찮지 않느냐는 반문을 던졌다.
깨달은 것.
나를 소중하게 여겨 주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
많은 것을 깨달았고, 그렇기에 내가 선택할 앞날도 바뀌었다.
하지만 이게 과연 옳은 것일까? 다수의 인간들이 죽었는데도 내 깨달음을 위해서였으니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카리나의 찌푸려진 인상을 본 샐러딘이 물었다. 카리나는 빠르게 표정을 정돈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레피오스에 대해서는 더 생각할 것도 없다.
어차피 몸이 낫는 대로 이곳을 빠져나갈 것이고, 레피오스를 만나지 않을 테니까.
그녀는 샐러딘에게로 집중했다. 그에게 묻고 싶었던 기억을 꺼낸다.
“아멜 근처에 언데드가 있던데.”
“아, 그렇지 않아도 말하려 했어.”
샐러딘 역시 예상하고 있었다는 양 곧바로 대답했다.
“자일이 아버지를 어떻게 살렸는지 궁금하다 했었잖아. 나도 궁금했는데, 이번에 아멜이 말해 줬어.”
반가운 정보였다. 카리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자일이 생명을 창조하는 힘을 얻은 것 같아.”
“……뭐?”
“그래서 죽은 존재를 부활시킬 수 있게 됐어. 카리나 네 능력과는 달라. 네 언데드는 명령을 따르는 수하 같은 느낌이라면, 아멜이 만든 건…….”
샐러딘은 제게 달려들었던 마물 떼를 떠올리며 으으 어깨를 떨었다.
“이지가 없이 본능만 남아 있는 존재들 같았으니까.”
카리나는 입술을 말며 침묵했다.
부활의 능력.
이건 아버지의 능력이었다. 그는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들을 만든 것이고 레피오스를 되살린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버지의 마나핵은 단 두 개였다.
부활의 능력은 마나핵에 포함된 것이 아니었으므로 카리나는 그것에 대해 별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데.
‘그걸 대체 어떻게 가져간 것인가?’
마나핵이 따로 있었던 것인가?
카리나는 머리를 헝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원작에서, 자일은 아버지를 죽이고 네크로맨서 능력을 빼앗는다.
지금의 자일은, 생명을 되살리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결이 비슷하다 생각이 들면 너무 큰 비약일까.
하지만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는 생각이다.
‘좀 더 지켜봐야겠네.’
그녀는 젖혔던 고개를 되돌리며 한쪽 눈을 찡그렸다.
“아직 힘이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겠지. 완전해진다면 살아 있던 그대로 부활하게 될 거야. 아버지도 완전히 되살릴 수 있을 거고.”
“별로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
후우.
카리나는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나 결이 짙은 숨은 아니었다.
그녀는 곧장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열려 있는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어쩌겠니. 이미 벌어진 일인걸. 우리는 우리가 할 일을 해야지.”
쏴아아.
바람이 쏟아졌다. 거센 바람은 그녀의 머리칼이 사방으로 흩날리게 만들었다.
“캄바이트의 마탑으로 가자.”
얼핏 돌아본 그녀의 얼굴에는 승리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연합군을 만날 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