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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76화 (76/135)

76화

히론은 해가 지는 저녁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레피오스 님과 대화가 길어진 건가, 싶었지만 히론의 통통한 배를 보아하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어딘가에서 마물을 잡아먹고 온 게 분명했다.

카리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히론의 턱을 간지럽혔다.

“어디를 다녀온 거야?”

[북쪽 숲에 다녀왔다.]

“마물을 먹고 왔지?”

[그래. 짜증 나 뭐라도 먹어야 했으니.]

히론은 투덜거리며 말했다. 카리나는 그를 더 다정히 쓰다듬었다.

“왜 짜증이 나. 이제 다 괜찮아졌는데.”

[괜찮아졌다고?]

히론의 목소리가 샐쭉해졌다.

[이놈을 피하면 저놈이 오고, 저놈을 피하면 이놈이 오는 상황인데 괜찮아졌다고? 하루가 멀다 하고 사건 사고가 터지는데 이게 어떻게 괜찮을 수 있단 말이냐!]

“그게 어디 내 탓인가. 나한테 화를 내면 어떡하니.”

카리나는 부러 침울한 얼굴을 하며 답했다.

그에 히론의 꼬리가 살짝 흔들렸다. 자신 역시도 카리나에게 괜한 분풀이를 하고 있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네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니다. 빌어먹을 아포칼리타들에게 화가 나는 것이지.]

히론은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묻어 있는 분노는 사라지지 않았다.

[아포칼리타와 전쟁을 할 때, 나는 거대화를 할 것이다.]

“히론.”

[막아도 소용없다. 정말 화가 났으니까.]

그는 날카로운 독니를 내보였다.

[아포칼리타 한 마리라도 잡아먹어야 속이 풀릴 것 같다.]

히론이 거대화를 하면 정말 골이 아파지는데, 싶었으나 지금의 히론을 보아하니 말린다고 말려질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쯧.’

아포칼리타와의 전쟁에서라면 괜찮지 않을까?

본능에 따라 눈앞에 있는 것만 잡아먹을 테니 가장 앞줄에서 달려 나가게 하면 무리가 없을 것 같기는 했다.

불안함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근처에 샐러딘을 두면 어느 정도 마음이 놓이겠지.

카리나는 생각을 정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네 마음대로 해.”

[흥. 기꺼이 허락해 준다는 태도는 사양이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꼬리로 팔을 감싸는 걸 보니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카리나는 쿡쿡 웃으며 그의 머리를 재차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데, 어딜 가는 것이냐?]

별관의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쭉 걸어가고 있던 그들이었다. 카리나는 ‘아차’ 하며 대답했다.

“르네거에게. 샐러딘도 가 있을 거야.”

[그래?]

히론은 고개를 쭉 내밀었다.

[그놈은 어떻더냐?]

“응? 뭐가?”

[크게 다쳤다고 하던데 어떠냐는 말이다.]

카리나는 히론을 쳐다보며 눈을 수 차례 깜빡였다.

“걱정해 주는 거야?”

[누가!]

히론은 빽 소리쳤다.

[절대 아니다. 걱정은 무슨. 널 지킨다고 했으면 티끌 하나도 다치지 않아야 하는데 그렇게 반죽음 상태가 된 게 마뜩잖아서 그런 것이다!]

“그런 것치고는 말이 너무 구구절절하다만.”

[카리나!]

히론은 굵어진 목소리로 외쳤다.

몇 번 더 놀리면 정말 화를 낼 것 같다. 카리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의 목덜미를 긁었다.

“알았어, 알았어. 르네거는 괜찮아.”

[흥. 당연히 괜찮아야지. 레피오스의 치료를 받았으니까.]

샐러딘과 똑같은 말을 하네. 걱정을 들키게 되면 이렇게 변명하는 건가. 카리나는 낮게 웃으며 생각했다.

“그건 그렇고.”

르네거의 방 근처에 다다른 카리나는 다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말이야, 레피오스 님이 다른 이야기는 안 하셨니?”

[다른 이야기?]

히론은 고개를 갸웃했다. 눈을 굴리는 것으로 보아 그와의 대화를 상기하는 듯싶었다.

[별말은 없었다. 그저 당분간은 못 보겠구나 인사만 할 뿐이었지.]

당분간 못 보겠다…….

라는 말은 예지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와 나눴던 대화가 그릇된 것이란 걸 인정하기 때문일까.

어느 쪽이 답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확신할 수 있는 건 카리나는 레피오스의 말대로 그를 만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그래. 마지막 인사도 못 해서 아쉽네.”

아쉽기는 했다. 자신은 레피오스를 좋아했으니까.

그러나 그랬기 때문에 그와의 대화와 그의 가치관이 실망스러운 것이 기도 했다.

자신의 기대와는 다른 모습들이었으니까.

[왜? 무슨 일이 있었느냐?]

“아니. 아무것도.”

그녀는 큰 숨을 길게 내뱉었다. 눈을 느리게 돌려, 히론의 평온한 얼굴을 바라본다. 그의 콧잔등을 꾹 눌러 본다.

“우상화는 쉽게 깨질 수밖에 없다는 걸 알게 돼서.”

카리나는 쓰게 웃었다. 씁쓸함 마음이 치달아 입안이 텁텁해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레피오스는 레피오스이고, 나는 나니까.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체념이라는 낯선 감정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며 르네거의 방 문을 열었다.

* * *

“카리나.”

자신을 향해 손을 뻗는 르네거는 일전보다 훨씬 더 상태가 좋아 보였다.

치료가 잘된 것도 있겠지만, 저 풀려 있는 표정은 아무래도 일전 카리나와의 대화 때문인 듯했다.

자신의 마음이 일방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안도감.

그런 편안한 감정이 그의 얼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런 건.’

잠시 멈춰 있던 카리나는, 이내 그를 외면했다.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제가 했던 말이 그대로 떠올랐기 때문도 있었고, 또 그가 내비쳤던 뜨거운 마음이 상기됐기 때문이다.

생전 처음으로 맞닥뜨리는 감정이었기에, 카리나는 그것을 오롯이 느끼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 피할 수밖에.

“몸은 어떠니?”

그녀는 르네거가 뻗은 손을 무시하고, 침대와 다소 거리가 있는 의자에 몸을 앉혔다.

그 행동에 르네거는 살짝 눈매를 굳혔으나, 이내 원래의 표정을 하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덕분이에요.”

“그래. 덕분인 거 알면 빨리 나아.”

카리나는 다소 무심하게 대꾸하며 고개를 돌렸다. 옆자리에 앉아있는 샐러딘을 쳐다본다.

“넌 왜 그러니?”

샐러딘은 자신이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화가 난 것처럼 미간을 좁히고 눈을 찡그리고 있었다.

또 싸웠나.

“이놈이 자꾸 생색을 내잖아!”

역시. 예상이 맞았다.

카리나는 어느새 익숙해진 흐름을 느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생색?”

“어. 별것도 아닌데 자꾸 말하잖아.”

“별것 아니라니요. 당신의 목숨을 구한 겁니다.”

르네거가 끼어들었다. 샐러딘은 샐쭉해진 눈으로 르네거를 쏘아보았다.

“제가 아니었으면 당신은 지금보다 더 다쳐 있었을 겁니다. 적어도 팔 하나는 잘렸을 것 같은데.”

르네거의 태연한 말에 샐러딘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르네거의 말이 맞았다.

그는 자신을 몇 번이나 구해 주었다. 저 대신 공격을 맞기도 해독을 뒤집어쓰지 않았던가.

“아니, 그래. 그건 알아. 아는데.”

“알면 고맙다는 말은 하셔야지요.”

“……아이씨.”

당연히 알고 있지만 입 밖으로 꺼내는 건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아포칼리타가 인간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다니.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일이다.

“아, 몰라. 그러니까 누가 맘대로 날 구하래?”

그렇기에 샐러딘은 배짱을 부리기로 결정했다.

“네가 멋대로 구해 놓고 나보고 고마워하라는 건 이상한 거지. 네가 마음 편하자고 날 구한 거잖아?”

르네거의 눈이 가늘어졌다. 쯧, 혀를 찬다.

[왜 저놈이 레피오스를 부르라 소리소리를 쳤는지 알겠구나.]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던 히론의 말이었다.

레피오스를 부르라 했다고? 샐러딘이?

모두의 시선이 샐러딘을 향했다.

“야! 말 안 한다 했잖아!”

[뱀의 말을 믿느냐?]

히론은 킥킥거리며 혀를 날름거렸다. 샐러딘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샐러딘이 레피오스 님을 부르라 난리를 쳤어?”

[그래. 안 그러면 죽는다는 둥, 빨리 치료를 해야 한다는 둥,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

“아악! 좀 다물어!”

샐러딘은 히론을 향해 뛰어가며 말했다.

히론은 날렵한 움직임으로 그를 피하며 카리나의 다리를 감쌌다. 카리나에게 오면 그가 손을 못 댈 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씨익, 씩.

샐러딘은 가쁜 숨을 내쉬며 히론을 노려보았다. 그러면서도 양 뺨이 붉게 달아올라 있는 게,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카리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역시.”

르네거의 말이었다.

“절 좋아하시는군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야! 너도 좀 닥쳐!”

“좋아하는 사람에게 욕을 하다니요. 소중하게 대해 주셔야지요.”

“아……. 나 쟤 진짜 싫어.”

샐러딘은 새빨개진 얼굴을 하며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그러다 아, 하며 핏대를 세웠다.

“그러는 히론 너는 이놈 상처도 핥아 줬잖아!”

이번에는 모두의 시선이 히론을 향했다. 눈을 몇 번 끔뻑거리던 히론은, 이내 카리나의 몸에서 떨어지며 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난 나가 있겠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고 있다 보니 영 기분이 나빠서 말이다.]

“말도 안 된다니. 네가 한 짓이거든?”

[히론 님이라 부르라고 몇 번을 말하지 않았느냐? 개 대가리를 달고 있어 멍청할 따름이구나.]

“또 그렇게 말 돌릴래?”

샐러딘과 히론은 으르렁대며 서로를 시선으로 할퀴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르네거는 씨익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모두가 저를 좋아하고 있군요. 이런 따뜻한 사랑을 받게 될 줄이야.”

“아, 좀!”

[그 입 좀 다물거라.]

힐난이 들려오는데도 르네거는 킥킥거리며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의 상황이 즐거운 탓이리라.

카리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한층 노곤해진 어깨를 느끼며 고개를 한 쪽으로 기울였다.

“사이가 좋네, 다들.”

“어딜 봐서?”

[기분 나쁘니 저것들과 엮지 말거라.]

“그러게요. 모두가 저를 좋아해서.”

르네거는 말을 하며 카리나를 향해 눈을 찡긋해 보였다.

……무시하자.

카리나는 그를 외면하며 짝 박수를 쳤다.

“이제 다들 집중해.”

히론과 샐러딘의 시선도 카리나를 향했다.

카리나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팔걸이에 팔을 올렸다. 왼 다리를 꼬며 턱을 괴고 그들을 지그시 응시했다.

신전을 세운 후, 아포칼리타에게 위치가 발각됐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무엇을 할지 아직 알지 못하는 터.

그러니.

“앞으로의 계획을 말할 거니까.”

빠르게 움직여야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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