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77화 (77/135)

77화

원작에서, 탑을 재건한 자일은 연합군을 향해 손을 내민다.

표면적으로는 무가치한 싸움을 이어 가지 말자는 의미였지만 실상은 그것이 아니었다.

사도와 신자를 모으기 위한 방패.

자일은 연합군의 경계가 늦춰지는 것을 틈타 사도와 신자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렇게 뿔뿔이 흩어졌던 그들이 모이자마자,

자일은 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승리했다.

연합군이 방심을 한 탓도 있거니와 7사도의 힘을 모두 가진 자일이 강해진 덕분이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카리나는 무릎 위에 올렸던 손을 바르쥐었다.

‘내가 가져갈 거야.’

그녀는 생각을 정리하며 턱을 들어 올렸다. 저를 지켜보고 있는 세 쌍의 눈을 바라본다.

“샐러딘은 일단 사도를 찾는 데에 집중해. 뭐가 됐든 찾자마자 내게 연락을 주고.”

“알았어.”

“르네거는 몸이 낫는 대로 나와 함께 갈 거야. 히론도.”

르네거와 히론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으나, 샐러딘만 의문을 품었다.

“어디를? 어딜 가?”

차근거리는 그를 향해 카리나는 차분히 대답했다.

“말했잖아. 연합군과 동맹을 맺을 거라고.”

“그러니까 어디로 간다는 거야? 라템은 저놈 때문에 못 갈 테고, 데이펜은 카리나가 수장과 사이가 안 좋으니 못 가는……. 아.”

생각을 마친 샐러딘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카리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작게 웃었다.

“캄바이트의 마탑으로 간다는 말이구나.”

“그러니까 샐러딘 너는 두고 가는 게 맞지.”

“쯧.”

샐러딘은 혀를 차며 머리를 헝클었다. 입이 비죽배죽 나와 있기는 하지만 말을 덧붙이지 않는 게, 당연한 태도처럼 보였다.

[네가 오죽 마법사들을 괴롭혔었어야지. 캄바이트 놈들은 널 보자마자 앞뒤 안 재고 달려들 것이다.]

“알아, 알아. 나는 안 가고 밖에서 정보를 모아 볼게.”

샐러딘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여전히 마뜩잖은 얼굴이다.

르네거의 커진 눈이 그를 향했다.

“마법사를 싫어하셨습니까?”

“어.”

“이유가 있습니까?”

샐러딘은 커다란 눈을 몇 번 깜빡이다, 이내 고개를 휙 돌리며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인간 주제에 날아다니는 게 싫어서.”

샐러딘은 케르베로스와 합쳐진 실험체이기에, 날개가 없었다. 그렇기에 하늘을 나는 존재와는 상극이었다.

아포칼리타 중에서도 날개가 있는 형제들 중 샐러딘에게 물어뜯기지 않았던 이는 카리나와 자일밖에 없으니, 그가 하늘을 날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열등감은 엄청나리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러니 샐러딘이 마법사들을 싫어하는 건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들은 감히 인간 주제에 하늘을 날고 다니지 않는가.

마력을 이용해 천공을 누비고 높이 치솟아 오르는 마법사들을 보며, 샐러딘은 몇 번이고 이를 으득으득 갈곤 했었다.

이러한 행동이 자신의 열등감에서 비롯되는 분노라는 건 샐러딘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샐러딘은 캄바이트를 싫어하는 이유를 말하는 게 퍽 창피했다. 양 귀가 불그스름해진다.

“그러셨군요.”

하지만 르네거는 별반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놀란 눈을 하고 있는 샐러딘을 모른 척하며 카리나에게로 말을 돌렸다.

“저는 내일쯤 되면 움직이는 데에 지장은 없을 듯합니다.”

내일? 카리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안 돼.”

그녀는 단호히 거절했다.

“낮까지만 해도 아파서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못했던 거, 잊었어?”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지금은 정말 괜찮습니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몸이 완전히 나을 때까지는 회복에 집중해.”

“하지만…….”

“안 된다고 말했어.”

카리나의 태도는 퍽 단호했다. 르네거는 시무룩하며 고개를 떨어뜨렸지만, 그러해도 왜인지 기분은 좋았다.

그녀가 자신을 염려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확실히 일전보다는 유해진 태도다. 르네거는 카리나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야, 넌 좋겠다. 카리나가 걱정도 해 주고.”

샐러딘은 투덜거리며 말했다. 르네거를 향하는 눈빛에는 질투와도 비슷한 감정이 담겨 있다. 카리나는 그런 샐러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너도 걱정하고 있어.”

샐러딘은 황급히 카리나를 돌아보았다. 동그랗게 떠진 눈은 그가 얼마나 당황하고 있는지 보여 주는 증표였다.

“……아직도 아파, 카리나?”

그는 카리나의 이마에 손을 대며 말했다. 하지만 열은 없다. 그렇다면……. 왜지? 왜 갑자기 태도가 달라진 거지?

샐러딘은 카리나가 다시 눈을 뜬 순간부터 자신에게 유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인정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지난 이십여 년 카리나는 항상 묘한 거리를 두었으니까.

이렇게 갑자기 저를 기꺼워하는 것도 꽤 간지러운 일이었다.

“그럴 리가.”

그런 샐러딘의 마음을 들여다본 카리나는 낮게 웃으며 그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넌 안 아프지?”

“어어, 응. 난 누구와 달리 며칠씩 쓰러져 있는 약골이 아니니까.”

“그 누구가 제가 아니길 바랍니다.”

“시끄러워.”

샐러딘은 르네거를 휙 쏘아보았다. 카리나는 그런 샐러딘의 양 뺨을 붙잡고 자신을 향하게 만들었다.

“그럼 내일부터 찾아볼 수 있니? 지금쯤 자일도 사도를 찾고 있을 텐데, 마음이 급해져서 말이야.”

끔뻑, 끔뻑.

눈을 끔뻑이던 샐러딘은 이내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알았어. 걱정하지 마.”

“그래. 고마워.”

샐러딘의 얼굴에 경악이 번지는 게 보였다.

카리나 역시 낯간지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러해도 꾹 참아 냈다.

이런 과정을 몇 번 더 거치다 보면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체득할 수 있을 테지.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생긋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밤이 늦은바, 이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졸린 듯 하품을 하고 있는 히론을 감싸 안는다.

“카리나.”

그런 카리나를 붙든 건 르네거의 말이었다.

“벌써 갈 생각입니까?”

그는 입술 끝을 다소 내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깊고 긴 눈매는 여전히 나른했으나, 그 안에 담긴 눈은 축축하기 짝이 없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카리나는,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샐러딘에게 히론을 안겨 주었다.

“너희 먼저 나가 있어.”

“어, 어? 어…… 그래.”

히론을 받아 든 샐러딘은 여실히 당황했지만, 이내 티를 내지 않으며 조용히 방을 나왔다.

방문을 닫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인 건 르네거에게 이끌려 손이 잡혀 있는 카리나의 모습이었다.

와, 진짜 뭐지?

샐러딘은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야.”

끔뻑끔뻑 졸고 있는 히론을 툭 건든다. 히론은 꼬리를 팔랑거리며 샐러딘을 쏘아보았다.

[야가 아니라 히론 님.]

“알았어. 야.”

[아휴, 개 대가리 같으니라고.]

히론은 이제 반쯤 포기한 모양이었다.

그는 다시 한번 하품을 하며 샐러딘의 몸에서 기어 내려왔다. 바닥에 자리를 잡은 후 고개를 꼿꼿하게 들어 올린다.

[왜 부르느냐?]

“아니, 네가 볼 때 좀 그렇지 않아?”

[무엇을?]

“르네거와 카리나가 좀 이상한 것 같아서?”

[저들은 원래 이상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샐러딘은 미간을 좁히며 팔짱을 꼈다. 탁탁 발을 굴린다.

“뭔가 바뀐 거 같단 말이지. 미묘하게 말이야.”

그는 미심쩍은 시선으로 방문을 노려보았다. 히론은 그런 그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네놈의 앞날이나 신경 쓰거라. 사도들을 찾다가 뒈질 수도 있는 게 네 미래이니.]

“날 걱정한다는 말을 그렇게 매섭게 할 필요는 없잖아.”

[누가 걱정을.]

쐐액.

포효하듯 아가리를 벌리던 히론은, 이내 하품을 다시 크게 하며 원래대로 돌아왔다.

[카리나에게는 신경 끄거라.]

그는 휘적휘적 앞서 나아갔다.

[저가 알아서 할 테니.]

* * *

“왜 날 남으라 했니?”

탁, 문이 닫힌 걸 본 카리나는 르네거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할 말이 있어서가 아니야?”

르네거는 그런 카리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할 말이 있을까.

……있을 리가.

르네거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함께 있고 싶어서요.”

카리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쓸데없긴.”

르네거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오늘만 해도 벌써 세 번째 뻗는 손이다.

카리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그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 주었다. 휙, 르네거는 손이 닿자마자 그녀를 잡아당겼다. 졸지에 뒤에서 안기게 된 카리나였지만 거부는 하지 않았다. 그에게 몸을 좀 더 기댄다.

품속에 카리나를 끌어안은 르네거는 그녀의 목덜미의 상처를 살폈다. 역시, 완전히 아물지 않은 상태다.

“당신의 몸도 회복이 되지 않은 것 같군요.”

“이 정도는 괜찮아. 내일이면 다 나을 테고.”

“저는 안 괜찮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넌 인간이니까.”

르네거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노후하는 사자처럼, 그릉거리며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가끔 보면 당신은 스스로를 보살피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는 카리나를 조금 더 세게 끌어안았다.

오르락내리락 움직이는 그녀의 가슴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는다. 다정한 음성이 느리게 흘러나왔다.

“괜찮다고 해서 괜찮아지는 게 아닙니다. 아프면 드러누워도 됩니다. 부디 부탁드리건대, 자신의 몸을 조금 더 소중히 대해 주십시오.”

카리나는 잠시 머뭇했다.

어떤 답을 해야 할까. 입안을 헤매는 말은 그저 괜찮다는 말뿐이었다. 카리나는 허무한 웃음을 흘렸다.

정말 나는 나를 생각하지 않고 있었구나, 그런 생각이 퍼져 나갔기 때문이다.

“카리나.”

이런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것일까. 르네거는 다디단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치료를 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네 몸을 네가 직접 본다면 그런 말이 안 나올 텐데.”

“아니요.”

그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성력은 끊임없이 나오는 것. 당신에게 나눠 주는 것쯤은 제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친 당신을 치료하는 게 제 삶의 낙이라 생각해 주면 안 될까요?”

르네거는 대답 없는 카리나의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녀를 내려다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는다. 움푹 파인 보조개가 보였다. 카리나는 그의 번져 가는 웃음을 지켜보았다.

“아까 전, 당신이 했던 말을 곰곰이 되짚어 보았습니다.”

르네거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모아 귀 뒤로 넘겨 주며 말했다.

“아포칼리타의 이들이 당신을 사랑한다 하였지요.”

카리나의 입매가 굳는 게 보였다. 르네거는 빠르지만 부산스럽지 않게 말을 이었다.

“저는 그것을 사랑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설사 그게 사랑이라 한들, 정말 그들이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 한들.”

“…….”

“당신이 그들에게 반드시 무엇을 해 줘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카리나는 멍하니 그를 응시했다. 그리고 떠올린다. 자신이 그에게 털어놓았던 말들을.

-그들은 정말 나를 사랑한 걸까?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뭘. 아니,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고작 그 한마디를 이제껏 품고 있었던 것인가. 그 흘러가는 말을 붙잡아 생각하고 있던 것인가.

카리나의 눈썹이 움직였다. 찡그리는 것 같기도, 웃는 것 같기도 한 표정.

르네거는 여전한 웃음을 머금으며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사랑이란 건 본디 대가를 바라지 않는 감정이니까요.”

이마에 살며시 입을 맞춘다. 따뜻한 체온이 닿았다, 떨어진다. 그러해도 한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되레 그곳에 더한 열이 올라올 뿐이다.

“그래서 저는 당신을 치료하고 싶어요.”

그는 카리나에게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거부할 수 없는 말이었다. 카리나는 기꺼이 그를 향해 팔을 벌렸다.

그의 입술이 닿아 온다. 숨이 얽혀든다. 손을 잡는다. 깍지 낀 손에서 힘이 느껴진다.

사실 말이야.

네 마음 같은 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어.

카리나는 그의 뒷목을 그러당기며 나지막이 생각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