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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78화 (78/135)

78화

휘이잉.

날 선 바람이 불어왔다. 건조한 사막을 훑고 온 바람은 거친 모래를 양껏 품고 있었다.

쿵, 소리가 날 정도로 유리창이 흔들렸다.

키메라의 형상이 그려져 있는 스테인드글라스가 쩌적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쨍그랑!

불쾌한 소리가 탑 내부를 가득 채웠다.

연이어 크라켄 모양을 하고 있는 동상이 그대로 곤두박질쳐 추락했다.

쿠궁!

산산조각 난 동상은 파편조차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엉망이다.

계단 높은 곳에 서, 그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던 자일은 난간을 잡고 있던 손에 바싹 힘을 주었다.

‘죽었나.’

아멜과 제이슨.

카리나에게 보낸 그들. 제힘을 쥐여 보냈기에 패배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건만.

‘그녀가 강해진…….’

아니, 아니. 혹 그 인간 때문인가. 라템의 인간. 성검의 주인.

그가 아멜과 제이슨을 죽인 것이 아니던가?

합당한 추론이었지만, 진위를 당장 확인해 볼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젠장.’

카리나, 카리나, 카리나!

그녀는 끝까지 나를 거부한다. 끝까지 내 손을 잡지 않는다. 끝까지, 끝까지. 죽을 때까지도 그러하겠지.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분노가 치밀었다. 숨이 가팔라져 정신이 혼미했다.

움직일까?

내가 직접 가 그녀를 끌고 올까.

그의 접혀 있던 날개가 금방이라도 펼쳐질 듯 들썩거렸다.

“어머, 왜 그렇게 화가 나 있는 거야?”

계단을 올라오던 케투스의 음성이었다. 그녀는 고래 특유의 까맣고 반짝이는 피부를 자랑하며 한 걸음씩 자일에게로 다가왔다.

케투스. 고대 괴물 고래와 합쳐진 실험체.

자일은 그런 그녀를 보며 굳혔던 얼굴을 다소 풀었다. 케투스라면 카리나를 이길 수 있지 않을까.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또 카리나 때문이니?”

자일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케투스는 그의 심중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난간 아래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산산이 깨진 스테인드글라스와 동상의 흔적이 보였다. 저건 분명. 한쪽 눈을 찡그린다.

“죽었나 보구나. 아멜과 제이슨도.”

형제들의 죽음을 말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음성에는 어떠한 동정이나 자비도 없었다. 그저 비웃음과 비슷한 조소를 흘릴 뿐.

“루나에 이어서 세 명 째라…….”

“그녀는 데이펜의 수장이 죽인 것이다.”

“루나가 그렇게 약해진 건 카리나의 탓이잖아.”

대꾸하던 케투스는 푸흡 웃으며 자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너는 꼭 카리나의 이야기만 나오면 입을 열더라.”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자일은 말이 없는 이였다. 극악한 상황이 닥쳐도 그는 침묵을 고수했고, 즐거운 상황이 펼쳐져도 그는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런 그가 말을 하고 표정을 바꾸는 경우는 단 하나.

카리나에 관한 일일 때.

그렇기에 탑의 형제들은 카리나를 질투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자일은 누구에게나 우상이었으니까.

그러나 케투스는 즐거워했다.

자일이 카리나에게 미쳐 휘둘리는 꼴을 보며 배를 잡고 깔깔 웃기도 했다.

그러니 지금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고 있는 게 아니던가.

그녀는 자일을 뒤에서 끌어안으며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렇게도 좋니, 카리나가?”

“닥쳐라.”

“좋으면서 또 그러네.”

그녀는 자일의 양팔을 더듬었다. 천천히, 그러나 급하게 그의 몸을 타고 올라간다. 그리고 그의 목덜미에 닿았을 때.

“내가 갈까?”

그녀는 자일의 목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럼 네가 좋아할까?”

날카로운 손톱이 그의 피부를 파고들었다.

붉은 핏방울이 그녀의 손톱 위에 맺혔다.

케투스는 손을 거두며 묻은 핏방울을 할짝였다.

“말해 봐, 자일. 응?”

자일에게서 떨어진 그녀는 난간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까딱, 까딱, 움직이는 모습은 가볍기 짝이 없었으나 그녀는 자일이 인정하는 몇 안 되는 실력자 중 하나였다.

“산 채로 끌고 와라.”

“그건 너무 어려운 주문인걸.”

케투스는 자일에게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자일은 역시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쳇, 볼멘소리를 내며 다시 그에게 다가갔다. 그를 올려다보며 뒷목을 더듬는다. 까치발을 들어 그의 뺨에 살며시 입을 맞춘다.

“하지만 네가 원하니까.”

천천히 움직이는 그녀의 입술은 자일의 입가에 다다랐다.

그의 붉은 입술을 양껏 핥으며, 케투스는 보란 듯이 비소했다.

“목만 붙여서 올게.”

휘이잉.

다시금 바람이 불어왔다.

홀의 정중앙에 우뚝 서 있는 케투스의 동상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 * *

[마탑까지는 얼마나 걸릴 것 같으냐?]

카리나의 팔에 꼭 달라붙어 있던 히론의 말이다.

샐러딘은 사도를 찾겠노라 떠났고, 며칠간의 휴식을 취한 르네거와 카리나는 이제야 움직이게 되었다.

“글쎄. 걸어간다면 한 달은 족히 걸리겠지. 마차를 타도 일주일은 넘을 테고.”

[그렇게나 오래?]

히론은 푹 한숨을 쉬며 말했다. 르네거가 사이에 끼어들었다.

“워프석을 이용하는 건 어떻습니까?”

“넌 이제 라템에서 제명당했잖니.”

“뺏으면 되지 않습니까?”

르네거는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카리나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살짝 저으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적당히 해. 네가 신을 버렸다 해서 양심까지 버린 건 아니니까.”

르네거는 그녀의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카리나를 위해서 하는 일이다.

그녀를 편하게 해 주기 위해 하는 일인데…….

‘나쁜 일이란 말인가?’

나쁘다는 건 행위의 결과에 만족하는 사람이 없었을 경우에 나오는 말이 아니던가.

카리나가 좋아한다면 나쁜 일이 되지 않는 것일 텐데, 왜 거부하는 것인지.

르네거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 카리나의 말을 거역하고 싶진 않았다.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다.

“이번에는 내가 알아서 할게.”

카리나는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며칠간 푹 쉰 것도 있거니와 르네거의 치료를 매시간 받은 그녀였기에, 몸 상태는 그 어느 때보다 좋았다.

“와이번을 부를 거야.”

그녀는 오래전, 와이번의 서식지에서 계약했던 와이번 언데드를 부르기로 결심했다.

히론과 르네거는 동시에 인상을 찌푸렸다.

[네 몸을 생각하라.]

“아직 언데드를 부리기엔 무리가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걱정을 만연히 머금으며 말했다.

물론 그들의 마음은 백번 이해할 수 있었다. 몇 번이고 쓰러졌던 그녀이니, 힘을 쓰지 않는 걸 바라는 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약해 보이니?”

이미 제 몸은 다 나았는데, 모든 행동을 걱정하는 건 염려가 아니라 호들갑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다 너희를 보호한 걸로 알고 있는데.”

카리나는 히론을 내려놓으며 차갑게 대꾸했다.

“내가 열 번을 쓰러졌다 일어나도 너희보다는 강해. 그러니까 비켜.”

히론과 르네거는 서로를 쳐다보다, 이내 수긍하며 비껴 섰다.

시무룩해 보이는 태도에 신경이 조금 쓰였으나, 그러해도 한 번쯤은 언급해야 될 일이기는 했다.

그렇기에 카리나는 그들을 애써 무시했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바닥에 손을 댄다. 손끝에서부터 피어오르는 검은 기운이 땅을 갉아먹듯 아래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쿠구궁.

지면이 흔들렸다. 흡사 지진이 난 것처럼 거센 진동이었으나 그 가운데에 있는 카리나만큼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눈과 코와 입과 귀에서 검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어둠과 같은 것. 그러나 그것보다는 더욱 깊고 짙은 것.

죽음의 기운이 그녀의 몸 전체를 뒤덮었다. 그리고.

파앗!

기운은 말끔하게 소멸되었다. 검은 힘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혹 실패한 것인가, 싶었던 바로 그때.

쿠웅! 지면을 뚫고 가느다란 뼈 한 조각이 튀어나왔다.

곧이어 뼈만 남은 거대한 와이번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역시 뼈 위에 앉아 있는 건 힘드네.

카리나는 뻐근한 허리를 곧게 펴며 생각했다.

드래곤 다음가는 숲의 지배자라 불리는 와이번이니만큼, 그가 날아가는 속도는 제가 날아가는 것에 비견할 바가 아니었다.

이 정도의 속도라면 하루 정도면 도착할 것이다.

카리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걸며 낮게 웃었다. 그리고 히론의 얼굴을 잡아당겼다.

“왜 그래? 왜 자꾸 뒤를 돌아봐?”

히론은 아까부터 거듭해 와이번의 꼬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혹 문제가 생긴 것인가 싶어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지만 별다를 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왜? 카리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흐음.]

침음을 흘리던 히론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일전에 내가 북쪽 숲에 갔을 때가 있지 않느냐.]

“응.”

아포칼리타 때문에 짜증이 나 마물을 잡아먹고 왔을 때였지. 카리나는 상기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때에도 꽤 이상했단 말이지. 자꾸만 시선이 느껴지고.]

“시선?”

[그래. 그때는 마물인 듯하여 신경을 쓰지 않았건만.]

히론의 눈이 싸늘하게 가늘어졌다.

[지금도 같은 시선이 느껴지는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르네거가 끼어들었다.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까?”

그는 성검을 움켜쥐었다. 혹 저들을 공격하는 것이라면 당장 달려 나가겠다는 태도였다. 히론은 르네거를 만류했다.

[아니, 그건 아니다. 그저 우리를 지켜보다 사라졌을 뿐. 별 위험이 될 건 아니지만 의아하여.]

“그렇군요.”

르네거는 검을 내려놓으며 히론과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느껴지는 것은 없다. 하지만 자신은 인간이기 때문에 느끼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고대 마물인 히론의 기감은 그 어떤 존재보다 뛰어나니 말이다.

“으음.”

카리나는 비음을 내며 팔짱을 꼈다. 눈을 한쪽 위로 뜨며 생각에 빠진다.

“이쪽에 붙으려나.”

느닷없는 말에, 르네거는 갸웃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 카리나는 정신을 차리며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테니까.”

말뜻을 감히 짐작할 순 없었지만, 르네거는 얌전히 수긍했다.

카리나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그녀가 맞다면 맞는 것이고 틀리다면 틀린 것이다. 르네거의 사고는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날아오는 바람을 한참 맞고 있던 르네거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카리나는 고개를 살짝 돌려 그를 바라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르네거는 그런 그녀의 옆얼굴을 보며 말을 이었다.

“만약, 연합군이 동맹을 거부하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르네거는 이것이 못내 걱정이었다.

자신이 라템을 배신하고 온 만큼, 자신과 페넬로피가 사이가 좋지 않은 만큼, 혹 연합군 측에서 동맹을 거부할 수 있다는 불안함이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모두 자신의 탓이리라. 르네거는 불쑥 고개를 드는 자책감을 느끼며 입술을 사붓 깨물었다.

“글쎄.”

카리나는 두 다리를 모아 무릎에 턱을 얹었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본다. 저 멀리 지평선을 바라본다. 쾌청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느낀다.

자신의 목표는 아포칼리타의 멸망이다. 멸망을 바라는 이유는 단 하나.

‘지켜야 하기 때문에.’

그런 맥락에서 연합군과의 동맹은 아포칼리타의 멸망을 위한 조건일 뿐이었다.

그러니 만약 동맹이 어그러진다면.

“죽이지, 뭐.”

가차 없이 인간들을 버릴 것이라고.

나는 나의 것만 지키면 되니까.

카리나는 릴리가 주고 간 자색 쿠키를 아삭 씹어 먹으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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