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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79화 (79/135)

79화

캄바이트의 중심지. 마탑은 철옹성이라 불려도 모자람이 없을 만큼 견고한 요새였다.

이곳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아포칼리타의 침략을 허용한 적이 없노라고.

마탑에 사는 마법사들은 그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라템이나 데이펜처럼 눈에 불을 켜고 아포칼리타들을 찾아다니지 않았다.

이는 마법사들 특유의 조용하고 학구적인 성격 때문도 있고, 또 아포칼리타들이 자신에게 큰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는 게 그 이유였다.

물론 단 한 마리.

샐러딘 아포칼리타만 빼고.

마법사들은 각기 샐러딘에게 이를 갈고 있었다.

샐러딘 아포칼리타는 꼭 캄바이트의 탑만 노리며 마법사들을 죽였으니까.

그렇기에 마법사들은 샐러딘 아포칼리타에게만 부득부득 이를 갈고 있었다.

마주친다면 반드시 죽여 버리리라.

그리고 마나핵을 빼 와 연구 자료로 삼으리라.

이렇게 분노를 표하는 그들이었지만, 언급했듯 그들은 오직 샐러딘만 증오할 뿐이었다.

샐러딘 아포칼리타를 제외한 다른 아포칼리타에게는 별반 관심이 없는 그들이었다.

어차피 자주 마주치지 않을뿐더러 그들도 캄바이트의 탑은 웬만하면 공격하지 않으니 적당한 적대만 하고 거리를 두고 있는 참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마법사들 사이에 다른 아포칼리타의 이름이 오르락내리락했다.

바로 카리나 아포칼리타였다.

삼 년 전, 아포칼리타의 탑이 무너진 이유가 그녀의 배신 때문이라는 것을 전해 들었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운데, 그녀는 라템의 차기 수장, 성검의 주인인 르네거 라템과 손을 잡았다고 했다. 거기다 르네거는 그녀에게 홀려 라템을 저버렸다고.

믿을 수 없을 법한 일이었다. 다름 아닌 그 르네거 라템이 마물 중 가장 간악하다던 뱀의 여자와 손을 잡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여 캄바이트의 마탑은 그들의 이야기로 한껏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런 때였다.

“아직도 찾지 못한 것이오?”

캄바이트의 수장, 피에라는 분노를 가감 없이 표하며 눈을 부라렸다.

그녀의 금색 눈동자가 화르를 타올랐다.

꿀꺽.

피에라와 마주 서 있던 마법사들은 고개를 푹 숙이며 두 손을 맞잡았다.

“예. 워낙 발이 빠른 분인지라.”

“흔적을 느끼고 찾아가면 곧장 도망쳐 계시니.”

그들은 저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이야기했다. 피에라는 그것을 정말 듣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내가.”

그녀는 바드득 이를 갈며 말했다.

“그런 변명을 듣고자 두 달이나 두 손을 놓고 있던 것이 아닐 텐데 말이오.”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저 정도의 분노라면 납작 엎드리는 게 최선이다. 마법사들은 곧장 무릎을 꿇었다.

“더 사람을 풀겠습니다!”

“용병들도 고용하여 그분을 쫓겠습니다!”

그들은 마치 회개하는 신관처럼 두 손을 모아 싹싹 빌며 애걸했다. 피에라는 미간을 깊게 좁혔다.

“이틀.”

그녀의 손가락이 두 개 펼쳐졌다.

“이틀 안에 피에톤을 찾아오지 않는다면.”

않는다면?

“그대들의 목이 멀쩡하리란 기대는 하지 마시오.”

히익.

마법사들은 각기 자신의 목을 움켜쥐었다.

저 마녀 같은 수장은 한번 뱉은 말은 꼭 지키는 위인이다.

두 달을 쫓아다녀도 찾지 못한 피에톤 캄바이트를 어떻게 이틀 만에 찾을 수 있겠느냐만, 이 자리에서 죽고 싶지 않은 마법사들은 빠르게 복종해야만 했다.

“아,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나가 보겠습니다.”

피에라는 탐탁지 않다는 듯 쯧, 혀를 찼다. 손을 젓는다. 이만 나가 보라는 뜻이었다.

그들은 꾸벅 인사를 한 뒤 빠르게 그녀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누가 먼저 나가느냐 엎치락뒤치락한 것은 덤이었다.

그런 마법사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피에라는 긴 한숨을 토해 냈다.

정말 멀쩡한 놈이 없다.

피에라는 한쪽 눈을 찡그렸다. 높게 묶었던 머리카락을 풀고 거칠게 쓸어 넘긴다. 꽉 다문 입은 벌려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피에톤 캄바이트.

캄바이트의 배신자.

어느 날 태양신에게 기도를 올리겠다고 혼자 탑을 나간 그는, 그대로 종적을 감춰 버렸다.

정말 증발한 것처럼, 말 그대로 훅 사라져 버렸다.

이후 그의 흔적을 찾긴 했지만 정말 찾은 것뿐이었다. 그는 캄바이트의 추적을 정말 잘 피해 다녔고, 결국 네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반드시 잡아야 한다.’

쿵!

피에라는 책상을 세게 내려치며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피에톤은 캄바이트에 있어야 한다.

그는 지팡이가 선택한 자이자 태양신의 아들.

그런 그가 캄바이트의 수장이 되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이 자리에 앉을 수 있단 말인가?

반드시.

반드시……!

“수장님!”

이때였다. 마법사 수 명이 느닷없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피에라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문을 열라 허락하지 않았소만.”

“그, 그것이……!”

“결례인 것은 알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지금……!”

마법사들은 바들바들 떨며 할 말을 하고 있었다. 피에라는 그제야 이상함을 느끼며 긴장했다.

“무슨 일이오?”

“차, 창밖을 내다보십시오!”

창밖

피에라는 곧장 창가로 다가갔다.

촤악!

드리웠던 커텐을 걷는다.

널찍한 유리창.

그 너머 보이는 것은…….

“와이번 언데드?”

날아오고 있는 와이번이었다.

저게 대체 무슨.

인식할 새도 없었다.

쾅!

와이번이 탑의 철문에 부딪혔다. 기우뚱 넘어가는 철문 너머,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마리의 뱀, 흑발의 남자. 그리고,

새까만 날개.

저것은 분명.

“……아포칼리타.”

그들이었다.

* * *

[콜록, 콜록…….]

히론은 뿌연 연기에 코가 막힌 듯 연이어 기침을 내뱉었다. 꼬리의 방울이 파르르 떨린다.

[너는 착지도 제대로 못하느냐!]

“잘 타고 왔으면서 그런다. 실수할 수도 있지, 뭐.”

카리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히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마탑의 가장 높은 곳에 착지했다.

본래 이 정도의 높이라면 제 날개로는 오기 힘들었을 테다. 하지만 와이번을 이용해 중간 높이까지 올라왔고, 그 반동을 이용해 그녀는 높이 날아오를 수 있었다.

앞으로 캄바이트와의 전쟁에선 이 방법을 써야겠네. 카리나는 바닥에 깔려 있는 돌을 툭툭 치며 생각했다.

[르네거 놈은?]

“올라오고 있을 거야. 와이번이 부순 벽 너머로 넘어갔으니까.”

[흥. 느려 터진 놈 같으니라고.]

그렇게 말은 해도 르네거의 행방이 궁금해 물은 거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카리나는 피식 웃으며 히론을 재차 쓰다듬었다.

이때였다.

“저기다!”

“포위해!”

마법사 수십 명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어느새 카리나의 주변을 둘러싼 그 들은 모두 바닥에 질질 끌릴 정도의 로브를 입고 있었는데, 또한 하나같이 똑같은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아, 맞아.

일반 마법사들은 저 지팡이를 부수면 힘을 못 쓴다 하였지. 수장과 태 양신의 자식만이 맨손으로 힘을 쓸 수 있다 하였고.

카리나는 흐릿했던 기억을 되짚어 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포칼리타가 이곳을 침략하다니…….”

“젠장. 수장님은 어디 계셔?”

“일단 공격해!”

그들의 부들부들 떨리는 지팡이 끝에 녹색 빛이 맺혔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형형한 빛이다.

카리나는 생긋 웃으며 그들을 만류했다.

“왜 이렇게들 급할까.”

그녀는 특유의 비릿한 비소를 지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넘기며, 턱을 위로 치켜든다.

“나는 싸우러 온 게 아니란다.”

사실인가?

마법사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주춤거렸다.

아니, 아니.

저것은 간악한 아포칼리타.

믿을 수 없다.

“공격해!”

한 명의 외침을 시작으로, 수십 개의 빛이 카리나에게로 쏘아 들어왔다.

쾅! 콰광!

폭음이 연달아 이어졌다.

혹, 죽었을까?

아니면 조금의 부상이라도 입었을까?

마법사들은 올라왔던 연기가 가라앉는 것을 지켜보고 숨을 들이켰다.

휘잉!

바람이 불어왔다. 거센 바람은 부풀었던 연기를 모조리 몰아내 주었다. 그리고,

“아. 정말.”

멀쩡히 서 있는 카리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십 명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몸에는 상처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단단한 보호막을 치고 있는 것처럼, 그녀는 그렇게도 견고했다.

“적당히 말로 해서 돌아가려 했는데, 이렇게 막무가내로 덤비면.”

그녀는 손을 들어 올렸다. 길어진 손톱 끝에 새까만 기운이 맴돌았다.

“죽일 수밖에 없잖니.”

카리나는 가장 가까이에 서 있는 마법사에게로 손을 뻗었다.

길게 뽑혀 나온 검은 기운은 곧장 그에게로 날아갔다.

마법사는 그대로 얼어붙은 채 제게로 날아오는 아포칼리타의 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만하시오.”

챙!

카리나의 힘을 쳐 낸 건 피에라, 캄바이트의 수장이었다.

그녀는 휘둘렀던 망토를 갈무리하며 두 다리를 곧게 폈다. 정중앙에 서 있는 카리나를 노려본다.

“당신은…….”

새까만 머리카락. 초록색 눈동자. 감고 있는 하얀 뱀.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봤을 때 유추할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

“아포칼리타의 탑을 무너뜨렸다던 이로군.”

카리나 아포칼리타.

뱀의 여자였다.

그렇지 않아도 탑에서 한창 그녀와 르네거 라템에 대한 이야기가 돌고 있는 상황인데, 이렇게 나타나다니. 피에라는 카리나의 심중을 짐작하며 그녀를 지그시 응시했다.

“내 유명세는 어딜 가도 사그라지지 않네.”

카리나는 생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피에라에게 가까이 다가가고자 발을 내디뎠다. 그러자 모든 마법사들이 주춤거리며 지팡이를 바짝 들어 올렸다.

“싸우러 온 게 아니라니까. 그 지팡이 좀 내려놓을래?”

카리나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마법사들이 들고 있던 지팡이 모두가 하늘 위로 솟구쳤다.

제 의지로 한 행동이 아니었기에, 마법사들은 경악하며 카리나를 바라보았다.

저 아포칼리타가 정신 지배 마법까지 쓰는 것인가. 오한이 들었기 때문이다.

피에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살아온 날이 있는 만큼 더 이상 놀랄 일이 없다 생각했건만, 그녀도 이번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신은 캄바이트의 수장이다.

이러한 동요를 들켜서는 안 되는 것.

그녀는 긴장을 감추며 허리를 빳빳하게 세웠다.

“무슨 일로 찾아온 것이오?”

“흐음.”

카리나는 한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피에라를 관찰했다.

원작에서, 피에라 캄바이트는 나름 비중이 있는 인물이었다.

대나무 같은 꼿꼿함, 흔들림이 없는 성정.

세 개의 가문 중 그나마 제대로 된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이였다.

그래서 책을 읽을 때에 그녀를 꽤 응원을 했었지.

카리나는 새삼스러운 감정을 느끼며 피에라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손님을 이렇게 세워 두고 의중을 묻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것일 텐데 말야.”

“손님?”

피에라의 입술이 비스듬하게 올라갔다. 손을 달싹거린다. 초록색 빛이 그녀의 손바닥 안을 가득 채웠다.

“대답하시오. 무슨 일로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오?”

답하지 않는다면 공격하겠다는 뜻이겠지. 책과 별다를 게 없는 성격이었다. 카리나는 짧게 혀를 찼다.

“성격 참 더럽다니까.”

그녀는 양팔을 크게 벌렸다. 동시에 새까만 날개가 활짝 펼쳐졌다.

“동맹을 맺으러 왔어.”

들어 올려진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가득했다. 조금의 티끌도 없는, 깨끗하고 무결한. 그렇기에,

“거절하면 너희를 다 죽일 거야.”

잔혹한.

카리나는 잔뜩 비소하며 피에라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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